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다는 윤리학의 역사를 ‘지배’와 ‘복종’의 관점에서 다루면서 홉스로 대표되는 ‘군권적 권력설’과 둔스 스코투스로 대표되는 ‘신권적 권력설’을 구분하고, 그 둘 모두가 “외부 세계의 권위”(2편 6장)로서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지배력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외부적 권위를 통해서는 ‘선(善)’이란 무엇이고 어떤 상태이며 왜 행해야만 하는가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우리의 의지가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선, 즉 우리들 행위의 가치를 정하는 규범”이란 “오직 의식의 내면적 요구로부터 설명해야 하는 것이지 그 바깥에서 설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그런 한에서 “선이란 우리들의 내면적 요구 즉 이상의 실현, 바꿔 말해 의지의 발전ㆍ완성”인 것이다. 그때 선은 “자기의 힘”, 곧 자기/의지의 “위력”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교환양식A의 고차원적 회복이라는 가라타니의 대안적 교환양식론이 보편종교론과 합성될 때, 가라타니가 베버 종교사회학의 용법―“‘신 예배Gottesdienst’와 ‘신 강제Gotteszwang’의 구별”―을 빌어 ‘신[에 대한] 강제’의 계약연관을 무효화하는 ‘신 예배[모심]’의 힘을 선조(산인)에 대한 공양으로서의 야나기타적 고유신앙-보편종교론에서 확인할 때, 교환양식D라는 열린 X는 다시 한 번 신과 인간 간의 저 호수적 계약 연관과 그것의 절단이라는 적대의 문제계를 둘러싸고 다시 실험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 문제의식을 품고 이 책 ≪유동론≫을 읽는 각자는 가라타니적 ‘실험의 사학’ 곁에서 교환양식D/X라는 오래된 미래의 형질들 및 그것에 대한 사고실험의 목표들을 제각기 설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전후(?後)’의 출발선으로서 ‘1946년도’로부터 인용되고 있는 또 하나의 문장을 다시 인용하고 싶다. “‘속고 있었다’는 한마디 말의 편리한 효과에 빠져 일체의 책임에서 해방된 기분으로 사는 많은 이들의 안이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볼 때, 나는 일본 국민의 장래에 대해 암담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속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천연덕스레 아무렇지도 않은 국민이라면, 아마 이 뒤로도 몇 번씩이나 더 속아 넘어가게 될 터이다. 아니, 지금 이미 다른 거짓에 의해 속아 넘어가고 있음에 틀림없다.”(영화감독 이타미 만사쿠, ?전쟁책임자의 문제?) 1946년도의 전후 일본에 만연되어 있던(혹은 2020년도의 여느 국민들에게 퍼지고 있는) ‘속고 있었다’는 ‘편리’한 말. 달리 말하자면, 정신 패배의 무책임, 무책임의 안락, 안락의 위임주의. 이타미 만사쿠의 그 말에서, 헌법 9조를 둘러싼 해석/결정의 투쟁에 개입하는, 그 영속적 ‘전중(?中)’의 정세에 간여하는 말의 힘을, 정화된 말의 형질을 보게 된다. 그 말을 인용하고 있는 이 책-팸플릿이 말과 개념을 둘러싼 투쟁의 전장 하나를 개시하는 일에 ‘약한 힘’을 보탤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