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는 데 11년이 걸렸던 지난 소설집과 달리 이번 소설집의 원고는 2022년과 2023년 두 해 사이에 집중적으로 씌어졌다. 그런 만큼 소설집으로 묶이게 될 전체 모습을 상상하면서 퍼즐을 완성하는 것처럼 필요한 조각들을 한 편 한 편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책을 읽는 이들이 각각의 이야기뿐 아니라 작품들이 모여 만드는 모자이크를 함께 상상해준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원래 책의 제목으로 염두에 둔 것은 ‘뜰 안의 볕’이었고, 이 한국어 제목의 도드라짐을 위해 나머지 모든 소설에는 일부러 영어 제목을 썼다. 하지만 편집 과정에서 편집부가 다른 의견을 주었는데 그 제목이 ‘고잉 홈’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소설들은 이민자들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사실 모두가 집에 가는, 집에 가고 싶은, 집에 가려고 하는 이야기였다. 내 나라. 내 고향. 내 본향. 내가 떠나왔고, 그래서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도착한 후에야 찾게 되듯, 나 역시 새로 발견한 이 제목이 마음에 든다. 내 지난 여정의 비밀한 목적지는 결국 ‘고잉 홈’이었던 셈이다.
흩어져 있던 모난 원고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준 김필균 편집자와 문학과지성사, 작품 이면의 무의미들을 모아 의미로 이름 붙여준 박혜진 평론가께 감사드린다. 나의 힘이자 백본, 부모님과 동생에게 감사한다. 내가 살아가는 매일의 세계를 완성시켜주는 아내와 두 딸에게 사랑을 전한다. 교실 안팎에서 만나는 학생이자 동료인 예술가들에게 감사한다. 말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서 있지만 실은 늘 듣고 배우고 있음을 고백한다. 무엇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아직도 문학과 소설의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한다. 읽고 쓰는 일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할지라도, 어제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게 하리라 는 미련한 믿음을 나는 여전히 품고 있다.
가야 할 곳은 정해져 있고 거기가 어딘지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 사이에서 우리가 집이라고, 고향이라고, 본토라고 부르고 믿는 모든 곳은 결국 길의 다른 이름
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서 있고, 언젠가 이 여행이 끝나면 비로소 다 같이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모두에게 그 여행이 너무 고되지 않기를.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우리는 도착할 거니까.
2024년 서울,
봄을 기다리며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내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는 작가는 천재나 괴짜나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하게 쓰고, 일정하게 좌절하고, 일정하게 고치는 사람만이,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내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태초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 누군가 온 우주에 ‘삶의 이유’라는 것을 부여하면서 비로소 세계는 시작되었다는 것. 누군가는 동의할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세계는, 역사는, 삶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에 벌어지는 쉼 없는 투쟁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저 하루하루 죽어가는 DNA 숙주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비루해질 것인가.
이 책에서 저자는 여덟 가지 믿음의 종류를 통해 각각의 믿음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 익어가고 성숙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그중에는 코끼리 같은 동물도 있고, 엘리야, 아브라함, 다윗, 요셉 같은 유명한 성경 속 인물들도 있으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데라 같은 사람도 있다. 저자는 열매 맺는 믿음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유산流産에 빗대어 실패한 믿음에 대해서까지 이야기한다. 이러한 믿음의 여러 양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믿음이란, 마치 하나의 생명처럼 오랜 기다림과 인내를 거쳐 태어나는 무엇이라는 것.
이제껏 우리가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어렵다는 이유로, 귀찮거나 기다리기 지쳤다는 이유로 유산시켜온 믿음의 씨앗들은 몇 개나 될까? 어쩌면 육체적 유산보다 더 나쁜 것은 이러한 영적 유산일지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작은 씨앗들은, 결코 버려지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씨앗은 열매맺기 위해 우리에게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