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곳이 아닌 저 멀리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내재적 갈망인지도 모르겠다. 미지의 곳으로부터 왔기에 다시 돌아갈 낯선 곳을 찾아 헤매는 무의식적 행로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바닷가에 살면서 관찰해보건대 인간에겐 이상한 심리 패턴이 있는 것 같다. 바다를 만나려고 멀고 먼 길을 여행하여 마침내 도착하지만 잠시 머무를 뿐, 곧 다른 영지를 찾아 떠나기 일쑤다. 물론 물놀이를 하거나 모래 쌓기를 하거나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보곤 해도 머무르는 이는 드물다. 여정엔 끝이 없다지만 원하던 대지의 끝인데도. 이후론 죽음과도 닮은 만경창파만이 겹겹이 출렁이고 있는데도.
어찌 보면 나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다가 시집에 관심을 두다가 마스크를 쓰고 젊은이들과 연극을 하더니 희곡집에까지 이르렀다. 나도 매번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장르가 어디 따로 존재하겠는가. 어느 시대에 누가 장르라는 벽을 글쓰기에다 세워놓았을까. 원래 글쓰기만이 있을 뿐인데.
그럼에도 장르를 뛰어넘어보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소설은 묘사와 대화 중 단연코 묘사가 압도하지만 연극에서는 말만으로 어떤 세상을 리얼리티 있게 만들어내는 점이 놀라웠다. 그런 측면에서 언어를 뿌리에 두고 있는 바는 동일하지만 연극이 영화보다 훨씬 문학에 가깝다. 아니 근대소설이 출현하기 전에 희곡이 문학의 본류였다는 것과 셰익스피어가 왜 희곡 작가였는지도 덤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희곡들은 대학로에서 여러 번 무대에 올려진 작품들이다. 「빗소리 몽환도」는 내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으로 현실과 환상에는 경계가 없다는, 빗소리 음향이 중심에 있는 일인극이나 다름없다. 「공공공공」은 비록 감옥에 있더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주인공이 외치고 있지만 관객의 참여가 필수적인 연극이다. 또한 「복제인간 1001」은 예술과 과학 간의 오래된 갈등과 충돌을 당대에도 실현 가능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방랑밴드:사랑의 적에게 총을 쏘다」는 SF 뮤지컬로 유토피아란 없고 지금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구식 테마를 가지고 있다. - 책머리에
책을 낼 때마다 내가 가지는 가장 깊은 셀렘은 이 이야기들이 도서관에 갈 것이라는 것, 그곳에서 잠을 자고 휴식하며, 자신을 사랑해 주고 읽어 낼 사람들을 기다릴 것을 기대하는 지점에 있다. 보르헤스가 도서관이 우주라고 말한 것이 틀리지 않는 통찰이라면, 이 책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러 시공간을 뛰어 건너온 책들과 그 책들을 쓴 영혼들과도 만날 것이고, 분명 나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지낼 것 같다.
아마도 나는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시대의 자손은 언어로 만들어진 책이기에, 언어가 주인공인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게 확실하다. 또한 선대에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 덕분에 한글로 글을 쓸 수 있었다고.
이십여 년을 넘게 타국을 떠돌다 보니 모국어가 느슨해졌다. 먼저 조사(助詞) 느낌이 모호해지고, 슬그머니 정체성이 흔들리고, 나를 지탱해 주는 뿌리가 약해져 영혼이 불안해졌다. 어쩌면 잃어버렸기에 회복하고자 갈망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나의 그런 상실에 대한 탐구이자 진심 어린 헌물(獻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암클 투서」 허중달 이야기는 유희춘의 『미암일기』 부분에서 빌려와 각색한 것이다. 한편 이 소설의 중심인물인 김태준 이야기는 『김태준 평전』(김용직, 일지사, 2007)을 참고한 것임을 밝힌다. 이 책이 없었다면 이 소설이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따라서 김태준, 박진홍, 이용준, 간송 전형필, 이현상 등 일제강점기에 살았던 실존 인물과 역사적 사건들이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서사 자체는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허구적 상상이다.
드디어 마음속에서 나와 가까이 살고 있던 인물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어 기쁘다. 아니 슬프다. 그러나 깊이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언젠가 마침내 자신의 한 부분이 된다는 그 말을 믿으며 다시 엎드린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내 마음에 남아 있는 김태준 국문학자에게 이 책을 바친다.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