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서구 추수의 모더니즘 속에서 자기 예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의 어려움을 제주-오사카-동경-서울-제주로 이어지는 작가의 고향회귀의 과정이 잘 말해 준다. 변시지 예술의 구도자적 순례는 대지와 바람의 뒤섞임 속에서 마침내 황토빛으로 열렸으며 그것은 이제 그의 사상이 되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의 인간의 실존적 위상을 바라보는 우주적 연민, 달관과 체관의 어떤 높은 경지에 와 있는 듯하다. 그의 그림처럼 예술과 풍토, 지역성과 세계성, 동양과 서양이 함께 만나는 희귀하고도 소중한 사례는 아직 없다.
오후 네 시의 갤러리는 한산하다. 작가는 이미 다녀갔으며 개막에 초대된 이들 또한 전시장을 둘러보고 모두 돌아간 뒤다. 몇 개의 화분들이 입구 쪽에 도열해 있고 데스크에는 누군가가 홀로 앉아 있다. 문을 닫기에는 이르고 관람객은 더 들지 않을 것 같은 시간, 오후 네 시의 갤러리에는 그래서 늘 늦은 관람객의 평화와 자유가 있다.
길을 걷다가 문득, 혹은 근처에 일을 마치고 허전하고 섭섭하여 발길을 돌려본 그곳, 은밀하게 스며든 그 공간에는 이미 내가 꿈꾸어 온 것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하고 싶었던 그림이 문학으로 바뀌었고 작업실보다는 강의실에서 보낸 나의 이력은 모두 미완의 기억들로 채워져 있다.
이 에세이들은 발길 따라 눈길 따라 기웃거려본 갤러리에서의 상념과 몽상의 시간들을 담은 것이다. 시대와 이념에 무관하게 토로되어 있지만, 그림에 대한 나의 그리움과 허기의 흔적들이다.
바이러스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신체적 거리는 사회적 거리를 만들고 사회적 거리는 우리를 격리와 단절로 내몰고 있다. 광화문의 촛불이 혁명으로 타오른 지 3년, 그러나 지금의 우리 사회는 다시 불신과 반목으로 치닫고 있다. ‘코로나 블루’가 지구촌을 덮치고 있으며, 방역 선진 코리아는 또 다른 정치 후진성 악성 코로나에 깊은 우울에 빠져 있다.
이 책은 나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풍경과 시간』 『갈등의 힘』에 보이는 멜랑콜리나 비평적 언사는 다소 깊어졌고 볼메어졌다. 어느 시대이고 위기 아닌 때 없었으며 이 위기의식이야말로 사회통합이나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는 하지만 그 역설을 즐길 여유도 시간도 없어졌다.
한 어절의 은유를 위해 밤을 새우는 시인이나 하나의 메시지를 위해 백 줄의 허구를 만들어내는 소설가의 심미적 이상은 이제 사치가 되었는가. 이 책은 그러므로 비애의 용량도 상상력의 용량도 함께 줄어만 가는 나의 그동안의 우울한 날들의 기록이다.
문학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로 모아진다. 이는 그러나 다양한 방법과 시각에 의한 이해와 설명과 분석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문학을 그것 자체의 독자적인 내적 논리로만 보려는 태도를 지양하고 사회와의 복합적인 얼크러짐의 구조로 보려는 관점에서 쓴 것이지만, 문학을 역사나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 종속시켜버리는 사태에 대한 경계가 또한 전제되었다.
소설에서의 최종적인 관심이 인물에의 그것이라 할 때, 작중인물이 상황에 대응하고 있는 사고나 행위에 대한 관심은 중요하다. 지난 한 세기 동안의 한국 사회는 자생적이든 외세의 영향 아래서든 근대화를 변화의 정향으로 삼아왔고 결과는 식민화로 나타난바, 이러한 사회변동의 구체적 내용과 과정에 대한 그들의 이념이나 가치의 대응 양태의 하나로서 이 책에서는 그것을 사회갈등(social conflict)이라 규정해보았다. 사회갈등이 어떻게 작품의 구조에 가담하고 있는가가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내용이지만, 이 역시 작품의 구조를 밝히는 단서에 불과함은 물론이다. 여기에서 미적 양식과 사회적 양식과의 상호 간섭적인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는바, 중요한 것은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 그러하였는가 일 것이다.
이 책은 필자의 「한국 근대소설 작중인물의 사회갈등 연구」를 보완, 개제한 것이다. 기왕의 논의에 이태준, 박태원, 김동리를 추가하였다. 세월이 흘렀지만, 이 책에서 논의한 작중인물의 사회갈등 양상과 소설의 구조와의 상호성에 대한 필자의 인식에는 변함이 없다.
식민화와 분단 상황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의 멍에이다. 이 책이 한국 근대소설 일반에 대한 하나의 유의미한 해석적 관점을 제시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