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요한복음 3:16, 요한일서 2:2, 디모데전서 2:6 등 쉽고도 단순한 성경 말씀이, 신비를 전수받은 사람들이 신비스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실이 아니라는 가정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하며 번민했다. 왜냐하면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선택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진리 때문에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반 세기 전에, 그때 당시 친구였던 고(故) 호레이셔스 보나르(Horatius Bonar) 박사가, 이상하게도 만연해 있던 그런 오류에서 나를 구해 주었다. 그는 우리의 제한된 지각으로는 무한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진리들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이해하는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거룩한 성경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방해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선택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오용함으로써 제기된 난제를 회피하려는 그럴듯한 시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합당한 신비가 우리 존재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의지가 있는데, 이 의지로 우리는 우리가 좋을 대로 이쪽으로 돌이킬 수도 있고 저쪽으로 돌이킬 수도 있으며, 선을 행할 수도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참으로 불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행동의 결과를 고찰해 볼 때 하나님의 손길을 인지하게 된다. 그 행동의 결과들이 심각할 때만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주께서 명백하게 가르친 바와 같이 제비 한 마리가 떨어지는데 있어서도 그분의 주권이 관여하신다.
이런 모든 사실은 재림의 약속과 상관관계를 갖는다. 사도 시대에 성도들이 주님의 오심을 그들 생애에 실현될지도 모르는 소망으로 여겼다는 것은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이제 불신자들은 그 믿음이 완전한 실수였다고 주장하며, 우리에게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택함받은 자들의 수”가 완성될 때까지는 주께서 오실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1:4는 B.C. 4004년 이전의 어떤 시대에(“세상의 기초”를 세운 시기가 언제이든지 간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 자들로 정해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20세기까지 “택함 받은 자들”의 수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는 그 어느 때에도 재림이 일어날 수 없었으며, 이 약속이 성취되기 전에는 30세기라도 도래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을 설명하고자 하면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과 대면하게 된다(벧후 3:8). 그러나 진정 천 년이 새겨진 눈금판으로 된 천상의 시간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것은 시편 90:4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원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는 말과 관계된다. 그분의 심판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영원은 제한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특별한 단어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이 때로는 제한된 의미에서 사용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런 식의 변명을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반드시 내가 속히 오리라』(계 22:20). 『조금 있으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히 10:37). 이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부차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다. 이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말씀의 진리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런데도 이 말씀들이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이렇듯 당혹스러울 정도로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책에서 제시된다. - 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