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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에세이
국내저자 >

이름:박연준

성별:여성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80년, 대한민국 서울

직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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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큰글자책] 밤은 길고, 괴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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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포옹

이제 나는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 당신이 간직한 금이 혹시 나로 인해 부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다가서는 포옹이 좋다. 등과 등에 서로의 손바닥이 닿을 때, 가벼운 포개짐이 좋다. 고양이처럼 코끝으로 인사하며 시작하고 싶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금 간 것을 계속 살피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어렵더라도.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탐했다. 집에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 붙잡고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조르던 ‘찐득이’가 나였다. 옛날과 이야기라니. 지나간 일들은 모두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언제부터 알았을까? 구전口傳에서 책으로 옮겨가는 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괴롭히지 않고도 이야기를 구할 수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았다. 30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나를 거쳐간 책들이 얼마나 될까? 그 책들은 나를 통과해 나와 연루되었다. 내가 지금의 나일 수 있도록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확신이 든다. 책은 다방면으로 사용할 수 있다. 슬플 때 얼굴을 가릴 수 있다. 얼굴을 가리고 조금 울 수도 있다. 마음이 펄럭일 때 납작한 돌멩이처럼 배 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다. 잡생각이 가득할 때 같은 문장을 반복해 읽으며 생각의 둘레를 걷고, 걷고, 또 걸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생각의 둘레에서 벗어나 책 속으로 걸어들어갈 수도 있다.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을 때 펼치면 아늑해진다. 나는 운이 좋게도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작가를 여럿 알고 있다. 내 모습이 싫을 때 가장 먼 곳으로 재빨리 데려다주는 것은 책뿐이다. 어떤 비행기도 하지 못한다. 돌아오는 것도 쉽다. 음악이나 영화에서 빠져나오려면 버튼을 눌러야 하지만 책은 간단하다. 눈을 떼면 된다. 내 몸처럼 붙었다 다른 몸처럼 떨어진다. 혼자 행하지만 외롭지 않은 일이 독서다. 좋은 책을 읽고 난 뒤 책장을 덮는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심심할 땐 책이 좋다. 내가 책을 읽는 첫번째 이유는 ‘재미’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모든 재미있는 일은 나를 변하게 하고, 삶을 변하게 하고, 세상을 변하게 만든다. 그러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작고 가벼운’ 무기를 사야 한다면, 책을 사야 한다. 둘러보니 우리집은 작고 가벼운 무기로 가득찬 무기고武器庫다. 든든하고 감사하다. 존 버거는 “침묵도 훌륭한 소통수단이 된다”고 했다. 존 버거는 다른 의미로 이야기를 했겠지만, 순간 독서가 떠올랐다. 독서야말로 침묵 안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소통이니까. ‘환희’를 동반한 놀람은 대부분 책 읽는 중에 일어났다. 현실에선 기가 막힌 일이나 더 나쁜 일들만 나를 놀라게 했다. 늙어 죽을 때까지 독서를 즐기고 끼적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것은 타인과 소통을 끊지 않겠다는 결의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는 것. 주고, 받는 것. 결국 책을 읽는 행위는 남의 말을 들으려는 행위다. 누군가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이쪽에서 받아주는 행위다. 그 사람이 말을 끝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존 버거) 책을 읽는다. 스스로 최고의 경지에 올랐다고 믿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꼰대가 된다. 책을 읽을 필요 없이 자신의 세계가 견고해져버리기 때문이다. 책을 열렬히 읽는 사람 중엔 꼰대가 드물다. 나는 독서도 좋아하고 일기 쓰는 일도 좋아한다. 하물며 책을 만지고 쓰는 일기라면! 이 책을 기획한 김민정 시인의 말을 ‘열심히’ 들은 나는 책 리뷰가 되지 않도록 주의했다. 책을 만지고, 책을 살고, 책 곁에서 ‘책과 같이 지낸 날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소소한 일상을 적는 중에 책을 조금 곁들였다. 일기란 기본적으로 ‘혼잣말’의 자세를 취하기 때문에 때로 뜬금없거나 무질서한 언어의 나열이 됐는지도 모르겠다. 일기라는 장르에 기대 부끄러움도 모르고 지껄였다. 그러나 일기는 얼마나 소중한지! 인생이 산이라면 일기는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다. 이 하찮은 나무들이 모여 극진함이 깃든 산을 이루기를! 부부가 함께 독서일기를 쓸 수 있도록 기획해준 김민정 시인과 책을 만드는 데 함께 애써주신 도한나, 김필균, 이기준 디자이너께 감사드린다.

마음을 보내려는 마음

고양이에게 ‘높이’라는 숨숨집이 필요하다면 인간에게는 ‘다락’이라는 은신처가 필요하다. 책을 쓰는 동안 다락에 앉아 있다고 상상했다. 필요해서 그랬다. 세상과 거리를 확보해 세상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넓고 매끈한 공간이 아니라 잉여의 공간, 잊힌 공간에 머물고 싶었다. 세상과 단절된 공간을 찾으면서도 창문에 배를 맞대고 살아가는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존재하고 싶었다. 모든 것과 단절되었다는 감각은 꿈꾸기에도 사유하기에도, 세상을 사랑하기에도 좋았다. 지금 세상에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감각이라 상상이라는 안간힘이 필요했다. 글을 시작하고 시간이 흘러, 스스로 쓰고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본격적으로’ 머문 공간이 다락이다. 먼지와 거미, 작은 쥐들의 뛰어다님, 오래된 책, 고장 난 선풍기, 작고 더러운 창문으로 불투명하게 보이는 세상…… 다락은 높고 멀고 아득해 무엇과도 닿지 않으면서 무엇이든 굽어볼 수 있다. 낮은 지붕 아래 생각을 풀어놓으면 하루나 이틀, 혹은 더 먼 시간까지 그 생각 안에만 잠길 수 있게 한다. 다락에 앉아 오래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에 밑줄을 그었다. 낡고 사라져가는 것, 존재하지만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새벽, 고양이, 유실물, 달력, 편지 같은 것. 기억에서 사라진 것이 추억으로 쌓인 곳에서 글을 쓰는 기쁨이 있었다. (…) 다락은 높고 마음은 낮으니, 내 낮은 마음을 당신 쪽으로 보내려 한다.

밤, 비, 뱀

열두 살 때 내 꿈은 디제이였다. 조곤조곤 이야기한 뒤 근사한 음악을 틀고, 턱을 괴고 있고 싶었다. 세상을 향해, 밤에 깨어 있는 자를 향해, 오래된 벽이나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지붕에게, 병든 자와 건강한 자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필요 없다고 외 치는 자에게, 말과 음악을 동시에, 보내고 싶었다. 반쯤 꿈이 이루어졌나? 시를 종이에 옮기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 디제이의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디제이다. 내 시는, 내가 쓰고 당신이 연주하는 음악이다. ―에세이 「괴팍한 디제이의 음악 일기」 중에서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

어느 여름 저녁 파초 잎 아래에서 당신이 울고 있다면 어느 여름 저녁 내 얼굴이 못생겼다면 그건 슬픔이 얼굴을 깔고 앉았기 때문. 2024년 4월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스물다섯 때, 시가 몸살나게 좋았다. 그랬으니 신생아처럼 하루 스무 시간 잠으로 보내는, 아버지 발아래 엎드려 자꾸만 연필을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시든 발목, 혈관 깊숙이 빨대를 꽂아, 공들여 시를 뽑아먹었다. 시를 뽑아먹을수록 나는 통통해지고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툭, 툭, 부러졌다. 그게 마음이 아프다. 내 빈 뱃속, 아이가 들어서지 않은 텅 빈 뱃속이 늘 콤플렉스였다. 나는 처녀의 몸으로 빈 자궁을 걱정하며, 대신 시가 가득 잉태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자꾸만 '상상유산'을 했다. 배지도 않은 아기를 질질 흘리는 상상으로 자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러니 나는 피를 꼼꼼히 데운다. 구석구석 빠짐없이 따뜻해지도록 신경써서 데운다. 욕심 많은 헛된 어미가 되어, 내게 금지된 아기를 꿈꾸며, 내 치부에서 피어나는 시를 위해, 빨간 피를 데운다. 이 생활을 가능한 천천히, 오래도록 하고 싶다. 첫시집을 낸다고 생각하니 처마밑에 애처롭게 매달린 고드름이 보고 싶다. 이 시집을 어린 남동생 태준에게 바친다. 시무룩한 겨울밤 달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꺾어주던, 결이 곱고 말랑말랑한 아기 시인이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꽃은 자신이 왜 피는지 모른다. 모르고 핀다. 아버지는 戰場이었다. 나는 그가 뽑아 든 무딘 칼. 그는 나를 사용할 줄 몰랐으므로 나는 빛나려다, 말았다. 56년 동안 ‘蘭中日記’를 써오다 지난 가을 잠드신 나의 아버지께 삼가, 시집을 바친다. 2012년 가을

우리는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네 이름을 발음하는 내 입술에 몇 개의 별들이 얼음처럼 부서진다.” 오래전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첫 문장을 지금까지 외우고 있네요. 설렘과 두려움 속에서 당신 입술 위 내 이름을, 부서지는 몇 개의 별들을 상상해보았습니다. 먼 곳에서 나를 향해, 별들이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녁이 되자 슬퍼졌습니다. 무릎을 꿇고 ‘얼음을 주세요’란 제목으로 시를 썼지요. 그 시로 시인이 될 줄은 몰랐지만 시를 쓰던 순간, 파랗게 내가 곤두선 불꽃이 된 기분이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자기감정을 아는 것, 사랑은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나는 순해졌습니다. 지독함이 스스로 옷을 벗을 때까지, 사랑했거든요. 우리는 새벽의 나무 둘처럼 행복합니다. 잉걸불 속으로 걸어가는 한 쌍의 단도처럼 용감합니다. 그때 별들이 왜 하필 이쪽으로 걸어왔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결혼 선언을 대신할 것입니다. 각자의 글이 빵과 소스 같기를, 그렇게 어우러져 읽히기를 바랍니다. 책의 처음과 끝에 김민정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드니에서 만났던 분들, 어머니와 남동생 태준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나보다 먼저 생각하게 되는 사람, 나의 JJ에게도 감사와 사랑을 전합니다. 천천히 오래 걸어요, 우리! 2015년 12월, 서교동에서

정말인데 모른대요

어린 시절 질문이 많았던 저는 어른들을 자주 귀찮게 하는 아이였어요. 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지 않는 어른들을 보면, ‘쳇! 정말인데 모른대요!’ 하고 속으로 토라졌지요. 어른들은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요. 여러분은 누군가 우는 모습을 보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어요? 그 소리에 가만가만 귀를 기울여본 적 있나요? 저는 누군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귀가 커다래져요. 커다래진 귓속으로 우는 사람의 얼굴이, 손이, 마음이 들어오기도 해요. 잠잘 때는 귀를 꼼꼼히 닫고, 곤히 자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커서 ‘천사의 날개’처럼 커다란 귀를 가진대요. 정말이에요. (모르지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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