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반의 경성에는,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여성들, 여성으로서 교육을 받고 더 넓은 세계를 꿈꾸던 이들은 물론, 막연히 일본의 화려함이나 자유연애를 동경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시작점에 놓여 있는 「경성 기담」과 「상해 기담」도 그렇다. 비슷한 시기, 비슷하게 부유한 명문가의 딸이라 해도, 누군가는 「경성 기담」처럼 ‘이왕비 전하의 웨딩드레스’와 자유연애를 동경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상해 기담」처럼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타지로 떠났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글이, 두 이야기의 시대인 1932∼1933년을 배경으로, ‘마리’라는 이름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여섯 편의 이야기들로 느슨하게 이어졌다. 이들 중에는 민족주의자도, 친일파도, 근왕주의자도 있다. 조선 여성은 물론, 일본 여성과 중국 여성도 있다. 10대 소녀부터 제법 나이가 든 여성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이들, ‘마리’라는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는 여성들은, 3·1운동에서 십 년 남짓 지난 시대, 도쿄에서는 이봉창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고,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조선의 왕족 이우가 일본 화족과의 결혼을 결사반대하고, 경성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고향에 돌아가 『농민독본』을 펼치고 계몽운동을 전개하던, 바로 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의무를, 누군가는 조국을, 누군가는 정의를, 그렇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 노력하면서.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작가의 말을 쓰면서야 생각이 났는데, 이 책은 첫 단편집을 내고 8년 만에 내는 단편집이다. 작가로서 글을 써 온 기간에 비하면 단편을 많이 쓰지 않았던 것인가 싶다가도, 그동안 앤솔러지며 청탁이며 이런저런 일들로 써 온 단편들을 헤아려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역시 내가 게으른 탓이었나, 다시 생각해본다.
<나와 세빈이와 흰 토끼 인형>은 인간이 언젠가 본격적으로 의체를 쓰게 되면 우리가 이 의체를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인간의 모습을 한 의체와 그렇지 않은 의체에 대해서는 어떨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쓰게 되었다. 비인간형 의체가 하필이면 토끼 형태가 된 것은, 과학소설작가연대 2기 운영진의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다. 2기 대표님인 듀나 작가님을 대신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토끼 인형을 본 순간, 이 이야기는 바로 만들어졌다.
<우주 멀미와 함께 살아가는 법>은 아쿠아리움에서 우주처럼 어두운 배경 아래 둥실둥실 떠다니는 달해파리들을 보다가 떠올린 이야기다. <교환 및 반품은 7일간 가능합니다>는 사람이 죽은 뒤의 사십구재가 어떻게 만들어졌을지를 생각하다가 만든 이야기다. 어쩌면 옛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고도 대략 한두 달 때쯤은 온전히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에서, 사람이 죽고도 49일 동안은 온전히 저승에 다 도달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레디메이드 옵티미스트>는 심리상담센터나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이 말하는 “헤르만 헤세도 정신과 약을 꼬박꼬박 잘 먹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이 이야기 중간에 언급되는 ‘심초하’ 작가는 요즘 내가 무척 좋아하는 세 작가님의 성함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서 만든 이름이다. 심너울, 김초엽, 문목하 작가님. 제가 작가님들을 많이 좋아하고 질투합니다.
<옴팔로스>는 단행본에 실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환상문학웹진 거울>에서 한중 SF 교류를 할 때 참여하며 내 소설 중 제일 먼저 외국어로 번역된 소설이 되었다. 2020년에 신진호 연출가님이 김동식, 박민재 작가님의 단편들과 함께 <우주에 가고 싶어 했었으니까>라는 옴니버스 SF 연극으로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바이센테니얼 비블리오필>은 계속 책을 읽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창립기념일 무렵마다 올해 몇 권이나 책을 샀고, 이 추세로 80세까지 책을 읽으면 앞으로 몇 권을 더 읽을 수 있는지 계산해준다. 어느 해인가, 그 통계에서 “현재의 독서 패턴을 유지하신다면 80세까지 만오천 권의 책을 더 읽으실 수 있어요”라는 글을 읽었다. 만오천 권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지만, ‘그것밖에 못 읽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을 보고서야, 일찍 죽고 싶지 않다, 최대한 가늘고 길게 오래 살면서 책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이야기는 《여성작가 SF 단편모음집》에 수록되었고, 이번에 몇 군데를 수정했다.
<불법 개조 가이노이드 성기 절단 사건>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강력범죄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던 2017년 무렵에 썼는데, 여성형 섹스 안드로이드나 안드로이드 사창가 같은 뻔하고 진부한 소재는 그만 쓰면 좋겠다는 이야기와 그에 대한 반박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그 소재로 다른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 일부러 썼다.
<아틀란티스 소녀>는 서정주의 시 <꽃밭의 독백–사소단장>을 다시 읽다가 수첩에 그림을 끄적거린 끝에 쓰게 된 소설이다. 소설도 쓰지만 만화 연출 작업도 하다 보니, “문 열어라 꽃아”하며 우주의 문 앞에 선 소녀를 떠올린 것이 소설로 이어졌다. 사소의 후계자가 아리영, 즉 신라의 알영인 것은, 삼국유사의 선도성모 설화에서 유래했다.
<탯줄의 유예>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면서, 이 어린이가 어린이집 친구들과 뭘 하고 노는지 궁금해하다가 쓰게 되었다. <언인스톨>은 《토피아 단편선: 텅 빈 거품》에 수록되었고 몇 군데가 수정되었다. 오랜 친구이자 신화 팬인 윤과 대화하다가 “신화창조 140기를 모집하는 미래”를 떠올리며 만들었다. <죽은 사람의 관 위에 열여섯 사람>은 어느 날 누크맵(https://nuclearsecrecy.com/nukemap/)이라는 사이트에서 수도권 지도를 띄워놓고 원폭의 위력과 범위들을 검색해보다가 쓰게 되었다.
<파촉, 삼만리>는 2019년 중국의 SF 잡지 <과환세계>와 중국 청두 국제 SF 콘퍼런스에서 주관한 ‘100년 후의 청두’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은 소설이다. 역사상 최초의 산업용 로봇을 만든 인물로 제갈량을 밀고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청두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청두만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디테일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청두, 혼자에게 다정한 봄빛의 거리에서》를 쓰신 번역가 이소정 님께서 도움을 주셨다. 한편 이 소설은 외국 공모전에 제출하기 위해 쓰려다 보니, 쓰는 과정에서 번역기가 이해하기 쉽게 문장을 다듬어서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글투가 다른 맛이 있다. 집에서 AI 스피커에 지시를 하거나 스마트폰 키보드로 글을 입력할 때 말투가 달라지는 것처럼, 구글 번역기 친화적인 글을 쓰고 있으려니,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연어를 이해하는 만큼 미래의 인류도 점점 더 기계가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입력하는 방법을 찾아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고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글을 쓰고 있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 2021년 늦가을, 전혜진
위대한 업적을 남겼던 과학자 마리 퀴리의 인생을 따라가 보면서, 여성으로서의 삶과 과학자로서의 삶이 겹치는 지점마다 고난이 있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한 마리 퀴리의 열정과 용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온전히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