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감히 세상에 평론집을 내놓는다. 시와 학문, 평론까지 문어발을 여러 군데 걸치고 있는 나로선 한 장르를 위해 전력질주를 하는 작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한 우물을 파도 문학적 평가를 제대로 받기 힘든 판에 여러 장르라니, ‘시인이 시나 쓰지. 왜 평론을 쓰나?’ 하겠지만 내게 평론은 시와 한 뿌리 속에서 발아된 열매이다.
평론을 접하게 된 것은 시가 가장 안될 때였다. 20대부터 소설만을 읽었던 내게 시적인 감수성과 감각은 무지의 도화지였다. 교과서적인 감각 외에는 기본적인 데생조차 할 줄 모르는 시 쓰기. ‘시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혼자서 읽었던 수많은 평론들은 내 시의 스승이자 평론의 스승이다. 선배 평론가들이 내 스승인 셈이다.
평론은 시와 소설과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시와 소설이 인간 존재와 실존적 양상을 재구성하여 창조해내는 것이라면 평론은 작가가 쓴 텍스트를 근거로 해서 읽는 이의 감수성과 경험, 지적인 상상력이 펼쳐지는 제2의 창작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물론, 의도하지 않은 심연의 의식이나 세계를 읽어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르이다. 인간과 사회를 읽어내는 새로운 프리즘이라 할 수 있다. 평론이 논문처럼 이론을 가지고 증명해나가는 것이었다면 나는 매료되지 않았을 것이다. 텍스트를 읽는 이의 감성과 내면화된 지식이 융합되어 생성해내는 새로운 시각. 내 몸에 새로운 눈이 달린 듯해서 정말 한동안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줄도 모르고 평론이라는 것을 내게 처음 부탁한 이가 박선희 시인이다. 서툰 글이라서 이 책에는 싣지 않았지만 『여섯째 손가락』의 서평은 내 평론의 종자(種子)이다. 평론에 관한 한 박선희 시인만큼 고마운 사람은 없다. 그 뒤로 10년 가까이 이어진 청탁은 그녀의 글이 아니었으면 없을 수도 있다. 평론은 내 의지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의 관심으로 낳은 희열을 피우는 한 그루 나무이다. 세상 잣대로 보면 비실비실한 열매들이지만 내게는 인간에 대한 심오한 사유를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생의 장(場)이었다.
이번 평론집은 오랜 시간에 걸쳐 쓴 만큼 한 가지 주제나 문제의식으로 집약되어 있지는 않다. 평소에 세계와의 동일성을 지향하는 시보다는 비동일성을 지향하는 시에 관심을 가진 탓인지 세계와 인간과의 불화에 많은 프레임이 맞춰지고 있다. 하지만 세계와 시적 의식과의 일치와 불화는 양날의 칼이다. 인간으로서의 의미와 올바른 실존성을 찾기 위한 목적지가 같은 다른 방향의 길이다.
제1부 「후각, 인공 사회의 저항 기호」는 후각적 감각과 관련된 인간 존재성과 사회적 실존성에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맞춘 글들이다. 인류의 사회·문화적 진화는 생활의 변화뿐 아니라 실존의 변화를 가져왔다. 본래적 인간의 정체성인 생물학적 존재성은 상징화되고, 기계화되어 이제는 정신마저 잡종화의 상태에 이르렀다. 인간에게 신체를 담보로 하는 생물학적 존재성 없이는 이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학적 존재성도 있을 수 없다. 이 두 존재성의 균형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할 수 있다. 특히 전자 자본주의로 인한 의식의 잡종화 현상은 감각 실종과 더불어 인간 실존을 상실하게 한다. 모든 것이 가공되어 존재성이 상실된 시대에 후각은 존재의 본질을 환기시키는 감각적 존재론의 기호이다. 인공화된 인간 실존에 대한 경종이며 기계화된 존재에 대한 제동이라 할 수 있다.
제2부 「현실에 응전하는 여성의 존재론」은 여성 시인들의 시를 비평한 글들이다. 세계와 여성들과의 불화는 이중의 타자 속에서 생성되고 있다. 여성에게 사회적 현실은 인간으로서의 타자이기도 하지만 그 현실이 남성들이 구축한 세계라는 점에서 페미니즘 관점에서의 타자이기도 하다. 그런 탓인지 현실에 응전하는 여성의 존재론은 양자의 측면에서 모두 시로 담론화되어 있다. 문명의 불모성이나 허위성에 저항을 하는 담론뿐 아니라, 모성적 특징을 강조하는 생태 윤리나 신체의 감각을 담론화한 시도 있다. 여성의 시적 담론이 이렇게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것은 이중적 타자와의 불화가 오히려 많은 담론을 생성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3부 「고뇌와 실존의 형상화 의지」는 남성 시인들의 시를 비평한 글들이다. 여성 시인들과는 달리 사회적 주체인 남성 시인들의 시적 담론은 실존성의 문제에 주로 전착해 있다. 남성들은 물질문명이 가진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나 부품화된 실존의 형상 또는 근원적인 생명의 현상을 담론화하기도 하지만 통각의 실존성이나 정치적 실존성, 운명론적인 실존성까지 다양한 실존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여성보다는 좀 더 사회적인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남성의 속성상 그들이 자리하고 있는 사회적 실존의 지점은 아주 중요한 코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넘어서는 영속적인 실존의 문제까지도 탐색을 하고 있다. 인간이 가진 다양한 실존의 양상을 볼 수 있는 측면이다.
제4부 「문명과 불화의 표정들」은 그동안 잡지에 쓴 계간 평을 모은 글이다. 그런 만큼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와 실존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이 글들을 보면 물질문명의 구조적 문제가 인간과의 불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실과의 불화로 인해서 생기는 가상 세계로의 도피적 심리, 허위적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서 생기는 엘리케이터의 실존성 등을 담론화한다. 이러한 것들은 기계가 주체가 되는 사회에서 상실되는 인간의 모습이다. 인터넷이나 SNS, 매체들 속에서 이미지화되어가는 상승 버튼은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는 허상이다. 인간에게 좌절감을 줄 뿐 실재의 실존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계문명은 통제되고 시스템화된 사회구조를 만들어 정신을 기계화한다. 문명과 불화하는 표정은 곧 우리 시대의 군상(群像)을 간파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