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울고 싶지만 신은 내게 쓰라고 명하네.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고백도 곧잘 웅얼거렸다. 글씨를 쓰는 일보다 더 많이 한 것은 스스로를 용서한 일이다. 욕망에 시달리는 내가 보이고 책임을 회피하는 내가 보였다. 자판에서 손을 떼는 시간이 길어지고 이상하게 숙연해졌다. 퇴고를 할 때는 한 손으로 염주를 굴렸다.
― 왜 몰랐을까? 관계가 상처를 먹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몇 해 전, 쿰부 히말라야의 대폭설 기간에 나는 그곳을 걸었다. 산을 둥글게 감고 이어진 그 나선의 길은 실상 바람과 눈보라의 길이었다. 걷는 중에 수평의 도시인 시드니와 수직의 공간인 서울이 떠올랐다. 지나온 길과 지나갈 길이 서로 맞닿으며 비틀거리는 그곳에서 두 장소의 기억은 중첩되거나 엇갈리고 분산되거나 일그러지며 내 안으로 말려들었다.
― 두 손이 모아지는 지점에 바로 가슴이 있다는 것.
장편의 아우트라인은 부악문원에서, 머리는 토지문화관에서, 몸통은 미국 아이오와 레지던시에서, 정신적 환기는 중국의 서안과 하문에서, 꼬리는 군포 중앙도서관 창작실에서 이루어졌다. 활력을 불어넣어준 한국문학번역원에 감사하고, 퇴고 공간 마련을 도와준 상연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심진경 평론가는 글의 부족한 점을 짚어주었고 박상우 선배는 때로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매화를 선물로 주신 구본창 사진작가와 제목의 영감을 주신 김수복 시인 앞에 두 손을 모은다.
최근에 나는 개인적이고 담담하며 사색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글쓰기를 지향했다. 느리지만 둔중하고, 둔중하지만 멀리 퍼지는 종소리를 닮은 독백. 이는 일면 평평하고 유순하여 어쩌면 유희적이고 자극적인 환호성에 묻히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의 연약함과 쓸쓸함에 흔들리는 단독자의 진술에 귀를 기울이는 독자 또한 실재하리라 믿는다. 저기 누군가 한 사람이 길을 떠나고 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여덟 편의 글은 모두 국외체류기간에 발표되었다. 스물넷 혈기방장하던 시절에 쓴 소설부터 서른둘의 심사숙고로 만든 작품까지 내 인생의 술잔이 반이나 채워져 있다. 이 반 잔의 술로 님을 취하게 할 수 있을까. 독하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때가 되면 님을 혼몽시키는 독한 술이 되고 싶다.
작가로 살아온 지 스무 해가 되었다. 한마디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꿈에서는 그리 서럽지 않아도 서럽게 울고 그리 대단찮은 일에도 대단한 듯 웃기 마련이다. 두려움도 견딜 만하고 배고픔도 견딜 만하다. 무엇보다 어떤 배역과 역할을 맡아도 억울하지 않고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확실한 한 가지는 스무 해 동안 멀리 도망치지 않고 이곳에서 지냈다는 점이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이해와 격려를 아끼지 않은 분들 덕분이다. 나의 길은 탑에 있지 않다. 나의 길은 사람들 사이로 뻗어 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이 나의 꽃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