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일보다는 지나온 길을 반문하는 일이 그리하여 가위눌리는 일이 내겐 익숙하다. 얼마나 흔들리며 여기에 이르렀는가. 조금은 나아가고자 했으나 나의 삶이며 시의 발길은 여전하다. 이제 버리기 위해, 나의 시를 위해 이 시집을 묶고 이 시집을 버린다.
마흔이 넘어서도 이 따위의 시를 쓰다니.....
이 시집은 그에 다름아니다. 나는 이렇게 흘러왔다. (自序 중에서)
물론 나는 철학자도 구도자도 아니다. 내가 보고 듣고 말하며 풍경을 대하듯 대상의 그것들로부터 내 안에서 들고 일어나는 마음속의 소소한 느낌들을 일기장에 적듯이 쓰고자 했다. 어떤 이가 내게 "당신은 참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일기장 같은 것을 책으로 묶어 남에게 보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아, 저 사람은 세상에 내놓는 한 권의 책이 도도한 사유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순간순간 깨닫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삶으로 옮겨지거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전부인양 하는 것은 곧 거짓이요, 거짓된 삶을 살며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나에게 쓰는 편지요, 일기와 같다. 누군가 작은 위안을 얻어 세상이 조금쯤 맑고 따뜻해질 것인가, 혼탁을 더 할 것인가.
바오밥 나무에 내려온 별들이 유혹했다
사막이 자욱한 날들 바오밥 나무에 내려온 별들이 유혹했다. 앞마당에 왕마사토를 깔았다. 그때부터였다. 부르지 않아도 마땅히 그랬을 텐데 꿈꾸었으며 그 꿈을 같이한 이들과 마다가스카르 바오밥 나무를 여행했다.
바오밥 나무가 내 안에 메아리쳤다. 이명을 일으켰다. 속절없구나. 나는 충분히 바오밥 나무의 말씀에 병들었으며 이렇게나마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딱 여기까지다. 원고를 넘기며 쓸개를 뺀다. 재주 없는 문장을 탓한다.
원고를 넘긴 후 보낸 원고가 너덜거리도록 퇴고를 거듭했음에도 따뜻하게 지켜봐 준, 나 살고 있는 지리산 같은 품 안의 인내심으로 기다려 준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풍경이 있었다. 불편한 여행을 완주한 이들이 바오밥 나무에 내려오는 별들의 은하수, 그 별빛 초롱초롱한 아이들을 담아 더불어 책갈피를 빛내주셨다. 고맙습니다. 또한, 나눠드린 바오밥 나무 씨앗을 심고 키우며 아이들의 일기를 주신 얼굴을 떠올린다. 야~ 박봉남, 김태영, 강재현, 곽재환, 이현주, 박봉한, 이 이 고마운 이름들아~.
2024년 4월 심원재에서 박남준
돌아보는 영혼에 화끈거리던 열기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이 기억하리라
낯 뜨거운 시의 문을 언제 닫을까
그러나 또한 고쳐 생각한다
저만큼 재촉하는 바람의 시간이
탄식으로 눈 내리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으로
그늘 깊은 사막의 사구 너머
별들이 기다리는 바오밥나무 아래로
나를 이끌고 갈 것이므로
신파처럼 낡은 창을 열어 놓고 있네
지리산 자락 심원재에서
사십대에 내는 마지막 시집이다. 불혹의 얼굴이 궁금하던 날이 있었는데 어느새 반백의 머리칼, 오십을 지척에 두고 있다. 오십이 되면서 내 시가 좀 변해지기는 할 것인가.
어둡고 습한 모악산 외딴집에서 쓴 시들과 이곳 따뜻하고 환한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와서 씌어진 시들을 보태고 작년 생명평화 탁발순례 길에 쓴 시편 중 몇편을 덧붙여 엮었다.
시를 찾아, 시에 갇혀, 결국 여기까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