여생을 특별히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지난 삶부터 정리하고 볼 일이다. 말하자면 묵은 작품들을 손봐서 책으로 묶는 일은 지난 삶의 정리 작업인 셈이다. 간절히 소망하건데, 이번 작품집 출간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내용이 과거에 비해 실팍하게 달라졌으면 한다. 더욱 더 간절히 소망하건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한결 원숙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바뀌었으면 한다.
내딴엔 엔간히 힘과 정성을 쏟은 이 작품이 장수를 못 누리고 단명으로 끝난데다가 기획된 장편 연작의 1부인 '밟아도 아리랑'마저 연재 중이던 문예지의 사정으로 갑자기 연재가 중단되는 바람에 나로서는 아쉬움이 무척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일송포켓북에서 <낫>의 포켓북 출판을 제안해왔다. 묻혀서는 안 될 지난 시절의 귀한 작품들이 저가의 보급판으로 독자들에게 널리 읽힌다는 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서 흔쾌히 제안에 응하게 되었다.
반세기 가까이 내 내부의 감옥 안에 갇힌 채 무기징역을 사는 것들이 있었다. 6.25를 전후한 어린시절의 기억들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 녀석들은 나에게, 자유를 달라고, 밝고 넓은 세상을 마음껏 활보하고 싶다고 무던히도 집요하게 탄원을 벌여왔다. 세상을 향해 맨 처음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의 체험들인지라 나로서는 어느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여기저기 산만하게 널려 있는 그 기억의 파편들을 한군데로 뭉뚱그리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며 오랫동안 망설여왔다.
그때가 1977년이니까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생애 두번째 저서인 이 소설집 초판본의 말미에 붙은 작가 후기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면서 그것을 적던 당시의 기억을 퍼뜩 되살렸다. 겉으로는 제법 겸손한 척하면서도 행간에다가는 신진 작가로서의 의욕과 패기를 두툼히 깔고자 했던 내 속셈이 엿보이는 후기라서 한동안 스스로 무안을 타고 말았다.
그 당시의 젊은 기운도 문학을 향한 열정도 지금은 내게서 많이 떠나버렸다. 초판본 후기와 3판본 후기 사이에 끼인 20년 세월 동안 나는 여러 고팽이 삶의 굴곡을 겪어야 했다. 같은 책의 후기를 다시 쓰는 지금, 의욕과 패기를 앞세워 장차 내 문학을 어떠어떠한 방향으로 꾸려나가겠노라고 다짐하고 장담하는 행위를 어느덧 장년에 이른 내 나이가 극구 만류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도 힘 자라는 데까지 꾸준히 그리고 진지하게 소설 창작에 임할 생각임을 밝히는 것이 내가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이다.
어떤 책이 20년 동안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의 권역 안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흔치 않은 행운이요 크나큰 은택이다. 그간 수십 쇄를 거듭하기까지 이 소설집 위에 여일하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을 실감하면서 나는 감히 '사랑의 빚진 자' 임을 자인한다. 아울러 작가로서 내가 뛰놀 수 있는 최초의 멍석을 깔아준 문학과지성사에 대한 고마움을 20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음을 이 자리를 빌려 새삼스레 밝히고 싶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완장』의 줄거리는 각종 언론매체의 사설이나 칼럼 등에 뻔질나게 인용되곤 한다. 그리고 그새 완장병, 완장질, 완장인간, 완장문화 등 여러 신조어를 파생시키기도 했다. 국회의 대 정부 질의 때 국회의원에 의해 『완장』이 의정단상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암울하기만 하던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에 태생부터 잘못된 권력을 야유할 속셈으로 집필된 『완장』의 메시지가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유효하다는 방증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그 덕분에 내 대표작이 『완장』인 양 인구에 회자되면서 작중인물인 임종술과 김부월은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아왔다. 나로서는 그들 두 인물과 함께 감사에 넘치는 세월을 살아온 셈이다. 4판 출간에 맞추어 내가 느끼는 감회의 새로움은 바로 이 감사의 염이 지닌 놀라운 생명력 때문이기도 하다.
……
그동안 『완장』의 내용이 인용된 사례들을 대충 훑어볼라치면 한 가지 기현상이 눈에 띈다. 여가 야를, 야가 여를 꾸짖고 보수가 진보를, 진보가 보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 하에 내 소설을 임의로 차용하는 경우 말이다. 한 편의 해학소설을 통해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진짜배기 거대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 들어내고자 했던 내 창작 의도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때로는 아전인수로 사용되는, 웃지 못할 사례들이 종종 생겨나곤 한다. 만일 지금까지 칼인 줄 잘못 알고 남의 깃털을 무단히 가져다 아무렇게나 휘두르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발 그 보잘것없는 물건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실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이다.
(...) 나는 <완장>을 집필하면서 많이 행복해 했다. 권력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내가 권력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착각이 내가 느끼는 행복감의 원천이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지 않는 이치쯤은 알고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호박에 새퉁스럽게 줄 죽죽 내리그어 세상에 다시 내놓는 까닭은 결단코 수박으로 위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출간한 지 40여 성상이 흐르도록 마치 늙은 호박을 밭에서 갓 거둔 맏물 수박처럼 줄곧 시원칠칠한 눈빛으로 대해주신 독자 여러분의 호의에 감사의 염을 표하기 위함이다. ……그 무렵 나는 시국 사건의 여파로 본의 아니게 노고단 밑 심원마을에 들어가 한 달여 동안을 세상과 등진 채 혼자 지내야 했다. 그곳에서 자취로 생활하는 동안, 태생부터 잘못된 독재 정권이 휘두르는 폭압 앞에 벌레처럼 무력한 존재로 움츠러든 나 자신이 너무도 불쌍하고 처량해서 한 번도 거울 속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심심산골에서 오랫동안 자학의 시간을 견디던 끝에 나는 마침내 유일한 자구책을 만나 하산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작가인 나를 일개 미물 같은 존재로 전락시킨 거대 권력에 효과적으로 보복하는 길은 역시 작가의 펜을 무기 삼아 권력 그 자체를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물건으로 희화화함으로써 실컷 야유하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사실주의적 정공법으로는 독재 정권의 검열을 피하기 어려운 시국이었다. 야유의 수단으로 풍자와 해학을 동원함으로써 당국의 검열을 우회해야만 했다. 이것이 장편소설 『완장』의 출생 배경이다. 이 소설을 씀으로써 나는 비로소 실의와 자괴지심을 딛고 재기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 소설이 절체절명의 궁지에 몰렸던 나를 구원한 셈이다. -‘출간 40주년 기념 특별판(제5판) 작가의 말’에서
그동안 『완장』의 내용이 인용된 사례들을 대충 훑어볼라치면 한 가지 기현상이 눈에 띈다. 여가 야를, 야가 여를 꾸짖고 보수가 진보를, 진보가 보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하에 내 소설을 임의로 차용하는 경우 말이다. 한 편의 해학소설을 통해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를 그려보임으로써 진짜배기 거대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 드러내고자 했던 내 창작 의도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때로는 아전인수로 사용되는, 웃지 못 할 사례들이 종종 생겨나곤 한다. 만일 지금까지 칼인 줄 잘못 알고 남의 깃털을 무단히 가져다 아무렇게나 휘두르신 분들이 계시다면, 제발 그 보잘것없는 물건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으실 것을 이 자리를 빌려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다. -‘제4판 작가의 말’에서
나는 『완장』을 집필하면서 많이 행복해 했다. 권력이 나를 가지고 노는 게 아니라 내가 권력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착각이 내가 느끼는 행복감의 원천이었다.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을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아 마구 꼬집고 할퀴고 옆구리와 발바닥을 간질임으로써 우스꽝스런 꼬락서니로 짓뭉개놓았노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쾌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제3판 작가의 말’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금의 우리 정치 현실을 두고 생각할 때 우리의 주인공 임종술과 김부월이 권력의지 앞에서 매우 착종된 태도를 보였던 저 80년대적 상황하고 전혀 다를 게 없기 때문에 매우 불행한 노릇이지만, 이 작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제2판 작가의 말’에서
만약 독자들 가운데서 이 작품을 읽고 어느 정도 재미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면, 나는 그것이 작가의 계산된 의도에 따르는 재미라기보다는 우리네 시골사람들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연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 특유의 해학성에서 비롯되는 재미일 거라고 말하고 싶다. 쓰는 동안에 내가 줄곧 의식했던 것은 바로 그 해학성이다. 우리의 고전문학 속 곳곳에서 보배처럼 빛나던, 그러나 채만식 선생을 마지막으로 이제는 거의 끊기다시피 한 우리 문학의 해학적 전통이 지난해에 나를 내내 사로잡고 있었던 셈이다. -‘제1판 작가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