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첨단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라고 해도 시가 갖는 본연의 문학적 정체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시는 여전히 인간의 심연에 깃든 정신과 정서를 가장 순도 높은 언어로 형상화하는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생 장르인 영화가 발달한다고 하여, 드라마가 인기 있다고 하여, 시가 시대적합성이나 자기정체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벚나무가 당장 화려하다고 그 주변의 장미 넝쿨을 모두 잘라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다른 문화종이나 예술종이 일시적으로 유행한다고 하여 시의 유용성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시는 오늘날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예술보다도 인간 영혼의 가장 깊고 높은 곳까지 다가갈 수 있는 최고(最高/最古)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시는 또한 인간의 가장 민감한 감각과 직관, 상상을 통해 진리의 세계를 현현해 주는 대표적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소설이든 영화이든 많은 사람들에게 무한 감동을 전해 주는 작품에 대개 시적 서정이나 감각이 무르녹아 있지 않은가? 이것은 분명 시가 모든 예술의 근간이 되는 기초적, 메타적 특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문학사 기술이라는 것이 원래 선택과 집중의 원리에 의한 것이긴 해도, 이 책이 과연 작품이나 작가의 평가에서 전적으로 공정했는가 하는 의문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여 그 의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의 기준이 중요할 터인데,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문학이 갖는 시대적·역사적 의미와 문예 미학적 완성도였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이들 두 가지 기준을 균형감 있게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미주시는 국내나 다른 지역의 시문학이 갖지 못한 특이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미주의 한인들이 그곳의 지리적·문화적 환경 속에서 경험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내의 시문학이나 국외의 다른 지역 시문학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형식상·내용상의 특수성을 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특수성에 초점을 두고 기술했다.
모두 여섯 개의 장과 두 개의 보론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각의 장이 독립성을 띠고 있으면서 책 전체의 구성에 참여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리와 일관성을 위해 새로운 글들을 중심으로 하면서 이미 발표한 글들도 일부 포함했다. 부분적으로는 기존의 글을 일부 발췌하여 재편성한 곳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각 장이나 각 절의 내용은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고 함께 읽어도 무방하다. 독자 여러분들이 관심에 따라서 자유롭게 읽으면 된다는 말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내용이 있다면 미주 시인들의 덕분이고, 아쉬운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탓이다. 특히 이 책의 부제에 드러나듯이, 1999년 이전의 작품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당대(當代)의 문학을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는지 고민이 있었고, 주어진 집필 기간도 길지 않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밝혀둔다. 이를 조금이나마 상쇄하기 위해 보론에 실린 두 편의 글은 2000년 이후에 발표된 작품들을 다루었다. - 책머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