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만이 소설가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는 건 아니다. 때론 소설가 역시 독자가 어떤 이들일지 생각한다. 이 단편들을 쓰면서 늦은 밤 열한시 어딘가로 춤추러 가고 싶었지만 혼자 침대에 걸터앉아 밤을 보내야 하는 이들을 떠올렸다.
밤 열한시부터 새벽까지 침대에서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을 만들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아니라 이야기로 흘러가는 여덟 개의 오래된 춤곡을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책에게도 운명이란 게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이 얇은 한 권의 소설책이 누군가의 머리맡에서 교양 없는 애완동물로 오래도록 살아가길 바란다.
―2012년
거대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조감할 깜냥은 없어서 정공법 대신 나는 에둘러 간다. 그래서 서울을 녹인다. 몽상의 손가락으로. 깊은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으면 어둠이 찾아와 두런두런 귓가에 들려줄 법한 속삭임으로. 잠들기 전 떠올리면 먹먹하고 짠하고 아름답고 우스꽝스럽고 그리운 추억이지만 날이 밝은 후엔 까맣게 잊히는 내가 없는 세월의 이야기를.
나는 타구를 들고 뛰어다니는 노예가 되어 유령들이 뱉어버린 일곱 빛깔 무지개 각혈들을 모으고 또 모았다. 그것은 어느새 글자로 굳어지고, 문장으로 나불대고, 그림으로 살랑거리다가, 이야기새끼줄로 비비 꼬더니, 돌연 춤사위로 손을 뻗어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다보니 어느덧 타락하여 능청스러워진, 그러면서도 옛날 옛적 이솝보다 약간 귀염성 있고 애련한 이 노예는 소설가라는 이름을 슬쩍 바짓주머니에 집어넣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