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을 하면서 지나치리만치 많은 쉼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제의 문제,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등등,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를 번역한 적이 있는 모든 번역가들이 겪었을 난해한 문체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물론 그 판단 기준이 된 것은 내가 가진 지식과 동료들의 조언이었다.
좋은 번역이란 외국어와 한국어 실력, 해당분야 지식의 세 박자가 다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세 박자가 다 맞아떨어지기에는 내가 아직 모자란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일본어와 한국어 실력이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나이에, 지금 내 수준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번역이 바로 이번 다자이 오사무 전집 번역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사양>, 옮긴이 후기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자 소설 각 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빛이 있는 곳에 있어줘’라는 대사는 둘이 멀어질 수밖에, 혹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상황의 정경과 그 마음을 상징한다. 구름 틈새로 비쳐 나온 햇살에 작게 생겨난 양지, 비 내리는 밤의 어둠 속 가로등 불빛 아래, 그리고 빛나는 바다와 하늘 아래 빛나는 자동차까지. 인생의 세 시기, 두 주인공 모두 녹록지 않은 위기 상황을 맞으며 그 대사의 정경은 점차 변해가지만 ‘따뜻한 곳, 안심할 수 있는 곳, 희망이 있는 곳’이라는 의미와 서로가 그런 곳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그 정경과 두 인물의 마음속 변화는 작가의 연출 아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일본에서 ‘다자이를 읽자’는 붐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도, 그의 소설이 온전한 자아로 살아가기 힘든 지금 세상에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전집이 허구화된 ‘나’의 수많은 모습들과 그 간격을 즐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일본에서 ‘다자이를 읽자’는 붐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도, 그의 소설이 온전한 자아로 살아가기 힘든 지금 세상에서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다자이 전집이 허구화된 ‘나’의 수많은 모습들과 그 간격을 즐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번역을 하면서 지나치리만치 많은 쉼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제의 문제,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등등,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를 번역한 적이 있는 모든 번역가들이 겪었을 난해한 문체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물론 그 판단 기준이 된 것은 내가 가진 지식과 동료들의 조언이었다.
좋은 번역이란 외국어와 한국어 실력, 해당분야 지식의 세 박자가 다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세 박자가 다 맞아 떨어지기에는 내가 아직 모자라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일본어와 한국어 실력이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나이에, 지금 내 수준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번역이 바로 이번 다자이 오사무 전집 번역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번역을 하면서 지나치리만치 많은 쉼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제의 문제,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등등, 아마도 다자이 오사무를 번역한 적이 있는 모든 번역가들이 겪었을 난해한 문체를 마주하며,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다. 물론 그 판단 기준이 된 것은 내가 가진 지식과 동료들의 조언이었다.
좋은 번역이란 외국어와 한국어 실력, 해당분야 지식의 세 박자가 다 맞아 떨어져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세 박자가 다 맞아 떨어지기에는 내가 아직 모자라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일본어와 한국어 실력이 이미 어느 정도 굳어진 나이에, 지금 내 수준에서 가장 잘 할 수 있는 번역이 바로 이번 다자이 오사무 전집 번역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교환양식D는 단순한 공상이 아닌 필연적인 것이며, 자본=네이션=국가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세계동시혁명’을 통하여 D를 기초로 한 ‘세계공화국’과 같은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이론 및 실천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향후 가라타니의 중심적인 작업이 되리라는 것을, <자연과 인간> 및 이 책을 읽은 독자들은 쉬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사의 구조>는 가라타니 사유의 끝이 아닌 시작점이며, 그와 동시에 우리에게 많은 과제를 안겨주는 책이기도 하다. -<옮긴이 후기>에서
어떻게 보면 그가 깨달았다는 ‘어설픈 쓰가루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 기반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어설픈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위 문장에서 다자이는 통상적으로 긍정적인 뉘앙스로 쓰는 ‘문화’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반전시키고, 그에 반해 어설프고 졸렬하며 서투르기도 한 쓰가루의 모습에 긍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말하고 있다. 더불어, 어설프고 졸렬하며 서투른 자신의 모습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쓰가루」뿐만 아니라 다른 다자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열쇠라 볼 수 있다. ‘배신당한 청년’이자 ‘고향을 빼앗긴’ 소설가의 고독은 위와 같은 가치 기준에서 긍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부정에의 긍정’이 있었기에 다자이는 독자를 향해, ‘살아 있다면 다음에 또 만나자. 씩씩하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 그럼, 이만 실례.’라는 씩씩한 인사말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정에의 긍정’은 오로지 소설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 희망찬 인사의 근저에는 그의 고독감과 절망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어떻게 보면 그가 깨달았다는 ‘어설픈 쓰가루의 모습’은 자신의 존재 기반을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어설픈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위 문장에서 다자이는 통상적으로 긍정적인 뉘앙스로 쓰는 ‘문화’라는 말을 부정적인 뉘앙스로 반전시키고, 그에 반해 어설프고 졸렬하며 서투르기도 한 쓰가루의 모습에 긍정적인 뉘앙스를 담아 말하고 있다. 더불어, 어설프고 졸렬하며 서투른 자신의 모습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쓰가루?뿐만 아니라 다른 다자이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열쇠라 볼 수 있다. ‘배신당한 청년’이자 ‘고향을 빼앗긴’ 소설가의 고독은 위와 같은 가치 기준에서 긍정적인 것이 된다. 그러한 ‘부정에의 긍정’이 있었기에 다자이는 독자를 향해, ‘살아 있다면 다음에 또 만나자. 씩씩하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 그럼, 이만 실례.’라는 씩씩한 인사말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부정에의 긍정’은 오로지 소설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으니, 그 희망찬 인사의 근저에는 그의 고독감과 절망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일본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독특한 작풍의 소설가인 마이조 오타로의 《쓰쿠모주쿠》는 사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평범한 사람보다는 원래 소설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소설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하나의 특정한 세계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떤 세계든 모두 끌어안을 수 있는 ‘이야기’라는 거대한 우주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 우주의 존재를 모른다면, 어쩌면 이 작품은 단순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자를 포함한 우리에게, 이 세상에 그냥 단순한 말장난이라는 게 있을까? 어떤 말이든, 그것은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인생이자 세계이다. 심지어 마이조 오타로는 마치 거대한 진공청소기처럼, 다른 이야기나 캐릭터들, 심지어 자신이 쓴 전작의 등장인물과 내용들까지 온갖 ‘말’을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 소설가로서의 자기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설가이니, 그에게 말이란 곧 세계이다. 그런 세계관을 지닌 그는 이야기와 더불어 그런 이야기를 쓰는 자신의 태도를 언급하는, 한마디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그런 면에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소위 ‘초(超)메타소설’인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작풍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다자이가, 다채로운 작품을 집필하며 안정기로 접어들더니, 소설 본문 중에 ‘독자’라는 말을 자주 쓸 만큼 독자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작가가 되었다. 5권을 번역하면서, 나는 이야기꾼 다자이가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얘기를 받아 적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가만히 서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다자이가, 다채로운 작품을 집필하며 안정기로 접어들더니, 소설 본문 중에 ‘독자’라는 말을 자주 쓸 만큼 독자에게 말을 걸며 다가오는 작가가 되었다. 5권을 번역하면서, 나는 이야기꾼 다자이가 현란한 말솜씨를 뽐내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의 얘기를 받아 적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