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참신하다고 느낀 것은 환경주의자들이 빠지기 쉬운 충격과 공포 전략에 지나치게 의지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희망은 있다는 점을 지나치게 설레발치지 않으면서, 발랄하고 소소한 대안 경제의 새싹들을 무럭무럭 키워가자고 씩씩하게 제안하는 건강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 한국의 독자에게도 지은이의 건강한 경험들이 살아 있는 진짜 세계와의 관계가 확장되는 계기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유년시절 살았던 집은 그리 크진 않았지만 작은 정원이 있었고, 그 정원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은행나무, 장미나무, 단풍나무 등이 종류별로 한그루씩 있었다. 협소한 도시의 주택정원에서 부피를 키우지 못한 나무들은 가늘게 위로만 뻗어나갔지만 우리 식구들은 가을마다 우리집 감나무에서 감을 삼사백접씩 수확할 수 있었다. 접이라는 단위가 백개를 의미한다는 것도 온가족이 동원되어 감을 수확하면서 배웠다. 탱탱한 대추는 사과처럼 아삭아삭하고 새큼한 맛이 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원 빈틈에 호박씨를 뿌리고, 화분에서는 고추를 키우셨다. 집앞 골목에서는 옥수수를 키운 적도 있었다. 옥수수가 내 키보다 커졌을 때는 옥수수 옆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요즘에도 유기농작물보다는 좀더 싼 반찬거리에 더 많은 애정을 보이시는 어머니시니 당시에도 유기농작물의 건강함보다는 야채값이라도 아껴보려는 심사에서 일을 벌이셨던 것이리라. 하지만 작은 호박씨앗에서 길고 긴 줄기가 자라 어느덧 담장 위에 내 머리통보다도 훨씬 큰 호박이 올라앉게 되었을 때 나의 경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담장위에 놓인 커다란 호박을 보고 있으면 하늘위에 떠있던 보름달이 잠깐 내려와 다리쉼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좌절도 있었지만 우리는 대체로 눈부신 진보와 발전을 이루었다는데 동의한다. 극악한 빈곤의 땟국물을 벗고 말그대로 ‘용됐다’며 국제사회에서 칭송마저 듣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가? 생산력의 눈부신 성장 속에 우리 모두는 정말로 행복해졌나? 이 책을 읽다보면 최소한 먹는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행복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물론 저자는 북미의 사례에 근거하고 있지만, 이미 농업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고 슈퍼마켓 식품코너에서 세계화를 눈과 입으로 확인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 엄청난 비극을 북미에만 한정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원치않는 타국의 식품을 거부할 권리마저 없다는 것을, 2008년 촛불의 경험을 통해 이미 뼈아프게 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내게는 과거를 그저 ‘향수’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향’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불행이다. 생산력의 발전이 일말의 사회적 진보를 이루어냈다는 데 대해 동의하고 싶지만, 이미 나의 유년시절 소박한 도시농업을 오늘의 대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절망이다. ‘그때가 좋았지’를 연발하는 복고주의자는 절대 되고 싶지 않지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 속에서 미래를 발견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발전과 이윤이라는 명목으로 오래된 좋은 것들을 모두 내다버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고 했던가. 현실은 우리를 비관주의자로 만들지만, 결국 좀더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슬기는 낙관주의적 태도에서 나올 것이다. 이렇게 암담한 현실을 폭로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이 책의 저자처럼 말이다. 어쩌면 탐스런 호박에 매료되어 그것을 넋 놓고 바라보던 내 유년시절의 경험처럼, 또다시 도시농업을 시작해보면 무언가 새로운 경이로움이 우리를 사로잡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힘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책의 독자들도 비관주의의 함정에 빠지기보다는 낙관주의의 힘으로 세상을 조금씩 밀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