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었던 조선의 마지막 공주를 만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을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덧셈하는 법과 뺄셈하는 법, 그리고 글 읽는 법과 글 쓰는 법 등. 또 이런 것들도 있습니다. 강화도 조약이 몇 년도에 맺어졌는지, 청록파 시인들이 누구였는지, 조선시대 마지막 임금은 누구였고 그는 왜 조선의 마지막 임금이 될 밖에 없었는지…….
하지만 이런 것들 말고 누구와 친해지는 법이나 또 누구를 미워하는 방법, 아니면 누구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은 어디서 배웠는지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학교에서 책을 통해 배우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교과서에 ‘뭐 하는 방법’ 같은 내용은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아마도 이런 것들은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만나온 사람들을 통해 배웠던 것 같습니다. 친구를 통해서는 친해지는 법을 배웠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통해서는 보고 싶고, 그리워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 보려고 해도 우는 방법만은 어디서 배웠는지는 떠오르지를 않습니다. 우는 방법을 어디서 배웠는지를 생각해 보다가 우연히 덕혜옹주를 알게 됐습니다. 이미 100년 가까이 지난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는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 그대로 우리들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듬어 가면 갈수록 덕혜옹주가 살았던 날들은 일제강점기시대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보냈던 아픈 역사로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어렴풋이 ‘어떻게 우는 법을 배웠을까’하는 궁금증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만일 덕혜옹주가 살았던 그 세상이 눈앞에 놓이고, 덕혜옹주를 다시 만난다면 서로 마주보고 실컷 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리고 아픈 덕혜옹주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만 싶었습니다.
볼락이, 도다리, 멸치, 또 망둥이가 헤엄쳐 다니는 남해 바다입니다. 통영은 그 물고기들이 잔물결을 일으켜 간지럼을 태우는 바다 끝에 살짝 발목을 담그고 있는 조그마한 항구입니다.
그곳에 벽화마을로 많이 알려진 ‘동피랑’이 있습니다. ‘피랑’은 통영 사투리로 벼랑이란 뜻입니다. 그 말처럼 마을은 ‘꼬부랑 고갯길’을 오르는 ‘꼬부랑 할머니’의 굽은 등을 닮았습니다. 집들은 그 등에 찰싹 달라붙은 고둥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지붕 위에는 바다에서 나물 캐듯이 뜯어 온 미역이랑 청각이 하얗게 소금간을 피우며 꾸역꾸역 말라 갑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길로 이어진 골목길 중턱에는 목청 좋은 할머니 한 분이 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과자나 사이다, 콜라를 파는 구판장 앞에 놓인 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간섭입니다. 어른 아이 가리지 않습니다.
“때 빼고 광 내고 오데(어디) 가노?”
“놀로(놀러) 갑니더.”
“장고도 안 메고 놀로 가나?”
“장고를 오데 메고 다닙니꺼? 나는 배에 넣고 다닙니더.”
아저씨는 배를 복어 배처럼 앞으로 불룩하게 내밀어 ‘둥둥’ 소리가 나게 두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자리에 슬쩍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다른 할머니들의 웃음보도 터집니다. 할머니들의 웃음이 가라앉기도 전에 이번에는 힘없이 터벅터벅 가게 앞을 지나가는 초등학교 3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에게 말을 겁니다.
“영구 네는 얼굴이 우찌(어찌) 그렇노? 본께나(보니까) 또 시험을 망친 모양이네? 그래 평소에 놀지 말고 공부 좀 하지 그랬나?”
이처럼 동피랑이란 동네는 꼭 그 할머니가 아니더라도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속속들이 꿰차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 동네에 조금 살을 붙여 눈물이 ‘핑그르르’ 돌 정도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엄마 아빠가 자랄 때 소매 깃에 딱딱하게 굳은 콧물처럼 달콤 짭짜름하게 어린이 여러분에도 다가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