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법이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먼저 본 도서 꼴찌 안칠수(응답하라 김영란 법)을 읽고 그 분들의 주장을 가다듬어 줄 것을 그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지금 한국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젊은 세대가 삼포 세대, 오포 세대가 되도록 방치하는 한국 사회는 과연 발전할 수 있는 사회인가.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배수의 진을 치고 투명성 지수를 높이기 위한 김영란 법을 보호하지 않는 국가 또한 미래의 희망을 상실한 젊은 세대를 위로하지 않는 국가가 후퇴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본 도서 꼴찌 안칠수(응답하라 김영란 법)가 시대를 올바르게 이끄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여 년 전에도, 또 수십 년 전에도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희생한 외국인 분들이 있었다. 그 분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조국도 아닌 조선이라는 나라를 위해 그토록 헌신을 했을까. 보통 사람으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승리하고 일본, 독일 등이 패배하여 한국이 1945년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역사는 결국 살아남은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등 연합국이 승리하고 일본, 독일 등이 패배한 것과 반대로 만약 과거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독일 등이 승리하고 미국 등 연합국이 패배하였다면 과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쯤은 한국에서는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받아들이면서 생활하게 되었을까. 역사에서 가정은 성립할 수 없지만 만약 과거의 승패가 바뀌었다면 일본, 독일 등의 잘못된 정책에 반대하며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 자신을 바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과 노력은 부도덕한 승자의 환호 속에 허무하게 물거품처럼 사라졌을 것인가. 그래서 만약 과거의 승패가 바뀌었다면 그와 같이 역사를 바로 세우려 했던 사람들의 피와 땀과 노력은 승자들의 기록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인가. 그와 같은 거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 조선과는 아무런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었음에도 외국인의 신분에서 강자인 일본에 맞서며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대변하기 위해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 개인적인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외국인 분들이 있었다.
그와 같이 자신들의 조국도 아닌 나라인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분들이 있었던 반면에, 조선에서 태어났고 조선을 조국으로 하는 조선인이었음에도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데 방관하거나, 또 오히려 그들에게 빌붙어 일본의 정책 실현에 발 벗고 나서며 이익을 취한 조선인들까지 있었고, 그리하여 최근 친일인명사전까지 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에도 조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외국인 분들의 정신은 실로 거룩한 것으로서 칭송할 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와 같은 외국인 분들 중에서도 특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희생하신 분들이 있었으니, 우리는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선생과 일본인 후세 다츠지 布施辰治, ふせ たつじ선생을 주목해야 한다. 베델 선생은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임에도 조선을 침략하는 일본에 맞서 조선인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신문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이후 신문을 통하여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글을 싣도록 하는 등 당시 외롭고 처량한 처지에 있었던 조선과 조선인을 위한 위대한 활동을 했다. 그는 조선의 독립과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운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기도 했다. 그리고 후세 다츠지 선생은 조선인 그리고 타이완인을 위해 투쟁한 일본의 인권변호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조선을 침략한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을 조국으로 하는 일본인이었음에도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변론을 시작으로, 1920년대에는 의열단 사건과 관련한 변호 및 일본의 조선 토지 수탈과 관련한 조사를 위해 조선을 방문하기까지 하였으며, 1946년에는 ‘조선건국 헌법초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베델 선생과 후세 다츠지 선생 외에도 수많은 외국인이 보잘것없던 조선을 위해 헌신했던 사실을 우리는 당시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 소설에서는 그 중에서 이 두 분만을 대상으로 했다.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인물들은 동서고금에 걸쳐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 조선을 조국으로 하는 조선인들 중 일부마저 일본에 협력하며, 자신의 조국인 조선을 배신하거나 또는 암담한 당시의 현실 앞에 체념하고 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이처럼 암울하고 힘겨운 상황에서 영국에서 태어난 영국인과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의 신분으로 당시 강대국이었던 일본의 야욕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던 조선과 조선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베델 선생과 후세 선생의 거룩한 정신은 시대를 초월하여 길이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힘없고 가난한 나라였던 조선을 위해서 아무런 대가나 명예도 바라지 않고 헌신을 해 주었음에도 우리는 그 동안 이 분들의 숭고한 헌신에 대해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역사 속에 묻혀 버린 베델 선생과 후세 다츠지 선생의 업적을 바탕으로 이 분들이 직접 몸으로 실천하였던 인류애의 위대한 정신, 나라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세계인권사상을 본 소설에서 부각시키려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후세 사람들에게 베델 선생과 후세 다츠지 선생의 위대한 희생정신을 알리고 그러한 정신을 계승하고 전파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동기에서 본 소설이 구상되고 집필되었다. 이 분들의 고귀한 정신은 한국은 물론 일본, 영국, 타이완, 더 나아가 전 세계에 걸쳐 연구되고 널리 알려져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과거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한 세계대전의 발생,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중국과 조선 등에 대한 침략 등이 있을 때 독일 국민, 일본 국민으로서 독일과 일본의 잘못된 행동을 바로잡고자 한 인물들은 거의 없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자신의 조국이 가고 있는데도 대다수가 이런저런 이유로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자신의 조국이 가고 있는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지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험난한 고생을 감수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조국도 아닌 다른 나라와 다른 나라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한다는 것은 그 이상으로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영국인인 베델 선생은 1900년대 초반 무렵 조선인의 인권 보호를 위해 조선인들의 뜻을 대변하는 신문을 발행하는 데 관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희생했다. 또 일본인인 후세 선생은 조선과 타이완 등이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 일본의 서슬 퍼런 폭압을 뚫고 공개적으로 반기를 드는 행동을 서슴없이 보여 주었다. 후세 선생 자신에게 피해가 올 것을 감수하면서 조선과 조선인 또는 타이완과 타이완인을 위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이자, 조국인 일본을 배신하는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당시 상황이었다. 심지어 그러한 행동은 일종의 객기에 지나지 않는 행동으로까지 비칠 수 있었던 당시 상황이었다. 그러함에도 후세 선생은 자신의 조국인 일본이 가는 길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면서 일본에 의해 희생되는 국가와 국민들을 돕는 데 헌신하는 용기를 몸소 보여 준 것이다.
지금까지 일본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되어 희생된 분들에 대한 구체적인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때 강제 동원된 분들의 대부분이 고령화 등으로 이미 사망하였고, 또한 아직 생존하여 있는 나머지 분들마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현재 상황에서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은 강제 동원으로 인한 희생자 분들에게는 물론 후세 선생과 같이 일본의 양심을 지키려고 한 분들에게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위와 같이 베델 선생과 후세 선생의 위대한 행동이 과거 활동 당시는 물론 현재까지도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안타깝게 묻혀 버린 그 분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수십 년 또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고, 그러한 정신의 가치가 계승되어야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베델 선생과 후세 선생의 의로우면서도 쓸쓸하고 외로웠던 행동은 그야말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한 위대한 정신의 진정한 가치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봄의 따스한 기운이 한겨울의 추위를 녹이듯 자연스럽게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베델 선생과 후세 선생의 거룩한 정신은 단지 한국, 타이완, 일본, 영국이라는 한정된 국가와 일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에 퍼뜨려야 할 위대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베델 선생과 후세 선생의 역사와 시간 그리고 공간을 초월한 시대정신은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숭고한 인류애라고 모든 사람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역사에서 과거와 같은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 주는 일종의 소독제 또는 방부제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약 10여 년 전 이수현 씨라는 한국 청년이 일본의 어느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과 일본의 과거 역사를 둘러싼 긴장관계 속에서도 한국인이 일본에서 일본인의 목숨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이 사건은 한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필자는 이수현 씨의 거룩한 희생정신을 다룬 소식을 접한 후, 일본인을 위한 그의 숭고한 정신이 과거 조선을 위한 영국인 베델 선생, 일본인 후세 선생의 희생정신과 그 근본과 뿌리에 있어서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꼈다. 세월의 차이만 있을 뿐 국가와 민족을 초월한 이들의 희생정신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또한, 최근 몇 년 전 이태석이라는 한국인 가톨릭 사제가 스스로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진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서 그곳 사람들을 돕는 데 일생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안타까움을 더했다. 이태석 신부의 깊은 신앙심에 의한 희생정신 또한 베델 선생, 후세 선생, 이수현 씨의 인류애 정신과 그 근본과 뿌리에 있어서 서로 통하는 것임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처럼 뜻은 좋지만 현실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분들의 고귀한 정신은 그 어떤 금력과 권력의 힘보다 더 강력한 역사적 울림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고귀한 정신이 강력한 역사적 울림으로 현실에 반영될 수 있도록 할 의무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어깨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분들의 뜻대로 현실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 잘못된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힘에 의해 현실이 왜곡되고 있는 씁쓸한 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희생정신을 발휘한 분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분들이 활동하였던 과거나 그 때로부터 수십 년 또는 백여 년이 지난 현재나 거의 동일하게 금력과 권력의 힘에 의해 현실이 좌지우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역사정신에 어긋나는 현실을 바로잡고, 현실은 의례 올바른 것보다는 힘세고 강한 것이 결국 지배한다는 체념과 패배주의를 이겨 내어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한 분들의 뜻이 시간이 오래 흘러도 결국 현실에서도 실현될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 주는 것이 역사정신을 바로 세우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시대를 초월해 절망의 역사를 바로 세우려 했던 위대한 인물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이 승화되어 과거의 아픈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고, 지금보다는 역사가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며, 본 소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본 소설은 앞서 밝힌 실존 인물들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공개된 업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렇지만 본 소설은 실존 인물들의 일대기가 아닌, 이들의 공개된 위대한 업적 중 일부분을 모티브로 삼아 등장인물 및 줄거리 등을 순수하게 창작한 것임을 밝혀 둔다.
소설에서 실존 인물들을 모티브로 삼아 허구의 인물들을 만들어 낸 이유는 독자 한분 한분의 가슴 깊숙이 더욱 강력한 역사적 울림을 주어, 본 소설의 취지가 더 생동감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본 소설의 제목 ‘달걀이 걸어간다.’는 이 책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아프리카의 속담과 관련된 것이다.
본 소설의 모티브가 된 분들이 꿈꾸었던 대로 국가, 민족, 인종의 차별 없이 온 인류가 서로를 존중하는 평화스러운 세계가 되고,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기여를 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본 소설을 그 분들에게 바친다. 그리고 그 분들이 실천하였던 거룩한 희생정신이 강력한 역사적 울림으로 되살아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됨으로써 그 분들의 영혼에 부족하나마 위로가 되기를 기원한다.
동해 바다에 빠지고 있는 MV 번성호에 타고 있는 수백명의 선원과 승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외면하는 세태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눈을 감는 현실을 파헤쳐 본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말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탄 MV 번성호가 바다에 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탑승객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음에도 사회적 강자가 주는 먹잇감을 찾아 사회적 강자의 눈치를 살피는 충실한 사냥개같은 언론의 현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의 위기에 처한 탑승객들을 태운 번성호 밖에서 펼쳐지는 인간들의 요지경 같은 자화상 그것은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기울어지고 뒤집힌 MV 번성호는 외면하고 싶은 냉정한 약육강식의 현실, 원자력 발전소 부품까지 바꿔치기하는 현실을 어떻게 뒤집게 될 것인가?
사람의 가치보다 물질과 돈을 더 중시하는 사회에 있어서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1910년 3월 26일 불법적인 사형 판결의 집행을 받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이국의 낯설고 차디찬 땅에 묻힌 그 분이 돌아 왔다. 그 날의 수모와 치욕을 뒤로 하고 환하게 빛나는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그 분이 돌아 왔다.
그 분은 자신의 조국 한국이 통일 국가로 발전을 거듭하여 통일 한국의 국력이 일본의 국력을 월등히 능가해서 일본이 한국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볼 것을 확신하면서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 교수대에서 사형 판결을 집행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한반도를 일, 이 백년도 못 갈 특정 이념과 사상의 대립이라는 실험을 위한 거대한 실험공장으로 만들고 한국 민족을 그 특정 이념과 사상의 대립 실험을 위한 실험쥐로 만들고 훈련시키는 가운데 분단 상태를 악용하는 일부 세력 그리고 아직도 건재한 친일 세력이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그 분이 다른 세상에서 보고 있으시려니 그 분이 1909년 ‘대한독립(大韓獨立)’이라고 흘리는 피로 글씨를 쓰기 위해 손가락 마디를 자른 왼손의 손가락 끝 부분이 더욱 저려오며 그 분은 견줄 수 없는 깊은 아픔을 지금 다른 세상에서 느끼고 계실 것이다.
분단을 성공적으로 극복한 통일 한국이 되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며 통일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일본이 통일 한국에 머리를 조아리고 통일 한국의 눈치를 보며 감히 통일 한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못하고, 통일 한국이 주변 국가들을 압도하며 동양평화, 세계평화를 위한 번영된 국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내려 보시면서 뤼순 감옥에서 사형 판결이 집행되던 1910년 3월 26일 가슴속 깊이 간직했던 그 분의 천추의 한이 풀리는 날은 그렇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단을 악용하는 세력과 친일 세력이 조국의 분단 상태를 악용하며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분단된 조국의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을 내려 보시면서 1910년 3월 26일 사형 판결 집행 당시 교수대에서 그 분의 목을 조여 오던 그 동그란 줄이 주는 아픔보다 더 심한 아픔을 다른 세상에서 느끼고 계실 그 분에게 이 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