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다시 펼쳐보기까지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사소한 기록들이다.
가끔 몸속 어딘가에서 종소리가 났다.
먼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올 때, 한밤의 도로 위에서 혼자일 때, 어두운 전나무 숲길로 걸어 들어가던 때,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고 사라진 꿈들을 쫓을 때,
종이 울었다.
변한 것은 없다.
오늘도 종이 우는 소리를 종이 위에 옮기는 나날들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에 매듭을 짓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부엌에 딸린 작은 방에서의 몇 해를 기억한다.
불을 끄고 누우면 창밖의 담벼락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로 밤이 환했다. 가로등과 그 담벼락을 서성이던 이야기들. 사랑하고 싸우고 울다 끝내 헤어지던 이야기들. 두근두근 가슴이 뛰던 그 방을 기억한다. 가끔 그 방의 어둠 속에 눕는 꿈을 꾼다,
여전히.
나는 위장에 서툴고 그 위장은 종종 오독을 부른다. 또한 오수 속의 꿈이 오독과 오기로 치부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다.
이건 사소한 꿈의 기록이니까, 부끄럽지만.
부끄러움을 손으로 감출 수 있다면 세상은 좀더 아름답고 따뜻해질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날에는 내 말들이 진심으로 진심처럼 들리기를. 한밤의 발소리에게, 조등처럼 환한 세상의 뒷모습에게, 자신의 심장 소리를 나눠준 당신에게,
이 인사가 제대로 전해지기를.
물컵처럼 옛날이 쌓인다. 한 번 쌓이면 걷잡을 수가 없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옛날이라고 말하면 내가 까마득해진다. 잡았다 놓으면 옛날이 되는 이름들이 늘어간다. 층층이 쌓여 서랍이 된다. 서랍은 여는 것. 열면 오늘이 되는 이야기들. 나는 당신들을 꺼내 늘어놓는다.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마다 생각한다.
더 무슨 할 말이 남았을까.
하지 못한 말은 하지 못한 대로도 좋다. 당신이 읽는 동안 내가 들을 수 있다면. 내가 듣는 동안 새들이 말할 수 있다면. 빗소리가 창문을 흔든다.
[그럼 그냥 영화나 같이 봐요.]
그의 그런 문자를 받았을 때 위층에 사는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기쿠지로의 여름>이라는 영화의 OST였다. 나는 오래전에 봤던 영화 속의 무수한 골목길들을 떠올렸다.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온갖 이야기와 비밀이 숨어 있는 작은 길들. 그런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아빠 없이도 여전히 별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나 혼자 그 세계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래요. 그냥 영화나 봐요.]
그와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정작 해를 넘기고 나서였다. 초봄 무렵이었다. 봄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게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