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국내저자 > 문학일반

이름:우한용

최근작
2024년 10월 <나는, 나에게 시를 가르친다>

떠돌며 사랑하며

교육과 함께 문학이라는 것을 한다고 그가 나선 것은 비유와 허구의 그늘에 숨어들어 둥지를 틀어 보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자서전을 쓰거나 실기를 기록하자면 자신의 존재가 괴멸되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앞으로도 자서전은 못 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자기고백을 강요하는 수필이라니, 가당치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 역마살, 그는 남 못지않게 많이 돌아다녔다. 가는 데마다 밑지는 장사 않겠다는 심정으로 살펴보고 풍정을 맛보느라고 몸이 고달팠다. ‘일처소일작품’ 의 원칙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것은 그의 토포필리아, 묵밭을 아끼는 심성 이 되어가는 듯하다. 여행은 작정을 하고 떠도는 일이다. 물론 돌아올 집이 있기 때문에 여행은 불안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사는 일인 한, 사랑하는 일인 한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는 사유가 동반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 이, 여행에 대한 그의 고정관념이다.

소리 숲

나에게 숲은 유토피아의 표상이다. 나는 평생 숲에서 살고 싶다. 숲은 지극히 풍성한 생명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풍성하다는 것은 모자람이 없다는 뜻이다. 물질 측면에서는 물론 정신 차원에서도 숲은 충만한 공간이다. 숲은 너그럽다. 숲은 정신을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린다. 숲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세속의 삶이 끝나면 나는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세속에서 지은 죄를 사죄하는 과정이 될 터이다. 그것은 이승의 때가 묻은 육신을 숲에 들여보내 정화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내 육신을 자연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심정은 순박하다. 그러나 유토피아 표상을 직설적으로 그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느낌을 먼저 시 형식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대개는 그렇다. 느낌이 먼저 오고 이야기는 뒤에 따라온다. 소설이 힘든 이유는 느낌을 이야기로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그럴듯한 작품이 된다. 그럴듯하다는 건 사리가 맞는다는 뜻이다. 소설가는 느낌과 사리 사이를 오가면서 작업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산다는 게 이야기 속에 느낌을 버무려놓는 일이 아니겠나 싶다.

시인의 강

소설은 문화 자본의 한 유형이다. 문화 자본으로서 소설은 중층적이고 다면적으로 의미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탄탄한 서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 장르로 한정해보면 끝장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야기 혹은 서사는 엄청난 증식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 삶이 결국은 이야기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한 이야기는 어느 순간 끝장이 나지 않는다. 변형 가운데 증식을 거듭한다. 문화의 발생과 성장은 다면적이고 중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야기나 서사는 하나의 문화 형태다. 따라서 다양한 갈래로 전개된다. 덩치가 엄청 커서 공룡 같은 대하소설은 이제 절정기가 지나간 것 같다. 단편소설과 엽편소설, 혹은 스마트소설이 소설판의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매체의 발달과 더불어 그 매체에 맞는 이야기가 새롭게 개발되어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하는 방법 또한 현격하게 달라졌다. 이야기 가운데 사람을 움직이고 뒤흔들어놓는 것은 얼마간 한정되어 있는 듯하다. 그저 그렇고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오래 남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사회·역사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이는 삶의 원질에 가닿는 이야기라야 오래 남는다는 뜻이다. 인간 존재의 가치 증진에 공헌하는 이야기라야 오래 견딘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인간 존재의 문제를 가지고 부단히 고충스런 사유를 놓아버리지 못한다. (중략) 소설집 『시인의 강』에 들어 있는 작품들은 모두가 우공의 일상에서 건져 올린 것들이다. 우공에게는 여행과 독서, 그리고 남의 글 읽어주는 것, 문학 가르치는 것, 그런 것 말고는 다른 일상이 없다. 오히려 새 옷 갈아입고 외출하거나, 외식하는 일 등 남의 일상이 우공에게는 특이 체험이 되기도 한다. 소설가가 소설 쓰는 일은 일상이다. 학자가 연구하는 것도 일상이다. 교수가 학생들 가르치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일상이다. 우공의 소설 재미있어하는 이는 우공과 더불어 일상인일 터이다.

악어

소설 원고를 마무리하고 책으로 내기 전, 나는 사뭇 긴장한다. 다시 한번 내 소설을 돌아보게 된다. 작가가 책을 내는 것은 자신의 작업을 돌아볼 계기를 마련하는 일이기도 하다. 원고를 읽어달라 부탁하려고 프린트본을 만들면서 보니 2012년에 초고를 완성한 걸로 기록되어 있다. 『악어』 한 작품을 가지고 1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낸 셈이다. 오래 붙들고 있으면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만나는 이들에게 ‘악어’ 이야기를 했다. 내 독자들의 기대를 잔뜩 부풀려놓은 셈인데, 그 기대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오래 붙들고 있다고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 터. 다만 관심을 장시간 집중했다는 의미는 헛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중략) 작품을 손질하면서 윤동주의 시 한 구절을 여러 차례 떠올렸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비단 시만 그럴 것인가. 나는 소설가의 ‘슬픈 천명’을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독자와 더불어, 내 소설이 쉽게 씌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이야기해두고 싶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밥 딜런 편이다. 그의 <Blowing in the wind-바람만 아는 답>은 인생의 역정을 이야기하는 중에 전쟁, 자연, 자성, 죽음 등 인생사 중요한 사항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다. 내가 쓰는 소설은 삶에 대한 나의 물음들이다. 그 답은 다시 물음이 되어 ‘바람 속에 선회한다.’ 다음 물음은 ‘인간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하는 것이 될 듯하다.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