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언어를 버리겠다고 한다. 그 말이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버리고 남는 것이 늙어가고 순응하고 안거를 즐기는 순명(順命)의 자연이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버리려던 것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이기도 하다. 운명적 자연은 억압권력의 토양을 형성해간다. 지배권력은 곧 시간권력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사물화, 영토화하는 과정이 권력행위이기 때문이다. 긍정은 부정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정을 껴안고 넘어서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참 멀다. ('시인의 말'에서)
성격 탓이거니 생각했는데, 내게 폐소공포증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체질의 문제만도 아닐 것이다. 흐린 물속 물고기들이 수면 밖으로 입을 드러내고 숨을 쉬어야 하듯이, 나는 수시로 ‘바깥’을 호흡해야만 했다. 그 벽이 경계이든 현실이든 숙명이든 나를 둘러싼 알껍데기를 깨고 나오면, 그 바깥에는 또다른 껍데기가 존재해왔다.
다시 태어나는 길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성만이 실재였지만, 그건 또다른 표류였다.
나는 늘 인간의 제로 지점에 한발을 딛고 있으려고 해왔다.
(현대의 죽음은 얼마나 병적인가!)
그래야 현실이라는 소용돌이에 마음 놓고 표류할 수 있으리라.
이번에도 ‘현장시’들이 꽤 있었으나 시집에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현장에서 수명을 다했을 것이다. 지금 막 태어나는 것만 시처럼 여겨진다. 또 작별의 시간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면서 걱정하고 격려해주시는 분들께 정말 고맙고 부끄럽다.
2012년 3월 춘분날에
나에게 와서 시가 불행했다.
한번도 그를 살갑게 대접한 일 없었다.
한 글자 또박또박 세심하게 배려한 일 없었다.
그동안 낸 시집 한 권도 손수 사인을 해서
누구에게 우편 발송을 한 일도 없었다.
내 시집을 내가 다시 펼쳐 든 적도 없었다.
내 시집을 내가 거의 보관하고 있지도 않았다.
내가 가꾼 텃밭에 내가 뿌린 것은 어디 가고
어디서 날아왔는지 잡초들만
꽃을 피워 가득하다, 고 썼다.
내가 잡으려던 것들은 나를 떠나고
반기지 않던 잡초만 내 곁에 와서
내 슬픔은 아랑곳하지 않고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기회에 희미한 사랑을 다시 불러
사춘기 적 글씨로 또박또박
늦은 사랑을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보다 더 서툴다.
요즘 들어 그 첫마음이 자꾸 아프게 다가온다. 세상의 탐욕과 권력의 구조화된 그물망이 점차 거대해지고, 조밀해지고, 일상화되고, 추악해져 왔다. 그럴수록 내가 꿈꾸지도 않았던 세계에 조금씩 빨려들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다른 속박을 늘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시는 안(국가, 길, 나, 시)에 있으나 밖을 향하는 물건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는 그것을 내 안으로 붙들려고 하지 않았다. 밖을 버릴 때면 어김없이 추한 권력의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26년 만에 펼쳐본다. 시집 한 권도 내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 복간을 권해왔으나, 그때마다 구차한 연민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그 시대에 그렇게 살다 갔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했다.
87년, 그해는 거의 거리에서 보냈다. 초겨울이 되어서야 모서리가 헐고 크기와 재질이 제각각인 종이 뭉치를 챙겨 들고 닷새 짬을 내어 신불산 기슭 화전민이 살던 빈집에 들었다. 뒤는 깎아지른 바위 절벽이었고, 마당은 곧장 들판으로 이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쌀을 씻으러 마당 샘터에 나가면, 하얗게 서리 내린 들판에 까마귀 떼가 하늘을 덮으며 날아들었다가 해가 뜨기 시작하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풍경이 나의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존재의 바닥에 깔린 폐허 같은 빈 들을 걷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했다.
한 번도 배워본 적 없던 시들이 언어를 얻지 못하고 몸에 갇혀 오래 들끓고 있었지만, 토해낼 수도 없고, 옆구리를 뚫고 나올 수도 없었다. 어느 누구의 손에 이끌려 나올 수도 없었다. 마치 망치로 깨고 나온 듯 하나같이 모가 나 있고 파편들도 어지럽다. 출간 후 처음 펼쳐 들고 난감했다. 손을 대고 싶은 마음을 많이 억눌렀지만, 어쩔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시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이영진 시인의 따듯하고 두툼한 손길이 있었다. 박영근 시인의 무조건적인 격려와 재기 발랄하던 김형수 시인의 투명한 열정도 뒤를 떠밀었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부추겨 복간을 재촉한 이는 정우영 시인이다. 그에게 조언을 구해서 틀린 답을 얻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남은 일은 다시 망각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신석기 초기부터 여러 시기에 걸쳐 다양한 동물 형상들과 선사인들의 생활상 그리고 제의와 기원의 상징들을 새긴 바위그림입니다.
단순한 도구를 사용해 몇 개의 간략한 선으로 대상의 특이성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선사인들의 미의식은 실로 경이로울 따름입니다.
언어와 추상적인 표현력이 발전되기 이전의 그림과 기호 속에는 자연의 경이와 삶의 염원, 그리고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상징들과 그 모든 것을 품은 인간의 마음을 담았으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암각화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수없이 많지만, 고대인의 문화와 사고 체계를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시기부터 전해 내려온 신화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뿐입니다.
암각화를 이해하는 방법은 우선 언어 발생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처음 언어를 어떻게 구성하고 사용하기 시작했는지를 밝히는 언어발생의 기원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습니만, 그 가운데 장 자크 루소의 ‘언어 기원’에 관한 글이 암각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인간이 말을 하게 된 최초의 동기가 정념의 표현 욕구였을 거라고 합니다. 그것은 곧 형상으로 표현되고 비유적 표현을 개발했을 것이라는 거죠. 정념의 표현은 시의 형태를 띠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시로서 말을 하고 이치를 따져볼 생각을 한 것은 오랜 뒤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또 이렇게 주장합니다. 학자들은 최초 인간들의 언어를 기하학자의 언어로 여기는데, 그게 아니라 시인의 언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는 그 내용이 무엇이든 신석기 시대의 시 혹은 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 기록된 최초의 시입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는 우리에게 시의 첫마음을 돌아보게 합니다.
현대 인간들은 매우 뛰어난 표현 기술을 개발하고 훌륭한 문법 체계를 가짐으로서 인간 중심적으로 우주를 이해하고 자연을 도구화 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것은 대상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시의 마음과 멀어지는 길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고도로 추상적이고 체계화된 문법적 언어를 가졌기에 그 암각화를 이해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반구대는 그 무엇보다도 문학적 공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반도 문학의 기원과 관련된 공간이라고 말하면 지나친 상상일까요? 그러나 이곳은 마치 우리 시대의 문학의 운명처럼 일 년에 절반을 댐의 물에 잠겨 있어야 합니다. 자본 논리는 언제나 문화와 정신을 수장시켜왔고, 그 질주는 여전히 늦출 줄 모릅니다.
반구대는 사학자의 몫이 아니라 시인의 몫인지도 모릅니다. 문학이라면 저 혼돈의 상징들과 교감하고 인간의 첫 마음을 읽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개한 그들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인간, 탁월한 그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다만 상상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실재라고 믿는 것보다 시가 더 현실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들의 노력을 통해 반구대가 문학과 더 깊이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여기 작은 노력들이 지속되고 확장되기를 기대합니다.
돌아보면 문득 그가 있다 ―‘원초적 혁명시인’을 기다리며
감성을 기록할 수 없는 역사는 얼마만큼 정확한 기록일까? 촛불의 해였다고 할 수 있는 2008년을 돌아보며 드는 생각이다. 2008년은 분명 집단감성이 사회 변화 활력의 중심에 놓였던 해였다. 그 가운데는 10대 여학생들이 있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많은 논자들은 모바일과 인터넷 세대가 가지는 독특한 문화현상으로 읽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의 현란함에 따른 겉보기 분석일 뿐이다. 수단과 도구가 내용과 질을 크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역시 어떤 현상의 원인이기 이전에 다른 원인에 의한 결과물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소위 감성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이들 대로 자기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기성세대가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낡은 질서에 충격을 주고 그 흐름을 바꾼 사건들이 근래의 일만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건은 4.19를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대로, 4월 19일 전국적인 반독재 규탄시위로 발전되기 이전에 낡은 질서에 충격을 주면서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은 10대 고등학생들이었다. 2.28 대구 학생의거, 3.15 마산 고등학생 시위가 대학생과 교수, 사회인들에게 크게 자극을 미치면서 사회혁명으로 번진 사건이었다. 3.1 만세운동은 알려진 바와는 달리, 당시 여학교 학생들의 용기 있는 행동들이 사회 지도층과 농민들에게 파급적 영향을 미쳤다는 증언도 있다. 류관순 열사가 고문을 받고 죽은 나이가 16살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과 광주민주항쟁도 그 직전에 일어난 원풍모방, 동일방직, YH무역 사건 등이 직간접 원인이었는데, 당시 엄혹한 독재 지배의 공포에 질려 있던 얼어붙은 기성 질서에 크게 균열을 가한 이들은 바로 10대에서 20대 초반의 여성 노동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1987년 6.10 민주항쟁이 있기 전에는 어떤 전조가 있었는가? 6.10 항쟁에서 감성세대의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예외적인 사건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1980년대에는 시인들이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절을 시의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맥락은 동일하다.
니체는 여성을 “전(前) 단계 서정시인이자, 원초적 서정시인”이라 하였는데, 곧 이들 세대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래서 이들은 어쩌면 10대 소녀들로서가 아니라 ‘원초적 서정시인’으로 역사에 참여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을 바꾸어 말해 시인에게 화살을 돌리면 이렇게 된다. 시인은 시대를 예감하고 발언할 예언자적 지위를 부여받았으나, 시인들이 ‘사행성 오락’에 빠져 있는 사이에 ‘원초적 서정시인’들이 붉은 악마의 탈을 쓰고 권력과 기성 질서에 경멸과 조소의 운율과 리듬을 방출하면서, 초경(初經)의 우주적 예감과 생명 소용돌이에 대한 두려움과 격정으로부터 자신을 정화하는 춤과 노래를 들고 시대의 전면에 나선 것이 아닌가? 한 시대가 그 시대의 몸에 맞는 이름과 정신을 부여받지 못하고 어둠과 혼돈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감성세대의 실천은 종종 비상구를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 전태일은 누구인가? 투사인가? 열사인가? 그 어떤 수식도 그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어쩌면 그를 ‘전(前) 단계 혁명시인’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온몸으로 시대를 예감하고 몸을 태워 시를 쓴 ‘원초적 혁명시인’이 아닐까?
그를 아직도 현재형으로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몸의 시(詩)로 예감한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태일 열사 탄생 60주년 기념 시집에 함께해주신 시인들은 모두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살아오신 이 시대 소중한 시인들이다. 이들 시에서 ‘전(前) 단계’ 시대정신의 행간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열번째 시집이다. 여전히 나는 첫 시집을 내던 그곳과 다름없는 공간에 머물러 있다. 나 자신이 하나의 관측소인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있는 곳은 변방이다. 거의 모든 것의 변방이다. 변방은 얼마간 야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찌꺼기가 훨씬 더 많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래서 시가 나에게 찾아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억압된 현실을 마주해서 찌꺼기들을 재료로 무슨 연금술이라도 부려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빛나는 무엇이 아니라, 금을 똥으로 만드는 뒤집힌 연금술이기도 했다.
그제는 오래간만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마을에 가보았다. 공단에 둘러싸인 바닷가다. 볕에 그을린 젊은 노동자 하나가 화물선에서 막 내려서고 있었다. 봄볕 가득한 바다에는 외항선 몇척이 떠 있었다.
2020년 3월
전태일 열사의 사진이 든 액자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공광규의 시) 왜 그랬을까? 그는 왜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을까? 그동안 그의 이름 아래에서 무슨 짓들 하고 있었던 걸까? 그는 더 이상 꿈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에게 영광을 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는 우리에게 권력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권력이라는 것은 눈을 씻고 봐도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좆는 이들에게 전태일이 왜 필요할까. 필요할 때 그를 부르지만 돌아서면 초라한 그를 거두어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한 것이 노동자의 기득권이다. 가장 구역질나는 짓이 노동자의 권력 행세다. 이제 쓰레기통에 버려진 ‘강령’을 누가 다시 꺼내들까? 구겨지고 개똥이 묻은 강령을. 그 이름만으로도 완성된 강령인 전태
일이라는 이름을. 펼쳐든다 시여, 오염된 광장이여, 광장마저 권력의 놀이터가 된 시대여, 시여, 그의 이름을 광야에 불러내어라. 노동자의 광장은 광야여야 한다.
‘푸른사상 시선’ 100권은 한국 현대시의 또 하나의 정체성이다. 통합된 지속성이나 하나의 경향으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같이 밀착된 삶의 현장에서 생활과 시작을 병행해온 시인들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지역과 다양한 현장을 아우르고 있어 우리 시대의 ‘지방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 또한 의외의 성과를 보여준다. 시에 있어 ‘지방성’을 말하는 것은 제한적이겠으나, 관념이 아닌 사물과 현실을 말하는 시는 삶의 특이성들 간의 차별적 공간에서만이 활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결코 소홀히 취급될 수 없는 것이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가 모든 예술은 지방적인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오관이 시의 재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시가 어디에서 발생되어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오관이 외부세계와 무관하게 완결돼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우리 시의 급격한 변화와 위축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완성된 신자유주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매 순간 이익을 남겨야 하는 조급증에 들뜬 시간과 자기 긍정이 과열된 현실은 시의 느리고 섬세한 호흡을 질식시킨다. 조작된 현실에서 언어의 자율성은 현실을 왜곡하고 해체할 뿐만 아니라, 해체하는 자의 자기 동일성은 오히려 강화된다. 거대 체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욕망하고 내면화하면서 자잘한 서정적 주체는 극단적으로 해체하는 타자의 시학으로 타자를 설득할 수 없다. 횔덜린이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회귀가 아니라 시를 질식시키는 집중화된 체제에 대한 저항의 의미일 것이다. 시는 다시 벌거벗은 자기 신체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모두의 고향인 ‘지방’성을 회복하는 일은 회귀가 아니라 저항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