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쓴 글들을 오랫동안 돌보지 않았다. 90년대 중반경부터 내가 쓴 글이 보기 싫어진 때문이었다. 발표한 글은 다시 보기가 싫었고 덩달아 새로 글을 쓰는 일은 힘들어졌다. 글을 쓸 때마다 글의 정직성에 대한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내가 쓴 글이 나를 향한 칼날로 돌아오는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써놓은 글은 방치되었으며 글을 쓰는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 시기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아니 쓸 수가 없었다. 힘 있는 주장은 뒷받침할 용기가 없어서 죽이고, 과격한 형용사는 감정이 노출된 것 같아서 빼버리는, 일견 사소한 일들이 끊임없이 글의 진도를 방해했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언급은 문학의 본질에 어긋난 증오의 길을 걷는 것 같아서 피하고, 애매하게 얼버무리는 언급은 비겁하게 사는 내 모습 같아서 피하다보면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나는 언제나 정직하지 않았다. 글쓰기는 바로 괴로움이었다.
내가 문학책보다 다시 역사책을 더 열심히 읽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인간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역사를 열심히 읽은 것은 역사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품위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어서였다. 나의 한심함과 나약함,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호오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며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해 시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일상의 역사에 대한 이 책 저 책을 읽었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이라고 붙인 것은 이런 사정과 관계가 있다. 인문학의 정신이 우리의 영혼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인간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넓히는 데 있다면, 나는 인문학의 정신에 충실한 글을 쓰고 싶고 나아가 충실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담아 제목을 그렇게 붙인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이 제목에 합당한 내용이어서 정한 것이 아니라 제목에 미달하는 까닭에 붙여본 것이다. 글쓰기가 즐거워질 것이라는 희망으로라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