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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인문/사회과학

이름:강상규

최근작
2024년 3월 <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 4>

조선정치사의 발견

어린 시절, 돋보기를 쓰고 성경을 읽으시던 할머니가 눈이 침침하다며 나더러 읽어달라고 할 때가 있었다. 무슨 말인지 뜻은 잘 모르지만 큰소리로 또랑또랑 낭독하면 할머니는 무척 기뻐하셨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참 곱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도 돋보기 없이는 책을 볼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읽다가 그대로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그야말로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길거리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평소 쓰는 안경이든 돋보기든 둘 다 내게 필요한 안경이지만 역할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외출할 때면 늘 평소 쓰는 안경으로 바꿔 쓰는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쓴다. 역사나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비슷하다. 보려는 대상에 따라 어떤 거울에 비춰볼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미경으로 보느냐, 망원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뭔가가 잘 보이기도 하고 전혀 드러나지 않기도 하니까. 청년시절, ‘우리는 누구인가? 어떻게 변화하는 세계를 직시하면서 내 몸에 맞는 건강한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품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근대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은 왜 19세기의 서세동점이라는 전환기를 성공적으로 살아내지 못했던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국내외에서 진행된 조선의 죽음을 다루는 분석이나 진술, 웅성거림을 수없이 접해보았다. 하지만 이 사태를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가슴에 와닿게 해석하는 시각을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대다수의 연구나 비평들이 조선의 삶에 대한 이해나 성찰 없이, 조선의 죽음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질문에 대해 접근하자면 우선 몇가지 선행하는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생각이 들었다. 우선 19세기 이땅에서 살았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서세동점이라는 외부로부터 밀려드는 쓰나미, 곧 위기의 정체와 본질은 무엇인가? 쓰나미에 직면한 사람들은 어떤 위기의식을 가졌던 것인가? 그리고 서세동점이라는 위기의 와중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바꾸려 하였고, 이러한 문제를 둘러싼 사람들의 생각이나 견해차이는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는가? 이러한 질문은 환언하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조선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떤 도덕적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어떠한 정치적, 사회적 씨스템 속에서 일상을 살았는가? 조선이 건국된 이래 형성되어온 정치구조와 정치이념은 도대체 어떤 것이며 이후 5백여년의 세월을 겪는 동안 어떠한 변화, 변용을 겪어왔는가? 19세기 서세동점 앞에서 중국과 일본의 동시대인들은 한반도의 사람들과 어떤 점에서 닮고, 또 달랐는가? 그리고 19세기라는 시대적인 한계와 조선의 제한된 정치적 여건 하에서 조선의 국왕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꿈을 품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던 것인가? 그래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났다. 시대의 길목 굽이굽이마다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치열한 문제의식과 열정,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접할 수 있었다. 어떤 때는 감동해서 눈물이 나왔고, 어떤 때는 안타까움에 탄식해야 했다. 아울러 문명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전환기에는 모든 질곡의 표상이면서도 또한 모든 가능성의 중심에 존재하였던 이율배반적인 존재인 국왕과 대면했다. 당대를 구성하는 모든 것과 얽힌 가장 복잡한 사회적 네트워크의 축이었던 국왕, 그 국왕을 보는 눈과 국왕이 보는 눈, 그 양쪽의 끝을 오가며 사람들의 진술을 청취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비로소 조선의 향기와 신념, 19세기의 상황이 조금씩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자의 단아한 세계를 꿈꾸며, “살고 싶다, 의롭고 싶다, 그러나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던 바보스런 선비들의 모습도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청년 안중근이 죽기 직전 뤼순 감옥에서 남긴 “見利思義 見危授命”이라는 글귀가 던지는 메시지가 필자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들에게 기왕의 신념을 저버리고 19세기 후반 세계의 대세로 떠오른 부국강병의 길로 갈아타라는 것은 죽는 것만큼이나 수용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20세기의 길목에서, 세상에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순정한 사연들이 마치 유령처럼 사방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 책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에 대한 조금 긴 호흡의 중간결산 보고서에 해당한다. 이중에서 19세기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지 고민하고 선택해야 했던 국왕과 지식인, 위정자들의 이야기는 이미 몇편의 논문으로 세상에 선을 보인 바 있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입었다. 돌이켜보면 젊은날의 방황과 시련은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고뇌의 여정에서 만난 좋은 분들이 필자를 이끌어주었다. 그중에서도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의 은사님들, 토오꾜오대학교에서 만난 지성들, 정치사상학회와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의 회원들, 그리고 현재 재직하고 있는 방송대학교 일본학과 교수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싶다. 아울러 서남재단은 느리게 가는 나의 행보를 끈기있게 기다리며 독려해주었고, 출판을 맡은 창비 편집진은 헝클어진 원고를 촘촘하게 다듬어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일본유학 중에 돌아가신 아버지, 이제 거동이 많이 불편해지신 어머니! 내 삶의 소중한 순간들이 모두 부모님과 가족들의 따스한 배려와 사랑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청년시절에 만나 인생의 힘겨운 여정 어느 순간에도 내 손을 놓지 않은 아내 한수영은 오늘도 필자가 살아가는 이유이다. 감사하게도 방송대학교 학생들의 반짝거리는 맑은 눈동자는 어두운 밤을 지키는 별빛처럼 내 삶의 소중한 등대가 되어준다. 2013년 3월 대학로 연구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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