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여덟 번 바뀌는 동안 나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은 적은 듯 많고 많은 듯 적다. 그 많고 적은 인연이 하나하나 튼실한 열매가 되어 나의 노후를 풍요롭게 한다.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다. 그들에게 편지를 쓰듯 나의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보았다. 자기의 전 생애를 글로 펼치는 것은 부끄럽고도 두려운 일이다. 아니 민망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런 글을 쓴 것은 나의 후손들에게 할머니가 살았던 시대, 그리고 할머니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사랑과 행복, 삶의 도전들, 성공과 실패들을 통해 그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내 제자들에게, 다음 세대의 여성학자들에게 조그만 위로와 격려라도 되면 좋겠다.
바람에 날아간 기억을 되살려 에피소드 하나라도 생각해 내면 기분이 좋았다. 이미 기억력의 한계도 있지만, 더 잊기 전에 이 정도라도 쓸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내 제자들에게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선배 스승님들에게서 지난 이야기를 많이 못 들어 아쉬웠던 나의 경험에 비추어, 나의 지나온 길을 글로 표현해 보긴 했으나 나의 뜻을 다 전달하진 못한 것 같다.
여자로서 평생을 사회생활 하면서 겪었던 일과, 여자이기 때문에 누렸던 복도 모두 알려주고 싶었다. 너무 태만하지 않고, 너무 욕심부리지 않고,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고 모든 것에 진심을 다하여 배우고 도전했던 나의 전 생애를 성찰해 본다. 그동안 나를 아껴주고 손을 잡아 주었던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80년 동안의 나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사랑’이 아닐까 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어를 사랑하며 살아온 일생이었다. 이 사랑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 배움과 도전이었다. 배움과 도전을 통해 사랑을 실현하고자 했다. 때론 소나기도 만나고 태풍도 맞고 뜨거운 햇살도, 하얀 눈도 맞으며 내가 정한 나의 길을 다 건너왔다.
지구촌 어디에 살든 한국인은 모두 우리의 관심 대상이고, 우리가 사랑으로 품어야 할 형제들이다. 비록 자기의 출생과 관련한 정보를 모르고 자라는 과정에서 아픈 과거를 가지기도 했지만, 건전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자랑스러운 우리 한민족이다. 특히 수십 년 만에 잃었던 가족을 찾게 되는 경우는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기쁨과 감동을 준다.
그들은 비록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살지 못하고 낯선 곳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아 지혜롭게 사는 사연들이 아름답다. 세계 도처에 한국의 뿌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문화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한국의 문화영토가 확장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중략) 운명적으로 나를 소설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사연이 생겼다. 30여 년의 친분이 있는 어느 북한 학자에게서 뜻하지 않은 부탁이 들어온 것이었다. 60년 전에 서울에서 헤어진 첫사랑을 찾는데,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 부탁이 그만 나의 소설 혼을 다시 깨우고 말았다. ·····(중략)·····
또한 이들을 갈라놓고, 만남을 가로막는 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차제에 ‘통일’이라는 지상 과제를 깊이 생각해보자고 부르짖고 싶었다. 정말 우리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후대에게 동강난 나라를 물려주는 죄를 진지하게 반성해부자고 소리 높여 외치고 싶었다. (후략)·····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결실의 계절
코스모스, 국화, 높고 파란 하늘, 노랗게 익은 벼이삭,
거기에 빨간 단풍이 화룡정점을 찍는다.
다정하고 고마운 가을 풍경들이다.
그 위에 소설책 한 권은 어떠한가
소설을 쓴 지 어언 1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간 4권의 장편소설과 두 권의 단편소설집을 냈다.
이것이 세 번째 단편소설집이다.
여기 실린 11편의 소설들은 모두 주제도 다르고 줄거리도 다르다.
우리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이번에도 탈북자와 해외입양인 얘기가 있다.
외면할 수도, 외면해서도 안되는 우리의 이웃이고 우리의 형제들이 아닌가.
이 글들은 어디엔가 한번 발표했던 글들이다.
여기에 실린 소설마다 죽음이 나온다.
인간의 힘으로 막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가족이, 내 이웃이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는다.
인간의 힘이 미치지 않을 때 우리는 보통 기도한다.
의지할 수 있는 신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다.
이 소설집에 기도하는 대목이 많은 이유다.
더러는 실화를 소설화한 것도 있고, 완전 허구적인 것도 있다.
각 작품의 등장인물들과 울고 웃은 시간들은 행복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평설을 써주신 우한용 작가와 신승민 평론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책을 예쁘게 꾸며준 출판사 도화에도 고마움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