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고서 속의 한자들은 우리말의 실어증에 빠져 있다. 본디는 정감 어린 고운 우리말이었건만, 그대로 적을 그릇이 없던 당시라서, 부득이 한자를 빌려 부호 삼아 썼던 것인데, 오늘날은 그를 해독하는 비밀 열쇠를 잃어버린 처지라, 알짬 같은 우리말, 우리 문학이건만, 부호 해독의 길이 막혀 후손들과도 소통이 아니 되니, 이런 비극이 어디 또 있다 하리오?
매캐한 어둠 속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골방의 고서들! 거기 어느 책이나 한 권 뽑아 아무 갈피나 한 대목 읽어보시라. 정겨운 사연들이 쏟아져나오는 거기, 천백 년 세월의 장벽을 훌쩍 넘어, 지척으로 다가서는 임들과의 만남이 어찌 정에 겹지 않으리오?
그님들의 때묻지 않은 고운 인정! 진정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고 간 그님들의 고운 넋들! 물질만능으로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있어, 그 자신들도 일찍이 몸담아 살긴 살았던, 그러나 삶에 찌들려 골몰하느라 이제는 가물가물 한가닥 그리움의 저편으로 멀어져간 그 '마음의 본향'에로 어느덧 성큼 다가와 있는 듯한, 정겨운 그 목소리! 거기 누가 있어, 고운 우리말로 말문만 열어주면, 굽이굽이 정에 겨운 사연들이, 실꾸리에서처럼 하염없이 풀려나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