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 시인의 말
이제는 가끔씩 꿈에나 보이는 외할머님, 그 애틋한 사랑의 기억 하나로 저는 살아 있습니다. 평화시장, 그 새벽 도깨비시장에서 당신이 사주시던 해장국의 온기로 첫 시집을 엮습니다.
1997년 11월
박정대
개정판 시인의 말
나의 시는 여전히 고독과 침묵의 식민지
1997년 가을~2020년 가을
박정대
강원도에는 가을이 많다. 겨울은 더 많다. 그리고 밤하늘엔 겨울보다 더 많은 별들이 있다. 그 동안 내가 쓴 강원도에 대한 시들을 보며 나는 본질적인 삶에 대하여 오래도록 생각했다. 생각의 한가운데로 별들이 총총 떠오르고 있었다. 별빛 아래 놓인 강원도를 생각했다.
“너무 많은 커피! 너무 많은 담배! 그러나 더 많은 휴식과 사랑을! 더 많은 몽상을!”(「체 게베라가 그려진 지포라이터 관리술」)
왜 갑자기 이 시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삶이란 모르는 것투성이겠지만, 이제사 이것만은 알겠다. 강원도엔 삶이 많다. 본질적인 삶이 많다.
숨 쉬는 것조차도 정치적 행위가 되어버리는 이 땅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하나의 '고요한 혁명'임을 깨닫는 아침입니다. 지금 한국의 시가 사춘기라면 제 시는 아직도 전생前生이겠지요. 그러나 시를 쓰면 보여줄 수 있는 도반道伴들이 있어 조금은 행복해져도 될 듯한 시간입니다.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는 아프리카의 민속 악기다
은델레 기타는 3줄, 이낭가는 8줄이다
은델레 기타는 너무 작아서 거기에서 무슨 소리가 날까 싶다
이낭가는 시인이 노래하거나 시를 읊조릴 때 반주 악기로 사용했다 한다
여기에 모아 놓은 44편의 시들은 어쩌면 은델레 기타와 이낭가를 연주하는 그대를 위한
나의 소박한 읊조림 같은 것이다
바라건대, 나의 읊조림이 그대 생의 기슭에 밀물처럼 고요히 스며들 수 있기를
거칠게 말을 달려 여기까지 왔다
말은 지치고, 허공엔 눈발이
눈발 사이로는 허공이 가득하다
검은 벨벳 옷을 입은 까마귀가 물고 온 이절의 어둠이다
어둠 속에서는 누군가 혁명처럼 담배 한 대를 피워 문다
호롱불처럼 돋아나는 저녁이 여기 있으니
혁명아, 한 사나흘 쉬었다 가자
2023년 3월, <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