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다른 세 권의 책들과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음악은 물론이고 문학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굳이 감출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꼭 15년 전에 메이너드 솔로몬의 <베토벤>을 편역했던 것과 같은 이유에서다. 언뜻 보기에도 2012년은 1997년을 반복하는 것 같다. 그때가 남한자본주의의 위기의 전야라면, 지금은 미국자본주의를 비롯한 세계자본주의의 위기의 전야다. 또 그때나 지금이나 어김없이 대선이라는 부르주아 정치 일정이 정세를 지배하고 있다. 1997년의 비극이 2012년의 희극으로 반복될지 아닐지는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만년의 마르크스는 ‘정신적 평온’을 위해 미적분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해서 마르크스를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베토벤의 음악에서도 평정심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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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목적은 문학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정리해보는 데 있다. 또 현대에는 문학이 예술을 대표하기 때문에 예술에 대한 관점을 정리해보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베토벤>을 편역하면서 문학과 음악의 관계라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이 문제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는 셈이다.
먼저 문학을 인문학이 아니라 예술로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둘 필요가 있다. 특히 19세기에 출현한 문학의 예술적 헤게모니를 비판하기 위해서도 그럴 필요가 있는데, 사실 감정의 표현이나 치료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문학은 음악에 비해 열등한 예술형식이기 때문이다.
현대적 의미에서 문학의 기원은 동양이 아니라 서양에서 발견된다. 그것이 바로 소포클레스가 대표하는 그리스의 비극시다. 그 후에도 비극시를 부활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되는데, 셰익스피어와 괴테가 그 대표자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가 실패하면서 19세기에 소설이 비극시를 대체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소설을 비롯한 문학의 기능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데 있다. 모든 문학이 그렇다는 것은 물론 아닌데, ‘이데올로기적 형식’으로서 문학을 비판하는 문학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튀세르가 강조하는 것처럼, 브레히트의 ‘비판적 연극’이 그런 사례를 대표한다.
다만 문학에 의한 문학의 비판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음악, 특히 베토벤의 음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서양문학에서 ‘영원한 매력’을 제공하는 ‘달성불가능한 표준’은 그리스의 비극시인데, 괴테의 <파우스트>와 달리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은 그런 표준을 달성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물론 베토벤의 음악 그 자체는 문학 비판이라는 문제와 무관하다. 현정세의 특징은 경제적 모순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적 반역이 출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대신 멜로드라마가 보편화되는 상황에서 평정심을 찾기 위해서라도 베토벤의 음악이 필요한데, 그리스의 비극시처럼 감정치료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0월
생각컨대,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고’(十有五而志于學), ‘서른 살에 자신의 입장을 세우고’(三十而立), ‘마흔 살에 미혹됨이 없고’(四十而不惑), ‘쉰 살에 세상에서 할 일을 찾는다’(五十而知天命)는 <논어>의 말씀대로 살아온 것 같다. 5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면서 ‘예순 살에는 누가 뭐라 해도 내 길을 간다’(六十而耳順)는 말씀을 되새긴다. ‘할 수 없음을 이미 알면서도 해보겠다’(君子之仕行其義也, 道之不行已知之矣)는 뜻이다.
201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