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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정혜용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최근작
2023년 9월 <바깥 일기>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콩데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그 온갖 ‘주의’들을 넘어선 곳에 존재하는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모습들을 섬세하게 형상화해내는 데에 있다. 콩데가 창조한 여성 서사의 주인공 티투바의 매력은 끝이 없다. 티투바는 독립적인 정신의 소유자이자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거침없이 당당하며,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놓지 못한 인물이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 줘

이 작품의 주인공 쿠난디는 아프리카 말리에 사는 사내아이로,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축구를 한다. 작품 첫머리를 여는, “공차기. 그게 신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가장 좋은 것이다.”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축구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평생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든 아프리카 아이들은 아프리카 출신의 축구 스타들을 보면서, 축구만이 이 절망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쿠난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축구 유망주들을 발굴하러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다니는 이탈리아 인 모집책의 눈에 쿠난디가 들어간 순간,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다. 세계적 축구 스타로서 부와 명예를 거머쥐게 될 거라는 모집책의 말은 쿠난디에게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이다. 쿠난디는, 부모와 친척들이 없는 살림에도 조금씩 모아 준 2,000유로라는 거금을 모집책에게 고스란히 갖다 바친 뒤, 성공해서 금의환향하겠다는 꿈을 안고 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모집책을 따라 프랑스로 가게 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쿠난디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부푼 기대를 여지없이 배반한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이탈리아 인은 외곽 지역의 허름한 호텔에 아이들을 부려 놓은 후 자취를 감춰 버린다. 또 다른 모집책에게 아이들을 넘긴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넘겨지면서,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고 이름 모를 팀들과의 경기를 거듭하면서, 한 명씩 한 명씩 버림받는 동료들을 보면서, 쿠난디는 백인들이 약속한 장밋빛 미래란 대다수에게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는 저임금과 열악한 거주 환경에 시달리는 밑바닥 인생이고, 언제 쫓겨날지 몰라 두려움에 떠는 불법 체류자 신세일 뿐이다. 백인.어른.착취자들의 사냥감이 되는 흑인.소년.피착취자의 상징인 쿠난디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화려한 프로 축구 세계의 이면에 현대판 노예 제도가 숨어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 잔인한 착취 시스템에 걸려든 아프리카 아이들의 삶이 어떻게 공중분해 되는지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그러한 현실을 꼼꼼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시사 고발 프로그램 같은 메마른 느낌도 아니고, 지나치게 비분강개하여 독자를 머쓱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하지만 쿠난디가 겪는 사건의 비극성을 돋우는 담담한 어조가 유지된다고 해서 이 작품을 읽는 독자마저도 쉽사리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향 마을에서 가난하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던 쿠난디가 아차 하는 순간 낯설고 적대적인 현실에 내동댕이쳐지고,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 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기란 힘들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프랑스의 거리를 전전하던 아프리카 소년들이 “내가 죽은 줄 알면 좋겠어.”라고 고백하는 작품 말미에 이르면, 심지어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든다. 그 말에는, 이쪽에서는 불법 체류자라는 불안한 신분이 기다리고 있고 저쪽에서는 충족시켜 줄 수 없는 가족과 친척들의 기대가 압박하고 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프리카 소년들을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그들의 절절한 심정이 응축되어 있다. 이 작품이 스포츠 산업의 어두운 이면에 한 번쯤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바깥 일기

문학 실천에서 작동하는 기존의 그 어떤 권위도 당연시하지 않는 작가답게, 에르노는 2세기 전에 탄생한 뒤 일기라는 장르의 주류 형식이 된 내면 일기가 왜 계속 확고한 위치를 누려야 하는지 물으며 내면 일기를 비튼다. 그렇게 외면 일기와 에트노텍스트 사이의 경계에 자리한 글들이 태어났다. 거기에서 작가의 눈은 자기 안의 심연이 아닌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작가의 귀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향해 활짝 열린다.

밖의 삶

문학 실천에서 작동하는 기존의 그 어떤 권위도 당연시하지 않는 작가답게, 에르노는 2세기 전에 탄생한 뒤 일기라는 장르의 주류 형식이 된 내면 일기가 왜 계속 확고한 위치를 누려야 하는지 물으며 내면 일기를 비튼다. 그렇게 외면 일기와 에트노텍스트 사이의 경계에 자리한 글들이 태어났다. 거기에서 작가의 눈은 자기 안의 심연이 아닌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작가의 귀는 내면의 목소리가 아닌 타인의 목소리를 향해 활짝 열린다.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독자는 장기 이식을 둘러싸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면서, 그 강도와 밀도가 임계점에 이를 정도로 극대화되는 삶의 경험들을 목도하게 된다.

식탁의 길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정교하고 복잡하게 구성된 풀 코스 정찬이라면, 이번의 단아한 소품 『식탁의 길』은 맛깔스러운 단품 요리라고나 할까.

한 여자

<문학보다 아래 층위에 머무르고자 하는 글쓰기>, <역사와 문학과 사회학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글쓰기>(110면)라는 발언은 소위 <문학적인 것>에 담긴 통념들에 대한 명백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작가는 <시적인 표현>, <아름다운 표현>, 요컨대 <미사여구>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번역도 이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여인/여자/여성 가운데 일부러 가장 무미하고 일상적으로 느껴지는 여자를 선택하는 식, 아울러 문장을 구성할 때 될 수 있으면 군더더기를 끊임없이 쳐내고, 뭔가를 덧붙여서 문장을 매끄럽게 만드는 전략을 가능한 한 피해야만 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작가가 어머니의 일대기를 유장하게 서술하고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집요하게 쌓아 나가며, 그저 보여 줄 뿐이다. 아니 에르노는 이에 부합하는 서술 전략을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문단과 문단 사이에 흐름을 툭툭 끊어 놓는, 때로는 길고 때로는 짧은 간격들이 자리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전략은 주어, 동사, 목적어를 완벽하게 갖춘 문장을 구사하지 않고 간단한 메모를 연상시키는 문장을 구사하고 있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크로키풍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특성 또한 번역에 최대한 반영했다. 끝으로 지적할 것은 작품에서 어머니를 가리키는 <elle>이라는 대명사의 번역 문제이다. 작가는 자신의 모친을 <나의 어머니>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심정적인 거리를 좁히지 않고서, 한 시대를 살다 간 중하층 계급의 전형적인 여자로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한 여자Une Femme>라는 제목에서도 잘 드러나듯 특정 사회 역사적 조건들 속에서 살다간 한 시대의, 한 계급의 전형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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