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작업을 시작할 때의 생각은 소설 창작의 여러 조건 때문에 소설 속에 온전하게 편입되지 못하고 그림자로 남거나 혹은 소설로 만들어지면서 전형성의 문제에 걸려 아예 삭제되고 마는 인물들을 짧게나마 되살린다는 의도였다.
개인 하나하나가 간직한 암호들을 해독해 가는 과정이야말로 우주탐험의 여정에 다름 아님을 작가인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본의 아니게 이 책에 등장한, 잘못이라면 삶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우연히 나라는 인간을 만난 죄밖에 없는 모든 이들에게 먼저 나의 애정을 바친다.
아무리 뒤적여 봐도, 그것 외에 내가 내밀 수 있는 또 다른 변명이 찾아지지 않는다.
영혼을 찍는 카메라가 있다면, 짓눌리고 억압받는 정신을 촬영하고 인화할 수 있는 과학이 있다면, 렌즈를 들이대고 분명히 찍어두어야 할 여성의 깊은 상흔은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디에서 어디까지를 찍어야 상처의 증거가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은 교묘하고 복합적이다.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일상적으로 이해되고, 그리하여 일상의 하나로 무심히 잊히는 사회는 진정 옳지 않다.
그래서 강민주가 등장했다. 낮은 포복을 혐오하고 높이 기립해서 사는 여자, 물살을 거스르며 하류에서 강의 상류로 나아가는 여자. 그런 주인공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없지만, 소설에서는, 소설이므로, 강민주 정도는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性)의 대결이나 성의 우월을 가리기 위해 이 소설이 쓰인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책을 읽고 난 후에 무언가 교훈이 될 것을 찾아 내려고 애쓴다거나, 우리가 알아야 할 주제가 무엇인지 따져 봐야 하는 그런 골치 아픈 책읽기 방법으로 누리의 이야기를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누리를 만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끔씩 '내가 누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하고 생각할 시간만 잠시 가지면 됩니다. 아홉 살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까지 집을 나가 행방 불명이 되어 버렸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누리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을 생각해 보면 스펀지에 물이 스미듯이 여러분은 누리의 이야기에 빠져들 것입니다.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수많은 친구들에게 “슬픔도 힘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슬픈 일이 많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살았던 ‘누리’의 이야기를 더불어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핏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괴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아주 많이 섞여 있답니다. 그것이 현실이지요.
저는 여러분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행복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행복 뒤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함께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한 사람들한테는 조금만, 아주 조금만 사랑을 나누어 주어도 굉장히 큰 힘이 된다는 사실도 생각해 주기를 원합니다. 저의 부탁은 단지 그것뿐입니다.
머릿속 몇 가지 이미지들만 가지고 일단 소설을 시작했다. 이는 단편을 쓸 때 내가 고수하는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우연처럼 던져진 하나의 문장이 다음 문장을 결정하고, 두 번째 문장이 결정한 내용을 세 번째 문장이 재해석하면서 소설의 분위기를 확정짓는 내 식의 글쓰기는 다분히 소설의 내재적 흐름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나는 무의식 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문장을 무턱대고 빈 공간에 그냥 '던져버린다'. 그 다음부터의 글쓰기는 이미 던져진 것을 성공적으로 의미화시키기 위한 처절한 악전고투에 다름아니다.
작가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서 종종 전화나 편지를 받습니다. 어느 날, 아주 두툼한 편지 한 통이 제 앞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묵직한 그 편지의 겉봉을 유심히 살펴보니 봉투의 제 이름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다 읽어 주세요. 부탁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산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만 쓰여 있을 뿐...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서울에 살았을 때 만났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작가 선생님한테 이런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길고 긴 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 저는 우선 눈가에 고인 눈물부터 닦았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누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난 후에는 온통 누리 생각만 가득해서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세상에 누리 같은 소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행복하기도 하고요.
작가들은 알지 못하는 사람들한테서 종종 전화나 편지를 받습니다. 어느 날, 아주 두툼한 편지 한 통이 제 앞으로 배달되어 왔습니다. 묵직한 그 편지의 겉봉을 유심히 살펴보니 봉투의 제 이름 밑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끝까지 다 읽어 주세요. 부탁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끝까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부산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라고만 쓰여 있을 뿐... 그 아주머니는 자신이 서울에 살았을 때 만났던 한 소녀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작가 선생님한테 이런 편지를 쓴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길고 긴 편지를 다 읽고 난 후에 저는 우선 눈가에 고인 눈물부터 닦았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곧바로 누리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난 후에는 온통 누리 생각만 가득해서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 세상에 누리 같은 소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이 행복을 여러분에게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행복하기도 하고요.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연탄이 보급되기 전, 첫새벽 어머니의 부엌에서는 타다닥, 아궁이 속의 장작불 타들어가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자다가 문득 그 소리에 잠을 깨기도 했다. 가만히 부엌을 들여다보면 하얀 머릿수건을 쓴 어머니가 아궁이 앞에 앉아 풀무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씩 저 안쪽의 장작이 잘 타고 있는지 살피느라 어머니는 거의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굽히곤 했다. 그럴 때 어머니의 흰 머릿수건 위로 티처럼 분분히 피어오르던 주홍의 불씨들을 기억한다. 어머니는 불의 신 같았다.
방방에서 자식들이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신새벽, 어머니는 아궁이의 불씨를 일구며 가만가만 찬송가를 부르기도 했다. 하얀 행주로 부뚜막을 닦으면서도 찬송가는 계속되었다. 자식들 밥그릇마다 밥을 퍼 담으면서는 짧고도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다. 나직나직 들려오는 어머니의 찬송가 곡조와 기도 소리를 들으며 다시 새벽 단잠에 빠져들 때, 그럴 때 어린 나는 참 행복했다. 어머니가 있어서, 어머니가 저렇게 부엌을 지키고 있어서, 이 세상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어머니는 내게 부엌신이었다.
질주하는 시간에 얹혀, 그 속도감이 놓치고 있는 징후들을 담아내고자 애썼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한 편 한 편 세밀하게 읽어보니, 상처와 고통과 애정이 한 몸이었던 그 시기가 마치 순정한 꿈인 양 여겨진다. 무엇에 홀린 것 같은, 개인과 집단이 함께 꾸었던, 그러나 이미 눈을 떠버린, 하지만 다시 꾸어야 할 그런 꿈.
그렇기에 나에겐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이 하나같이 소중하다. 이 소설들이 없었다면 도대체 무슨 말로 나의 그 시간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인가. 어떤 비난이나 엄벌보다 내가 나에게 가하는 질책 이상으로 괴로운 것은 없다.
<원미동 사람들>이 네 번째 옷을 갈아입는다.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어 외양은 다 바꾸었지만
내용은 온전히 그대로 두었다.
수많은 독후감이 전하는 대로,
우리 앞에 무엇이 닥쳐올지 예감할 수 없는
‘원미동’으로 상징되는 헐벗은 일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서다.
어쩌면 더욱 가혹해졌다고도 여겨진다.
개정판을 내면서 첨삭이나 수정을 가하지 않은 이유다.
이미 오래된 증상이지만, 소설을 생각하면 나는 늘 무언가 갑갑했다. 벗어나고 싶었다. 머리를 옥죄고 있는 틀 하나만 벗겨내면 훨씬 다르게 소설을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리하여 이 갑갑함에서 빠져나갈 수도 있으리라 생각하곤 했다. 이 소설은 글쓰기로 세상을 살아가는 자 하나가 제 손으로 평생 지니고 살던 머릿속 무거운 틀 하나를 벗겨낸 흔적이다.
그랬더니 참, 숨쉬기가 많이 편해졌다.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도 나처럼 숨쉬기가 편해졌으면 좋겠다. 갇혀있는 사람들, 한계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한테 혹시 산소를 공급하는 구멍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말한다면 변명으로 들릴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변명도 알고 보면 모두 진실인 것을.
소설 하나를 두고 네 번째 작가의 말을 적는다.
앞에 놓인 작가의 말들을, 나는 남이 쓴 글처럼 읽는다. 그랬구나, 하다가 세 번째에 이르러서는 얼굴이 좀 뜨거워진다. 저런 ‘고백’을 아무렇지도 않게 책에 쓰다니, 지금의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다행인 것은 이 소설에 가진 애정만큼은 아직 그대로라는 점이다. 교정을 위해 정말 오랜만에 소설을 다시 읽으며 그 사실을 확인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나 정신이 첫 장편의 시간에서 멀어지지 않은 것도 안심이 된다.
시대의 배경은 바뀌어도 삶은 남는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품은 ‘희망’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성여관’에 살았던 그들의 근황이 궁금하다. 특히 우연이는,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가끔 생각난다. 그저 건재하기만을 바란다. - 개정판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