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음악다방’은 하루키 소설과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만남의 자리다. 일종의 ‘기획 다방’으로 보면 된다. 내 삶에 실재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나는 이곳에서 음악을 듣는다. 닳아빠진 책 표지 같은 재즈와 녹슨 칼 같은 록을 듣는다. 음악이라는 낡고 텁텁한 공기를 마신다. 존 레넌과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듣는다. 레스터 영과 텔로니어스 멍크, 마일스 데이비스를 듣는다.
탁자 위에는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그려진 머그컵이 놓여 있다. 찌그러진 담뱃갑과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일회용 라이터가 있다. 건너편 바 카운터에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닮은 사내가 커피를 내린다. 사내의 어깨 너머로 오래된 레코드들이 숨을 죽인 채 도열해 있다. 레코드 수납장 맨 위에 한대수의 사진이 놓여 있다. 카운터 옆에 공중전화기가 서 있다. 고물 오디오가 있다. 아주 이따금 제대로 된 소리를 내는, 찢어진 스피커가 있다. 턴테이블이 무딘 바늘을 뻗고 납작 엎드려 있다. 에곤 실레의 벌거벗은 소녀 그림도 걸려 있다.
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힘에 떠밀려 글을 쓰기 시작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에 귀를 기울인 채 글을 쓴다. 학생들이 쓰다 버린 노트에, 이면지에, 메모지에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긁적인다. 프루스트의 말처럼 상상이란 없다. 단지 기억만으로 여백을 채워 넣을 뿐이다.
음악에 대한 기억을 되살린다. 조각난 기억의 퍼즐 조각을 맞춘다. 퍼즐은 록의 역사가 되고 재즈의 역사가 된다. 어느덧 여백은 채워지고 퍼즐은 완성된다. 그것은 개인의 기억이자 집단의 기억이다.
이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서평이자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에 대한 감상이다. 록과 재즈의 역사를 요약한 노트이자, 독자들을 록과 재즈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안내서다. 내 삶의 자전적 기록이다. 나는 문학평론가도 음악평론가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과 다르게 오로지 나만의 방식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소설에 등장하는 음악을 감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음악다방’에는 1960년대의 아련한 꿈이 있고 70년대의 자유정신과 80년대의 억압이 있다. 90년대의 좌절과 2000년대의 환멸이 상존한다. 꿈과 억압, 좌절과 환멸의 한복판에는 어김없이 음악이 가로지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어둡거나 무겁거나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시간 내내 음악을 들으며 나는 들뜬 감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감정을 정화시키거나 증폭시키지 않는가.
내가 이 책을 쓸 때만큼이나 당신도 이 책을 즐겁게 읽어 주기를 바란다. 이 책이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과 록과 재즈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전 좌파도 우파도 아니예요."
"그렇다고 자네가 중립이라고 생각하나?"
영화 [컴퍼니 유 킵] 중에서
몇 해 전 필리핀으로 건너가 반년을 머문 적이 있다. 출국 직전까지 나는 꼬박 3년을 생존권을 지키려고 싸웠다. 그 기간 동안 나는 1000일 가까운 날들을 조합사무실과 천막에서 농성하며 보냈다. 또한 세 번이나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해고 위협을 받았으며 후배 노조활동가와 함께 해고 결정을 받기도 했다.
필리핀에 도착한 다음날부터 나는 매일 극심한 위경련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아마도 지난 3년간의 스트레스와 몸을 돌보지 않은 데서 오는 후유증이었던 것 같다. 후유증이 꽤 컸던지 약을 사먹어도 약효가 듣지 않아 아픈 배만 부여잡고 방바닥을 데굴데굴 뒹굴며 칼로 도려내는 통증을 견뎌내야 했다.
그렇게 죽을 둥 살 둥 한 달여가 지났을까…… 필리핀 친구 하나가 끙끙 앓고 있는 내 몰골을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내가 사정을 말하자 그는 마당 구석구석에서 흔하디흔하게 자라고 있는 관목의 어린 잎사귀 세 잎을 따서 달여 마시라고 했다.
나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랬더니 세상에나 놀랍게도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배앓이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필리핀 땅에서 딱히 할 일이 없는 것을 깨달았다. 떠밀리듯 고향땅을 떠나온 처지라 읽을 만한 책 한권 챙겨오지 못했고, 주머니에는 한국으로 돌아갈 항공권 한 장만이 달랑 있을 뿐 여윳돈이 넉넉지 않아서 어디 한군데 여행을 다닐 형편도 못됐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동네 구멍가게인 ‘사리사리’에서 ‘산 미겔’(San Miguel) 맥주를 사다가 마셔대는 일뿐이었다. 나는 열대의 폭염이 쏟아지는 한낮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이 쏟아질 때까지, 더러는 스콜의 세찬 빗줄기가 들이치는 처마 밑에서 말보로 라이트가 필터까지 타 들어갈 때까지 홀짝홀짝 맥주를 마셔댔다. 참으로 무료하고 침울한 일상이었다.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세월을 흘려보내다가 우연히 술자리에서 필리핀 친구 한명을 사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반군이 되어 정글 속에서 청춘을 불태웠던 사내였다. 나는 그에게 정글에서의 삶을 묻지 않았다. 그의 삶이란 말로 그려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묻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나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서로에 대해서 속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한국에서 글을 썼던 것을 알게 된 그는 "작가든 기자든 글을 쓰는 사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글로써 보여주는 존재"라며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다시 만나지 못했으나 그가 내게 건넸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글로 보여주는 존재”라는 말은 이상하다시피 내 뇌리 속 깊이 뿌리박히게 되었다. 어쩌면 그것은 내 평생의 화두가 될지도 모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낮에는 돈벌이를 하러 일을 나갔고 밤에는 옥탑 자취방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비주류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비주류란 임금노동으로 살아가는 기본계급들뿐만 아니라 자본과 권력에 의해 육체 및 정신적 소외를 받고 좌절하는 모든 사람들인데, 적어도 그들은 한국 자본주의에서는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비극적 존재의 삶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들 당사자에게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 깨지고 터지고 일터에서 쫓겨나고 짐승처럼 일하다가 죽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나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렸다. 비극적 삶을 희극적으로 그리고 자본주의를 희화하며 자본주의의 심장을 찌르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비주류들이 다시 자본과 ‘맞짱뜨는’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자본가, 권력자, 관료, 권력기관, 어용언론, 어용학자, 극우 파시스트 등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들을 한데 싸잡아서 조롱하려고 했다. 그 거대하고 셀 수도 없는 괴물들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릴 수만 있다면 형식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것이 만담이든, 만화든, 판타지든, 무협지든, B급 영화든, 포르노든 상관없이 소설에다 가져다 쓸 수 있는 형식이란 형식은 마구잡이로 차용해왔다. 전통적인 소설문법도 무시했고 사건의 인과관계라는 낡은 사슬도 끊어버렸다. 문학성? 철학적 사유? 사실주의? 대중성? 뭐 이런 것들은 애초부터 개한테나 던져주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내 소설은 마구잡이 잡탕 섞어찌개와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소설에 대해 만족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앞으로 닥칠 일들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배달부 군 남매와 마피디, 잊혀진 전사 등이 풀어놓을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몫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이야기가 진짜 알짜가 되어야 한다.
이 소설을 쓸 수 있게 영감을 주고 도움을 준 내 친구에게 깊이 감사한다. 이제 당분간 고요 속에 잠겨 있어야겠다.
2014년 3월 인천 근처에서 조혁신
이 소설집은 바로 내가 소설가로서 기자로서 그리고 불합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절망과 상실감이라는 심해에서 표류하며 고뇌했던 짧은 기록이다. 과거에 습작처럼 발표해 놓았던 글들을 모아 가필하고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삼류인생들의 쓰라린 경험들을 떠올리며 새로이 썼다. 때문에 소설 속 등장인물에는 내 자신의 비겁한 모습이 가감 없이 투영되어 있다.
나는 소설에는 인생의 희비극이 공존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고단한 삶에서 웃음이 없다면 그것 자체가 지나친 비극이며, 고단한 삶을 망각한 채 등신처럼 늘 희룽거리는 것은 한심한 코미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소설이 과연 인생의 희비극을 현실감 있게 공유하고 있는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고 여전히 불만족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이란 내 자신을 지탱하는 버팀목일 뿐만 아니라 적어도 각박한 세상 속에서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의 헐벗은 영혼을 보듬어줄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라고 믿기 때문에 새로이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