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나 공간 따위가 거기 정해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끈적거리는 폐수처럼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종로 바닥을 와보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할 것인가. 그때 모든 사물과 세계가 제 본디 형상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보이 죽은 어미를 지고 띠풀을 뽑아 연화장으로 마침내 들어가기 전까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뒤늦게 찾아온 본처와 함께 구멍 속 세계에서 행복하기 전까지, 딱 그전까지만, 시다.
초판 시인의 말
노래를 위한 흐물거리는 각주
1) 태몽은 모른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태몽을 꾸었다고 어머니가 전하지만, 그 꿈에 닭이 노닥거렸단 것밖엔 들은 바 없다. 잉어가 품안으로 달려들었다거나 곱상하고 신비로운 아이 하나가 복숭아를 전해주었다거나 마른 못에서 용 한 마리가 솟구쳐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 따위야 모두 남의 이야기다. 할아버지의 뗏장을 들추고 물어볼 수도 없으니 태몽 따위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살면서 옷에 붙은 티끌처럼 생각해버리고 말 법도 하지만 그럴 수 없어지는 것이 희한하다. 내가 태몽을 꾸미게 된 연유다. 이렇게도 꾸미고 저렇게도 꾸몄다. 없었던 기억이 있었던 기억이 되어버렸다. 남의 기억이 내 기억이 되고 내 기억이 남의 것처럼 낯설어져버리기도 하고 두 기억이 또한 얼크러 설크러지기도 했다. 태몽이야 설령 안다고 한들 본래 내 기억일 리도 만무하지만, 꾸미다보니 내가 내 태몽을 꾼 것처럼 생각되고 말기까지 하는 것이다. 해서 나는 수백 가지 태몽을 갖게 되었다. 한데, 그것 참 곤혹스러운 일인 게, 가만 보니, 그것은 수백 사람의 태몽이기도 하다. 애초에 그 자리가 비어 있었으므로 수백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운들, 나는 아무 불만도 없지만,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고 보면, 나는 어디 있단 말인가, 하는 개뿔 같은 의문만 밤새 고개를 쳐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억도 그럴진대 없었던 내가 수백 사람으로 인해 있어진들 어떠랴, 해도 또 생각해보는 것이다. 수백 사람의 태몽이라면 수천 사람의 태몽은 못 될 것인가, 수만 사람의 태몽은 못 될 것인가, 그 수만 사람은 또한 수만 가지 얼굴을 한 모든 나는 아닐 것인가. 생각의 꼬리 하나를 잡고 흔들리고 흔들리다.
2) 태어난 집은 사라졌다. 몇 해 전 몹쓸 놈의 길이 집을 뒤덮고 갔다. 길이 뒤덮기 전에 우리 황급히 빠져나왔다. 세간도 살았던 모양 그대로 둔 채 오로지 몸만 빠져나와 새로 살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그 집에는 뒤란이 있고 항아리가 하나 묻혀서 된 우물이 있었다. 뒤란에선 징그러운 붉은 열매들이 열리고 축축한 바닥으로 우산이끼가 자라났다. 붉은 열매들은 항상 내 잇속을 붉게 물들였다. 장독대도 하나 있었는데, 독 안에서 무슨 장이 발효되는지 알 수 없었다. 얼만큼 구더기가 꿈틀거리는지도 알 길 없었다. 한 번도 스스로 그 장독들의 뚜껑을 열어본 적 없다. 우물에는 이따금 뱀이 기어들어가 빠져 있곤 했다. 그 뱀을 꺼내는 것은 늘 할아버지의 몫이었는데, 어머니가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아무리 해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집에 거의 없었다. 아버지 없이도, 였는지, 뱀이 자꾸 우물에 빠진 뒤였는지, 그건 모르겠고, 어머니는 그 집에서 자주 유산을 해댔다. 생겨나지 못하고 죽은 아기들은 어디로 갔나. 술에 취해 주렁도 버리고 돌아오는 길섶에 쓰러져 있던 증조할아비와 얼굴이 반이나 큰 점에 뒤덮여 오래 벽에 똥칠을 하던 증조할미와 할아비의 끝나지 않는 징용 간 이야기와 할미의 때마다 행해지는 비손과 측간 어둠 속에 눈을 빛내던 구렁이 한 마리와 애장터 쪽에서 몰아오던 비 같은 것들은 사라졌다. 사라져 없으니 기억하기도 어렵다. 기억하려고 애에 애를 보태 써보지만 온전하지 않다. 온전하려고 아예 애쓰지도 이젠 않는다. 그렇대도 그것이 또 없었다고 누가 말할까. 아버지가 태어난 집은 물속에 있다. 어느 해 여름 물 빠진 저수지를 헤집고 다니다가 뼈다귀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오래전에 버린 기억의 허연 해골이었더랬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촌수도 헤아리기 힘든 고모 김덕룡씨가 죽어 사흘 동안 장대비에 젖어 불어 있던 집이다.
3) 뛰며 놀며 자랐던 서울 변두리의 판잣집들과 골목들은 사라져 없다. 배꽃 흩날리던 자리엔 고층 아파트들이 우뚝우뚝 일어서 흔들리고 있었던 것인데, 말해 무엇하랴. 사라지는 것들은 다 어미다. 사라진 것들은 그러므로 다 신화다.
4) 자연으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들이야말로 세계가 아직도 견고하다고 믿는 자들일 것이다. 어느 틈에 부드러운 피부에 싸여 있는 세계가 제 피부에 생채기를 내어 시뻘건 속살을 보여줄 때 그들은 기절초풍하고만 말 것인가. 어미에게 돌아간들 이미 쭈글쭈글 천만 개 주름을 단 자궁일밖에. 어하리 넘차 어어허.
5) 『삼국유사』 의해편, 「蛇福言不」. 사복(蛇福)이 외출을 했는지도 확인할 길 없지만, 죽은 어미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원효에게 찾아간 것만은 분명한 듯 보인다.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아비 없이 과부의 몸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오직 바닥에 누워만 있었다. 한데 그가 원효에게 찾아가는 길은 구렁덩덩신선비가 제 아내에게 허물을 맡기고 과거를 보러 가는 길 같지 않았겠는가. 시간이나 공간 따위가 거기 정해져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가 끈적거리는 폐수처럼 사람들이 흘러다니는 종로 바닥을 와보지 않았다고 누가 얘기할 것인가. 그때 모든 사물과 세계가 제 본디 형상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사복이 죽은 어미를 지고 띠풀을 뽑아 연화장으로 마침내 들어가기 전까지, 구렁덩덩신선비가 뒤늦게 찾아온 본처와 함께 구멍 속 세계에서 행복하기 전까지, 딱 그전까지만, 시다.
6) 노래로 가는 길은 멀다. 온통 흐물거린다.
2005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