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늦게 시작했다, 시와 관련한 것은.
좋아해서 그렇다. 이 이유밖에 없다.
한동안 물에 빠져 있었다. 장자 때문인 것 같다. 또 한동안은 침묵에 빠져 있었다. 말의 불일치성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사람에 빠져 있었다. 지금도 사람에 빠져 있긴 하다. 뭐든 열렬하다가 어느 순간 발을 빼고 있다.
나는 기우뚱,한 순간을 좋아한다. 무엇이 열리거나 바뀌는 기운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면 기우뚱, 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제껏 기우뚱거리기만 한 것도 같다. 이 첫 시집은 아무리 봐도 기우뚱하다. 늦도록 했으면서도 바로 세우지 못했으니, 뭐가 많이 없는 탓이다.
작년에 반세기 산 것을 자축했다. 성산대교, 삼풍백화점, 물폭탄을 피해 용케도 살아 있다. 최루탄, 곤봉, 고문, 시위 현장에서도 잘 살아남았다. 내가 겪은 일들이 이제는 신화처럼 까마득하다. 그런 표정들이다.
왜 혼자 여행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잠깐 얼음이 된다. 너무 정곡을 찌르는 것 같아서 움찔한다. 그것은 마치 ‘너의 인간관계가 어찌 그 모양이냐’고 묻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답을 하자면 외롭고 두렵기 때문에 혼자 여행한다. 혼자 여행하게 되면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자기물음’이다. 물음 끝에 답을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진리를 외로워야 깨닫게 된다. 철저하게 외롭고 나면 누군가와 관계 맺기에 진심일 수 있다. 또 어떤 형태이든 ‘이룸’은 두려움의 강 건너편에 있다. 여행은 두려움을 안고 그 강에 발을 적시는 일부터 시작이다.
나의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그곳에 머무름이다. 스쳐 지나가면서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들의 삶의 속살을 보는 방법은 발걸음을 멈추고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나를 확장 시키는 경험이 된다.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을 지내보고 싶은 것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의 첫 번째 항목이었다. 치앙마이에 있는 동안 한국은 연일 수은주의 눈금을 갱신했고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얌체처럼 스스로에게 오길 잘했다고 칭찬을 했다. 두 번째는 멋지고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인 장면들을 돌아보고 오는 관광놀이에서 벗어나서 한번쯤 낯선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치앙마이에서 살기는 내 삶의 반경을 넘어서는 시도였다. 내 몸속에는 정착 욕구와 유목 DNA가 적당히 믹스되어 있는 것 같다. ‘너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겁 많은 개구리야’ 했던 친구 말이 맞다. 늘 호기심어린 눈을 뜨고 있지만 겁이 많아서 잔뜩 움츠렸다가 펄쩍 뛴 곳이 치앙마이다.
치앙마이살기를 하면서 염려와 근심이 얼마나 몸과 마음을 상하게 했던 것인지 새삼 깨달았다. 문제로부터 떨어져서 보면 문제는 당면해 있을 때보다 훨씬 심각하지 않음을 알게 됐다.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니 돌덩이처럼 가슴을 짓누르고 있던 문제가 가벼워졌다. 여행은 굳어진 것들을 깨는 짜릿한 통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