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연관된 모든 문제에는 단일하면서도 간단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으며 또 정답 그 자체보다도 정답을 도출해가는 사고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난 생각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그러한 사고에 익숙해 있지 않다. 이것은 학생 개개인의 책임이라기보다 교육제도와 학부모를 포함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또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파괴해온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인간의 '기계화'와 '야만화'의 속도가 파죽지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란 이렇듯 흘러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몇번이고 거듭된다. 불안과 초조의 절벽에 내몰려 몸부림치듯 하루하루를 살다가 마침내 평안에 도달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역사 앞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할 뿐." 30대의 내가 이 책에 새겨넣었던 말을 이제 다시 한번 50대를 맞은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그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것이 일본 것이든 조국 것이든 모든 국가주의의 허위성과 위험성에 대해 가장 민감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어떤 의미에서 일본인뿐 아니라 조국 사람들에게도 재일조선인은 ‘탄광의 카나리아’인 것이다. 조국의 독자들은 이 카나리아의 목소리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이 글은 '나'라는 한 사람의 디아스포라가 런던, 잘츠부르크, 카셀, 광주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에서 접한 사회적 양상과 예술작품을 토대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의를 탐색하려는 시도다. 디아스포라라는 존재가 근대 특유의 역사적 소산이라고 한다면, 이 시도는 디아스포라의 시선으로 '근대'를 다시 보는 것, 그리고 '근대 이후' 인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째서 이런 어려운 대화가 행해져야 하는가? 그것은 이러한 대화가 인간해방을 위해 '외부'와 '내부' 양쪽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양쪽에'라는 말을 강조해두고 싶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서로의 지혜와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멀리 있지만 절실한, 그 목표만 놓치지 않는다면 설령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화는 계속될 것이다. 거꾸로 그러한 목표를 잃어버린 채 행해지는 대화로는 결코 참다운 만남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2년 전이다. 1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47편이라는 짧은 평전을 쓰는 일은 무척 가혹한 작업이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무렵은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하고 부지런히 썼던 것 같다. 그 가혹한 작업이 현재의 나라는 '글쟁이'의 지식과 사고의 토대를 형성해주었다. 요컨대, 나는 이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교사들에게 배우고 스스로를 가르친 것이다. 세월이 흘러 개개의 인문들에 대한 연구가 더 진행된 경우도 있고, 또 현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평가가 달라진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번에 한국어판을 발간하면서 새로 가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1990년대라는 시대에, 일본이라는 장소에서, 나라는 한 사람의 재일조선인이 새긴 저항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으로 1995년도 '일본 에세이스트클럽상'을 받았다. 문필가의 삶을 희망하고 있던 나는 이 상을 수상하면서 커다란 힘과 자극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빼어난 일본어 표현'이 수상의 주된 이유로 꼽혔다는 사실, 그리고 재일교포로는 내가 이 상의 첫 수상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저 기쁨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제가 조선을 식민 지배한 결과 나는 일본 땅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민족 차별 정책 때문에 충분한 '우리말' 교육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 민족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 같은 역사가 나의 '빼어난 일본어 표현'을 가능케 해주었고 끝내 이런 상까지 안겨준 것이라 할진대, 내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에세이스트클럽상 수상 인사말에서 나는 자신을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으로 표현했다. "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대한다. 그 연장선에 위치하고 있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정책을 반대한다. 식민 지배의 죄과를 부인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본 우익의 사상을 반대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하고 있다. 일본어를 거치지 않는다면 나의 사고며 표현 행위마저도 모두 불가능하다. 또 이런 이유로 나의 글쓰기는 주로 일본인들의 눈에만 띌 뿐이다. 요컨대 '나'라는 존재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 갇힌 수인인 것이다. 그 감옥 속에서 나는 더 너른 광장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조국의 동포들에게까지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해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처지가 특별하다거나 예외적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식민 지배와 제국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태어난 땅에서 추방당하고 모어의 공동체에서 축출된 무수한 디아스포라들이 세계 곳곳에 생겨났다. 이들 디아스포라는 식민 지배와 제국주의의 산물인 '영어의 감옥', '프랑스어의 감옥', '스페인 어의 감옥' 그 외에 여러 다른 '언어의 감옥'에 갇혀 있으며, 저마다 더 넓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고, 그리하여 서로 만나고 싶다고 몸부림치고 있다. 재일교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러한 여러 디아스포라들 중 하나이다. 이산의 비애, 모어 상실의 고통에서 여러 디아스포라와 연대하는 일이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보편적 인간'에 다가서게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신문연재라는 중대사를 이렇게 대충 결정해도 되는 걸까? 게다가 번역은 정말 괜찮을까? 그럼에도 결국 받아들인 것은 이 일을 통해 조국 사람들과 대화해보고 싶다는 심정이 강했기 때문이다. 칼럼이라는 형태로 조국 사람들과 과제를 공유하는 동포로서의 연대를 쌓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뛰어난 작품을 낳은 예술가의 삶은 어떤 의미에서든 반드시 감동적이고, 시대와 인생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나 깊은 사색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가의삶과 작품은 절대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예술에서 '서사성'을 배제하려고 애쓴 예술가들, 예를 들면 깐딘스키(Kandinsky)나 말레비치(Malevich)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세계대전과 대량살육으로 상징되는 20세기 전반, 예술가들은 사신(死神)의 숨결을 끊임없이 귓전에 느끼면서 끝없는 창조의 싸움을 벌였다. 푸르른 삶과 시커먼 죽음에 대한 동경. 그들이 남긴 작품은 우리에게 그 동경이 아직도 다 타버리지 않았음을 상기시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