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따라, 단락의 톤에 따라, 어휘나 낱말의 의미와 느낌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착함'이나 '솔직' 같은 낱말이 천사가 되기도 하고 악마가 되기도 한다. 지난 삶의 나다운 점을 정리해둔다는 의미에서 그런 천사성과 악마성을 정리하지 못한 채 출간을 결심했다. 양면석을 극복한다면 신의 영역인 종교이지 인간의 영역인 문학일 수 없다.
이 책은 내 꿈의 무덤이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꿈. 캄캄한 굴속에서 혼자 울부짖던 꿈. 풀잎과 벌레마저 비웃던 꿈. 그리움마저 말라버린 꿈. 복수할 대상이 없는 꿈.
“은하수까지 명주실로 재면 몇 타래나 된다니?”
그런 아버지의 핏줄을 타고난 바람에 나는 황량한 우주에 빠져들었고, 그 무하유(無何有)세계에서 허무의 가치를 캘 수 있었다. 그렇다. 내 생의 90퍼센트는 허무다. 하지만 그 허무가 생의 에너지로 작용했기에 나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고 슬픔을 욕망하게 되었다. 이 소설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작품이다.
2000년대와 1960년대의 어느 특수 상황을 교직했다.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남파되었던 살인전문가의 눈에 지금의 여기 현실이 어떻게 비쳐질지, 더구나 그 무장공비를 직접 다뤘던 전직 정보형사와의 인간적인 관계항은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여고시절에 실성기가 있어 평생 방황하며 살아온 한 순결한 여성의 광기는 어떤 미학을 지니는지, 무척 고심하며 썼다.
노골적으로 윗뜸과 아랫뜸을 대비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남북한 모두 한쪽으로만 경도된 타락한 동네지만 변별점을 두고 싶었다. 세상을 보는 내 눈에 혹 티가 낀 건 아닌지 조심하며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