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서도 작업 패턴은 변하지 않았다.
밤늦게 작업을 하다보면 아기가 깨어 버리기 일쑤였다.
꼭 마무리해야 하는 작업을 할 때면 아이를 업고서 책상 앞에 앉아 작업하는 날들이 많았다.
그때부터였을까. 엄마에 대한 그림책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여러 의미 안에서 유독
‘희생하는 엄마’라는 시선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나는 엄마라는 정체성을 끌어안기까지 시간이 더디 걸렸고,
어떻게든 도망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렇게 시작했던 작업이 아이가 7살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마음은 조금 더 붙잡고 싶지만 더 붙잡는다고 무엇이 더 좋아질까...
여러 버전의 더미로 고쳐나가다 늑대 부인을 만났다.
그 이후 늑대 부인은 나의 세계를 거침없이 활보하며 다녔다.
그리고 스스로 탈출구를 찾아 나섰다.
작업 초창기 나는 매 순간 망설였다. 이래도 될까?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러던 작년 어느 날이었다.
누군가가 쏜 화살이 왼쪽 가슴에 꽂히는 꿈을 꾸었다.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슴팍이 뜨거워지는 느낌.
내 온몸이 이렇게 뜨겁게 달아오를 수도 있구나, 하고 꿈이 나에게 알려 주었다.
나는 그 후로 다시 해결점을 찾고 후반부 작업을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이 작업은 그렇게 굽이 굽이마다 꿈의 도움을 받아 풀어 나갔다.
어찌 보면 그 날의 꿈이 이 작업을 낳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세상에는 엄마란 이름의 수많은 이들이 살고 있다.
일부는 나와 같이 그 모성의 무게에 허우적대기도 하고,
사회적 잣대에 숨죽이며 살고 있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잠시 그 무거워진 짐들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우리도 가끔은 우리만의 숲에서 뛰어다니자고 말해 주고 싶었다.
어느 날 드넓은 숲을 향해 자유롭게 뛰어가는 당신을 만나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