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폐광 속에 버려진 광부들의 이야기를 필두로 글쓴이들은 매달 길을 떠나야 했다. 서울에서 가까운 안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전라도 광주와 부안을 다녀오기도 했고, 울진과 속초, 소록도를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 참으로 아픈 곳들이었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곳들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조금만 더 정직하고 따뜻했으면 하는 마음에 눈물 떨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이제 그 흔적들을 한곳에 모아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다시 전하고자 한다.
소년은 또 한두 살 많은 형들이 좋았고, 그 형들을 잘 따랐다. 또래들한테서는 왠지 모를 젖비린내가 났다. 그런가 하면 소년은, 무슨 일이든 자신이 알아서 할 줄 아는 놈이 좋았다. 그런 점에서 비춰볼 때 H일보 신설동 보급소는 썩 괜찮은 곳이었다. 고아와 사생아들이 적당히 배합된, 종아리, 빨강빤스, 솟아라, 영화박사, 신문박사 등 그들의 또 다른 이름이 맘에 들었다.
소년의 나이도 어느것 사십 대. 그의 앨범에는 오래된 사진이 한 장 있다. 1979년 4월 H일보 신설동 보급소에서 '달배'(배달원)들과 찍은 단체사진이다. 손병구 소장을 머리로 시민이, 영환 형, 윤식이, 상택이, 종찬이, 백 총무, 유 감독……. 그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뇌까리곤 했다. 언젠가 꼭 그때 이야기를 써보겠노라고…….
그는 그 이야기를 쓰면서 몇 번 울었고, 나머지 전부는 행복했다.
한반도 동해와 가까운 훈춘에서 한 달가량 머문 뒤, 만주 여행길에 올랐다. 헤이그 밀사 이상설은 안중근을, 항일 명장 홍범도는 안창호를, 아나키스트 이회영은 한용운과 김종진을, 북로군정서를 창설한 서일은 김좌진과 이범석을,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은 남자현을, 의열단 김원봉은 이육사와 김산을 불러들였다. 아, 만주가 이런 곳이었구나! 아무라도 한 사람만 찾아가면 점조직처럼 수십 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주는 무엇보다 장총으로 무장한 독립군이 항일 전쟁을 펼친 자긍심의 무대였다. 독립운동사에 이마저 없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자화상인가.
만주는 또 고구려와 발해가 태어난 곳이다. 그 중심에 백두산이 자리했다. 고구려와 발해를 건국한 길림성은 두만강 유역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흑룡강성은 송화강 유역에, 항일투사들의 망명 루트였던 요녕성은 압록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23개의 성(省)과 4개의 직할시, 5개의 자치구로 구성된 중국은 만주를 ‘동북3성’으로 분류했다.
(…)
해방 전 만주국 지도와 중국 지도를 벽에 나란히 걸어두었다. 한 달여쯤 지나자 만주의 길목들이 하나둘 책상으로 모여들었다. 모든 역사는 완성을 만들어가는 글의 초고이자 각주라고 했던가. 십여 년 넘게 여행한 만주 이야기를 다시 쓰면서 겨울을 씨줄로 삼은 건 네 계절 중에서 겨울이 가장 만주(滿洲)다웠기 때문이다. 만주 여행은 눈 내리는 겨울에 떠나야 광활한 벌판을 만끽할 수 있다.
2021년 겨울 태백에서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나온 흔적(역사라고 하자) 중에서 끌리는 구석은 식민지였다. 나중에, 석양이 아름다운 나가사키에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식민지 속에는 내 그림자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고 짓밟힌 내 흔적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의 이국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보고자함보다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먼저 떠나고 싶은, 지나온 시간들을 더듬는 일이 그만큼 끔찍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많은 역사의 페이지 속에서 동변상련처럼 식민지에 발목이 잡혀 있었겠는가.
나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어제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나에게 나를 묻는 일이었고, 떠나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부려할 짐이 있었다. 돌이켜 보건대 나는 그런 이유 때문에 집을 떠났고, 이번에는 만주를 쏘다녔다. 광활한 만주 벌판이 보기에 좋았던 것일까. 2007년 여름에는 딸과 함께 연길, 룡정, 도문, 청산리, 훈춘, 백두산 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다녀오기도 했다. 다른 나라보다도 먼저 만주를 보여주고 싶었다.
만주 여행은 대구를 출발해서 심양―연길―룡정―도문―화룡―훈춘―량수―하얼빈―만주리―목단강―장춘―집안―단동을 거쳐 심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차를 탄 시간만도 100시간에 가까웠고, 하루 평균 20km를 걸었다. 조금 춥긴 했지만 만주가 준 교훈도 컸다. 자신을 향한 채찍을 소중히 간직하고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입보다는 손으로 말하고 손으로 소통하는 글쟁이다. 그 손을 빌려, 그동안 싸돌아다니며 들은 만주의 이야기와 그 풍경들을 내놓는다.
-「작가의 말」에서
한중수교 이후 ‘한국 취업 바람’은 조선족의 대이동을 불러일으켰다. 얼마 가지 않아 만주 조선족 자치주가 곧 해체될 거라는 풍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200만 조선족 중 40만이 한국에 나와 있으니 누군들 해체설을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주에 남겨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었다. 10년이 넘도록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면 과연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는 이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다는 생각, 아이들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가의 말에서
지난 해 3월 공저로 르뽀집을 발간한 뒤 1년여 만에 개인 르뽀집을 세상에 내놓는다. 기쁜 반면 우울하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터널 속에 갇혀 더듬거리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이웃들이 적지 않음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고물을 주워 생계를 꾸리는 노인들, 시간이 흐를수록 탄식만 는다던 농민과 비정규직 노동자들, 삼십 년 넘게 장터를 떠돌며 살아온 장돌뱅이들, 덤프트럭과 퀵서비스 기사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야 하는 일용직 노동자들, 몽골에서 만난 두 소년과 한국을 다녀간 조선족 등 네 해째 나는 이들을 만나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했고, 이들의 탄식과 눈물 젖은 목소리를 몇몇 지면을 통해 보고해왔었다. 돌아보건대, 이들의 탄식과 분노, 절망의 목소리는 불혹의 나를 바로 세워준 회초리이자 죽비이기도 했다.
문학의 위기론이 판을 치는 암담한 현실에서 최근의 시집들이 아닌, 낡고 오래된 시집들을 꺼내 다시 읽음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계단을 되밟아 내려가는 동안 나는 문학과 문학사의 경계를 만날 수 있었고 나보다 먼저 시를 쓴 선배들의 발자취는 밤잠을 설치게 만들었다. 문학사는 그만큼 자신의 몫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경험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한 방을 가진 홈런 타자는 아닙니다. 1루에서 2루를 훔치고, 2루에서 다시 3루를 훔치는 도루가 내 몸에 딱 맞습니다. (참고로 도루는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비루한 행위가 아님을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애초 공부를 목적으로 편입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아득바득 수업에 매달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중간역을 한참 지난 지점에 서 도루를 감행하듯 삥차를 얻어 타지 않았던가요. 난 그저, 이번 기회에 교복을 한번 꼭 입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남들보다 20분 빠른 등교는 커다란 행운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첫사랑이었을 겁니다. 어인실은 내게 책을 권할 때마다 떡밥으로 샌드위치를 싸 왔는데, 나로서는 차마 그 유혹 을 뿌리칠 수가 없었죠.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라디오도 피가 되고 살이 되어 주었습니다. 내 유식함의 팔 할을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가 주 유해 주었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니 빠삐용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네요.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먼이야말로 끝끝내 포기하지 말라는 질긴 메시지를 가슴에 콕 심어 주었으니까요.
청소년기를 거쳐 오는 과정에서 노래와 영화와 책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나는, 무사히 소외의 강을 건널 수 있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무척 힘들었을 겁니다. 그 무렵 나는 서울에서 멋진 깡패가 되고 싶어 안달이었으니까요.
지금도 내 기도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는 것 입니다. 누군가와 밤새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부자.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서로가 그리워질 수 있는. 해서 나는《운동장이 없는 학교》를 쓰면서 한없이 착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진추하가 부른 <One summer night>처럼 말이죠.
노래와 영화와 책, 그리고 봉천고등공민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안녕!
세상에는 한 인생을 망쳐놓은 꽃도 있엇음을 진즉에 경험한 터라 네 번째 시집을 선보이는 봄이 은근히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명색이 시인인데, 손바닥 싹싹 비벼가며 살 수 있겠나!
지상의 마지막 과제가 너무 버거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생명과 평화 사이에 이가 빠져 있었다. 애써 그것이 '평등'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21세기의 꽃 兩極花는 그렇게 되살아났고, 얼씨구 좋다며 춤을 추어댔다는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래서 또 부끄럽다,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