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겨울입니다. 문득 창밖을 바라봅니다. 지붕과 창문, 하늘이 보입니다. 저를 멀리서 지켜보는 또 다른 제가 창 밖 저 어딘가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창 안의 저는 좀 외로워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올해 첫날 누군가 저의 집 창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누굴까, 누굴까…… 제 손보다 작은 참새가 부리로 거실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참새의 방문이 아주 커다란 선물처럼 느껴져 오후 내내 행복했습니다. 저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집에서 보냅니다. 오후에 잠시 집 밖 천을 찾아가 산책을 하고 장을 보기도 합니다. 천에는 오리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오리가 좋습니다. 오리를 보면 웃음이 터져 나오고 행복합니다. 오리들에게 몰래 말을 걸기도 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오래된 음악을 듣는 사이 저녁이 찾아옵니다. 글을 쓰는 동안 제 옆을 지켜주는 저의 개들, 포그와 포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입니다. 부디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내 옆에 있으렴. 조금 있으면 저의 소중한 가족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불을 밝히고 저녁을 해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은 감자와 굴을 넣고 칼국수를 끓여야겠습니다.
고요한 제 집에서 정성껏 끓여낸 칼국수를 내놓는 마음으로, 이번 소설집을 내놓고 싶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제 소설집을 위해 애써주신 하성란 선생님, 황광수 선생님께 특별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묵은해의 마지막 날과 새해의 첫날에 그들을 만나러 갔다. 그 밤의 경숙, 마루 한쪽에서 국수 반죽을 빚던 그녀, 골목에서 주운 성경 속 족보를 필사하던 노인, 오리 뼈 고는 냄새가 진동하는 여름밤 누구든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그녀,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옥천을 찾아가던 정숙과 애숙, 그녀, 그…… 수년 전 어느 낮의 시간에 혹은 어느 밤의 시간에 혹은 낮도 밤도 아닌 시간에 박제돼 고정불변의 지리멸렬한 일상을 반복하는 그들 앞에서, 나는 아이처럼 울먹였다. 수년 전 그들을 생생히 만났을 때보다 그들의 인생이 더 깊이 들여다보여서였다. 그들의 슬픔도, 불안도, 고통도……
내 뒤늦은 울먹임이 그들을 위안하는 기도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국수』를 다시 펴낸다.
초판을 낼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병창 선생님의 발문 제목 ‘뿌리 뽑힌 자들의 비명’을 읽고 그것이 어떤 예견이었음을 깨닫고 놀랐다. 이병창 선생님께 새삼 감사를 올린다.
뒤돌아보는 시간을 보냈으니, 나는 다시 앞을 응시하며 나로부터 좀 멀리 떠났다 돌아와야겠다.
2022년 1월
김숨
길원옥 할머니는 빠르게 기억을 잃어가고 계십니다. 방금 당신이 드신 과일도 기억 못 하시는 할머니와의 대화는 그런데 처음부터 제게 특별한 즐거움과 문학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보름달이 뜬 밤, 영혼과 영혼이 야생의 들판에서 만나 이중창을 부르는 것 같은 황홀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할머니.
‘나를 사랑해야 너를 사랑할 수 있다’는 할머니.
형언 불가능한 고통스러운 생을 살고도, 인간 안에 선함이 있다는 것을 믿고,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할머니. (……)
할머니께서는 저를 소설가가 아닌 선생님으로 알고 계십니다. 문득 찾아와 쓸데없는 걸 묻고 또 물으며 당신을 못살게 구는 선생님.
가지 말라던, 그냥 당신 등에 붙어서 자라던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오늘도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현대문학상> 수상 소식을 빗속에서 들었습니다. 제 앞에 강처럼 아름답게 휘어진 길이 있었습니다. 빈 택시가 와서 섰고, 저는 택시에 올랐습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습니다. <현대문학상>이라…… 처음 소설을 쓸 때 생심은커녕, 멀고 먼 저 세상에나 존재하는 줄 알았던, 저 세상의 특별한 소설가들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줄 알았던 상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간신히 오른 18시 30분 서울행 고속버스 안에서 “몰라, 몰라, 몰라…….” 혼잣말을 강박적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상하게 부끄러워 머리까지 발작적으로 내둘렀습니다.
답이 없다는 것은, 답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간이란 건 어쩌면 감탄이나 한탄, 절규 같은 즉발의 감정으로만 정의 내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닐까요.
단아하고 기품 높은 상을 수상할 수 있는 영광을 제게 허락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양숙진 주간님께 두 손 모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의 수상이 사랑하는 제 가족과 문우들에게 격려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변변찮은 저를 늘 최고의 소설가로 대우해주고 격려해준 김도언 문우께 수상의 기쁨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에 소설이란 게 있어서 다행입니다. 진실하게 쓰고,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겠습니다.
신작로 위에서, 저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처음으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가, 소설을 쓰다가 문득문득 신작로를 떠올려보곤 합니다. 노란 흙먼지가 부글부글 들끓는 신작로를요. 신작로가 제 머릿속에 펼쳐지는 순간, 저는 이상하게도 눈이 멀고 귀가 먹는 듯 그렇게나 외롭고 까마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여자아이가 되어서는, 신작로를 홀로 걷고 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고개를 가만히 수그리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한때, 저는 버스를 타고 신작로를 꽤 달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마을에 살았었습니다. 흑백사진처럼 아주 오래된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금방이라도 폭삭 주저앉을 듯 위태로운 집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들마다에는, ‘목숨’을 가장 두렵게 여기는 오래된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물론 이발관도 구멍가게도 방앗간도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바보 같고, 죄인 같고, 또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사람들만 같았습니다. 마치 흑백사진 속의 얼굴이 닳고 지워진 사람들처럼요…… 누군가 애써 기억해내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지고 말 사람들처럼요……
저는 신작로를 따라 그 마을에 들었고, 또 신작로를 따라 그 마을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마을도, 그리고 그 마을의 오래된 사람들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제가 잊고 살아가는 동안 그들 중 누군가는 죽고, 또 누군가는 마을을 떠나버렸으며, 또 누군가는 몹시도 늙어버렸다는 것을 모른 채로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였을까요. 저는 그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가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을요. 바스러진 그들의 얼굴을 원래대로 복원해내고 싶은 마음을요…… 왜냐하면 그 마을과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진첩 속에 소중히 간직되어 있는, 우리가 쉽게 버릴 수 없는 풍경이자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마을을 다시 찾아가기 위해, 저에게는 ‘동화’라는 여자아이가 절실하게 필요했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그 마을에 사는 동안, 저와 함께 신작로를 한없이 내달렸을지도 모르는 그 여자아이가요.
저처럼, 이 세상 어디에선가 ‘아름다운 죄인들의 얼굴’을 품고 살아가고 있을 그 여자아이…… 이 소설이 그런 이에게 위안과 용기가 되기를, 오늘 밤 저는 바라고 또 바랍니다.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다보니, 저기 한 소년이 흑문조의 다리만큼 가느다란 골목을 걸어갑니다. 저 소년은 빈 택시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소년일까요? 아니면 조금 뒤 빈 택시에 오를 소년일까요? 한 포대의 시멘트로 빚은 달은 골목을 환히 밝히기에는 너무 차갑고 멀리 있습니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 저는 빈 택시에 소년을 태워 떠나보낸 적이 있습니다. 소년이 택시에 오른 뒤에도 ‘빈 차’ 표시등에 들어온 빨간불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물』을 쓰는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물에 사로잡혀 살았다. 저 먼 기억 속 저수지에 고인 물을 떠올리려 애썼고,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을 포착하려 했고, 쌀알만 한 물이 말라 없어질 때까지 멍하니 들여다보기도 했으며, 물 속에 벌거벗은 몸을 담그고 오래오래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했다.
(……)
물에 꽤 오래 사로잡혀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물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불과 소금과 공기와 금, 그리고 납에 대해서도.
그런데도 『물』 초고를 쓰는 동안 그리고 마지막 퇴고를 하는 동안, 이상한 들뜸 속에서 내내 불안하고 행복했다.
(……)
내가 쓸 수 없는 것,
내가 부득불 쓰고자 하는 것,
내가 쓰고는 싶지만 남들이 이미 써버린 것,
내가 쓰고자 하면 잘 쓸 수도 있을 같지만 써서는 안 된다고 짐작되는 것,
내가 단 한 편이라도 쓰고 싶은 것,
시詩를 쓰고자 했던 내 욕망에 조금이라도 가 닿는 것,
그런 것들을 고민하는 동안 '백치들'은 완성되었다.
대부분을 연필로 쓴 소설이기에 애착이 가고 또 그만큼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견디는 것은 전적으로, '백치들'을 불러낸 내 몫일 것이다.
한때는 꿈속에서조차 증오했지만, 내 슬픔과 독毒을 키운 이들이 백치들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태도 백치들의 허술한 구두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불편한 것 또한.
세상의 모든 백치들에게 한 줌의 소금 같은 축복을!
마부위침磨斧爲針. 당나라 시선 이백이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고 있는 노인을 보고 감동해 다시 정진했다는 이야기를, 새해 벽두에 들었습니다. 노인이 이백에게 말했다지요. “얘야, 비웃지 마라. 중도에 그만두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 도끼로 바늘을 만들 수 있단다.” 노인의 믿음을 저의 믿음으로 다짐하고 일어서는 찰나에 수상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기쁨과 함께 불안이 밀려들었습니다. 더럭 겁이 났습니다. 모두가 힘든 때 제게만 축복이 주어진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앞서 수상하신 모든 선생님들께, 독자들께 부끄럽지 않도록, 조용히 눈 감고 노인의 믿음을 다시금 새깁니다.
연초 김동희 선생님과 만났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신데, 더 나빠지시기 전에 할머니의 삶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간곡한 바람을 제게 털어놓았습니다. 20년 가까이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동고동락하며, 그분들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했던 권리와 존엄성 회복을 위해 성실히 활동가로 살아온 그녀였습니다. 자신에게 피를 나누어준 친할머니가 편찮으시기라도 한 듯 그녀는 눈과 코가 빨개지도록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증언 활동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해오신 할머니께 서 지금껏 들려주지 않으셨던 이야기를 끌어내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보자, 김동희 선생님의 눈가장에 고인 눈물을 바라보며 저는 약속을 하고 말았습니다.
처음 찾아뵌 날, 할머니는 항암약을 드시고 홀로 누워 싸우고 계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와 영혼과 기억과…….
2018년 여름, 일본군 ‘위안부’ 김복동 할머니를 찾아뵈며 증언소설을 쓸 때였습니다. 전쟁 성폭력 피해자인 할머니께서 현재 전쟁 폭력 피해자인 아이들과 여성들에게 연대의 손을 내밀며, 그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마음을 다하시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일본군‘위안부’로 동원돼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복된 이름을 잃고 군인들이 지어준 이름들로 불리다, 아이를 갖지 못하는 몸이 돼 집에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단체 다에시(IS)에 가축처럼 납치돼 (손에 칼을 들고) 끔찍한 군사 교육을 받고 그로 인해 악몽에 갇혀버린 야지디족(이라크 북부에 주로 거주하는 소수 종족) 소년과 김복동 할머니와의 만남은, 그즈음 제게 자연스럽게 떠올라 한 편의 동화가 돼주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를 기억하며, 전쟁 폭력에 노출돼 고통받고 있는 소년 소녀들의 해방과 평화를 빌며, 황미선 작가님과 함께 《아이와 칼》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깃털, 보푸라기, 부리, 입, 존귀, 욕조…….
오늘 제가 마음속에서 알을 품듯, 가만히 품었던 말들입니다.
새알일 수도, 전등알일 수도, 쌀알일 수도, 팥알일 수도 있는 알 같은 말.
그리고 욕조 물속에서 중얼거린 말.
아파…… 아파…….
어쩌면 저의 마른입을 빌려 그녀가, 그녀들이 중얼거린 말.
오늘 밤 꿈에서 그녀를 만나면, 그녀가 누구든 “당신은 존귀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감히 ‘존귀함’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철선의 완성을 위해 평생을 노동에 힘쓰는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쓰고 싶었다. 오로지 철선의 완성을 위해 도구처럼 쓰이다가, 마모되고 쓸모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노동자들에 대해. <철>은 그런 욕심에서 시작되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내가 거주하는 공간의 모든 門들은, 내가 '밖'에 존재할 때가 아니라 내가 '안'에 존재할 때 비로소 그 역할을 다해낸다. 나를 낯선 자들로부터 격리시킴으로써.
홀로 남겨진 공간과 시간,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공포가 몇 편의 소설을 쓰게 했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 소설들이 묶였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자면, 홀로 집을 지킬 때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낯선 자들 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낯선 자들만큼이나 고독도 두려워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그리고 소설을 놓지 않는 한 불가피하게 견뎌야만 하는 고독을.
위안부는 피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한국 여성의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끔찍하고 황당한, 또한 치욕스러운 트라우마일 것이다.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은 그 자체로 트라우마’라고 프리모 레비는 말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을 시작으로, 피해자들의 증언이 지금까지 어어져오고 있다. 그 증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
그 와중에 한국과 일본 양 정부는 ‘사실 인정과 진정한 사과’라는 절차를 무시하고, 피해자들을 저 멀찍이 구경꾼의 자리에 위치시킨 채 일방적인 ‘2015년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다. 일본 정부는 ‘10억 엔 정도의 지원금을 출연할 테니,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암묵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 중 한 분인 훈 할머니 말씀처럼 “개나 고양이만도 못한” 시절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기품과 위엄, 용기를 잃지 않은 피해자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감탄하고는 한다.
내 할머니이기도 한 피해자들이 행복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부족한 소설을 세상에 내보낸다.
이 소설 역시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밝힌다. 온전히 기억에만 의존해야 했던 그분들의 증언을 수십 년 전부터 곁에서 도왔던 분들께도.
작가의 말을 쓰는 오늘도 한 분이 돌아가셔서 생존자는 이제 스물일곱 분이다.
아직 살아 계신 분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지난 2년 사이에 돌아가신 분들의 얼굴도.
10대 때 한 여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훼손당한 그분들의 생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울컥해진다.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그분들의 한결같은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조심스럽게 이 소설을 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