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과 가을, 중환자실에서 호흡하면서, 투병(鬪病)이라는 말을 밀어냈다. 투병. 나는 어떤 것과 싸우고 있단 말인가. 病, 이라고 단정 짓기에는 그 공간이 너무 좁았다.
겨우 몸을 추스러서 시집을 엮는다. 이제 病은, 내가 싸워야 할 어떤 대상이 아니라 내가 끌어안고 동시에
내가 거느려야 할 뿌리임을 알겠다. 그걸 공병(共病)이라고 하면 될까. 내 목숨은 병과 함께 나아가겠지만, 내 시만은 골병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병원 안팎에서 나를 지켜봐 준 '그이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내가 이런 추억담이나 하자고 이 편지를 시작한 건 아니야. 너의 더미(dummy) 연작들은 유머가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사람도 그렇고, 풍경도 그렇고, 우리가 예술이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더라. 유머를 품지 않으면 울음도 슬픔도 품을 수 없다는 거; 너의 더미 그림들엔 슬픔을 품은 웃음이 묻어 있어서 참 좋은 것 같아. 어쩌다 더미를 시작했는지 네가 말해준 적이 있는데 잘 기억나질 않는다. 목각인형 더미. 무표정이면서 모든 표정인,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행동을 하고 있는 더미를 언젠가 너는 선물로 준 적이 있지. 그 더미를 나의 책상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만져보곤 해. 거의 모든 자세가 가능한 더미는 마치 너의 성품 같아.
웃을 때 같이 웃어주고 울 때 같이 울어주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같이 있어주는, 너는 그런 친구잖아. ‘우리’라는 더미를 우리는 32년 넘게 만지고 있구나.
시는, 여전히, 치유이고 위로이고 이상한 종교라고 말한다면 그대는 철없는 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겠지.
그러나 어디 철없는 것이 내 손가락뿐이겠나. 지문뿐이겠나. 가슴은 대책 없이 뜨겁고 새벽에도 뜨겁고 나는 나무의 호흡법을 가늠해볼 뿐,
손가락과 길과 강과 나무와 한없이 좁고 긴 넋을 겹쳐본다.
치유의 간절함과 위로의 격렬함, 이상한 종교가 뿜어내는 이상한 빛으로 없는 문을 여느라
나는, 여전히, 진땀이다. 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