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중독을 부른다. 중독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을 정도로 한국인은 극단으로 밀고 들어가는 걸 사랑한다. 한국인의 '일중독'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발전을 가능케 했지만, 모든 중독이 그런 축복만 가져다 준 건 아니다. 스트레스, 음주, 섹스, 자살 등 세계 최고 수준의 기록들은 한국인들에게 "왜 사니?"라는 원초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나는 이 책 전반에 걸쳐 '글쓰기로 세상보기'를 하는 즐거움을 자주 역설하겠지만, 이 책을 잡은 독자들에게 당장 문제가 되는 건 '글쓰기의 고통'일 게다. 뚜껑을 열자. 장담하지만, 얼마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그 다음에 반드시 찾아오는 건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선 글쓰기는 당신의 꿈과 직결돼 있다는 걸 인식하는 게 필요하다.
몇 년 전 어느 토론회장에서 언론운동과 관련된 주제발표를 맡았던 필자는 한 고등학교 교사로부터 가벼운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언론과 대중문화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그 관심을 시민운동의 차원으로 발전시켜 보겠다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청소년들을 외면한 채 전문가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여 글을 쓰고 말을 하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는 꾸짖음이었다.
'역사로서의 대중문화론'에 관심을 갖다보면 대중문화의 영역과 주도권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는 걸 절감할 수 있다. 대중문화의 산업적 규모가 커지면서, 아니 대중의 일상적 삶의 '대중문화화'가 이뤄지면서, 이제 대중문화는 몇 가지 대중문화 매체에만 국한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생산 영역도 전통적인 대중문화 종사자들의 손을 벗어났다.
나는 앞으로 이 책의 속편을 계속 낼 생각이다. 글쓰기 특강을 계속할 생각이니까 말이다. 한 권으로 모든 걸 압축할 수는 없는가? 나는 그게 말이 안 되는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책 한 권 달랑 읽고 글쓰기 능력에 있어서 뭐가 달라질 수 있다고 기대하는 건 '도둑 심보'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글쓰기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선 '질'은 기본이고 '양'이 전제되어야 한다. 땀을 많이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땀을 흘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하는 분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쿨은 비교적, 상대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좋다. 비단 사람들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다. 비교적 젊은 세대가 '쿨'을 선호한다고 볼 수는 있지만, 세대를 초월하여 '쿨'한 사람과 '쿨'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보는 게 옳다. 기성세대는 '쿨'과 거리가 먼 것 같지만, 사람에 따라선 오히려 나이가 먹을수록 '쿨'해지기도 한다. 우리 시대에 높은 인기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라. 대부분 '쿨' 계열의 사람이다. ...쿨의 스펙트럼을 놓고 보면 한쪽 끝엔 냉소주의, 허무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반면 그 반대편 끝엔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개인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정치개혁과 관련하여 시민운동단체들이 표출한 공적인 분노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걸 과도기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그건 '집단적으로, 크게'하는 분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게'하는 분노가 우리 모두의 일상적 삶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어느 신문의 주필이 정말 파렴치한 칼럼들을 써대면 그 순간 분노해 그 신문을 끊어버리는, 그런 실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집단적으로, 크게'하는 분노는 그런 진정한 의미의 분노가 아니다 . 다수의 합의에 의한, 전략적인 분노다. 그래서 시민운동단체들은 그간 언론에 대해선 이루 말할 수 없이 비국한 태도를 취해왔다. 나는 시민운동단체들의 그런 형태에 대해 분노한다. 내가 별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이 책은 그런 '오만과 편견'에 근거해 월간 [인물과 사상]에 썼던 글들을 모아서 만든 것이다. 모두 23편의 글이다. 대부분 '분노에 우ㅢ한 글쓰기'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월간 [인물과 사상]이 너무 뜨겁다고 근처에도 오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 조금 접근해보겠다는 뜻으로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다.
세계문화를 이해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선 긴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대외의존도가 70%가 넘는 나라에 국제뉴스를 전문으로 하는 신문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한국 사회가 과도한 내부지향성을 갖고 있다는 걸 개탄하는 게 옳을 것이다.
사회적 에너지와 자원의 대부분이 내부의 '밥그릇 싸움'에만 바쳐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미국처럼 대외의존도(19.5%)가 낮은 나라의 이론이 국내에 수입돼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져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 민주화 역사는 있어도 민주화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는 없다. 우리는 소통의 과정을 무시한다. 물리적 폭력의 동원 여부라고 하는 차이만 있을뿐 소통의 독선에 관한 한 독재정권과 민주정권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사회적 갈등과 분열의 폭발을 민주주의의 축복인 양 미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사회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소홀히 한 저주인지도 모른다.
... 한국의 정권들은 '원조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이전 정권들과 차별화하는 데에만 골몰한다. 그러느라 이전 정권의 경험을 무시한다. 똑같은 유형의 과오가 반복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더욱 흥미롭고 놀라운 건 언론과 시민사회도 정도는 덜할망정 과거로부터 배우는 데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왜 그럴가? 이게 바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다.
다른 분야의 학문이 그런 문제들을 다루면 모르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나친 학문 분업 체제로 인해 공중에 붕 뜬 채로 남아있는 게 바로 커뮤니케이션 문제다. 언론 학도들이 그 일을 다도맡아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전공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자극을 줄 수는 있지 않을까?
'오버'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이 책도 '오버'의 산물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런 자세를 가질 때에 비로소 상호 소통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버'하지 않고 살기는 어렵다. '오버'냐 아니냐 하는 판단 기준은 늘 현실에서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수준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현실이 크게 잘못된 것이라면 '오버'는 불가피하다. 그런데 그 현실 판단이 쉽지 않다. '오버'의 적정 수준을 가늠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나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우리 삶에서 '오버'는 때로 불가피할 망정 그에 대한 자의식을 가져 보는 게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나의 문제의식을 많은 분들이 공유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
한국에서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 연구는 다른 분야에 비해 비교적 발달돼 있지 않다. 왜 그럴까? 높은 인구밀도와 특유의 정(情)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게 인간관계일 텐데, 왜 그 연구가 인기를 누리지 못하는 걸까? 인터넷을 봐도 그렇고 휴대전화를 봐도 그렇고 한국인은 늘 인간관계에 굶주린 사람들이 아닌가?
바로 그 질문 속에 답이 있다. 인간관계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국민이 다 전문가다!' 인간관계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지식은 '생존 처세술'로 국민 모두의 '암묵지(暗默知)'로 발달돼왔으며, 매우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개인 차원의 암묵지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지식은 사회적 차원의 분석으로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이거 이대로 좋은가?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의 산물이다.
우리는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한 세대를 살아왔다. 이제 군사독재 정권은 사라졌다. 그러나 과연 모든 게 다 사라진 걸까?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에게 길들여진 게 없단 말인가? 고통의 상처도 말끔히 씻어냈단 말인가? 우리 자신을 자세히 살펴보자. 군사독재 정권은 여전히 우리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좀 완곡한 어법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마음속엔 권위주의 체제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는 '조선일보 공화국'이다. 조선일보가 이 나라를 먹어 삼켰다는 뜻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볼 수 있는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건 더욱 근본적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정의로운 응징이 없는 한국 사회의 풍토가 낳은 산물이다. 앞으로도 조선일보의 번영은 계속될 것이다.
일반 대중은 '소비 동물'로 전락한 가운데 신문의 이념이나 도덕성을 따지지 않는다. 그냥 '볼거리'만 있으면 좋다는 거다. 나름대로 의식이 좀 있다는 지식인들과 시민사회 단체들조차 언론플레이와 개인플레이에만 미쳐 있다. 그들의 의식과 가치에 반하거니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신문을 응징할 길이 원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나라는 '조선일보 공화국'이라는 것이다.
이미 충분히 시사했지만, 이 책은 '내부식민지'의 책임을 중앙에만 묻지 않는다. 오히려 지방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더 비중을 둘 것이다. 그리고 모든 주요 이슈들을 포괄할 것이다. 역설 같지만, 지방이 지방을 잘 모른다. 이 책의 우선적인 목적은 지방이 지방을 알게끔 하는 데에 있다. 중앙과 지방 사이에 단절되거나 왜곡된 소통을 활성화시켜 보자는 뜻도 있다. 모쪼록 이 책을 통해 지방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분들이 많기를 바란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걸 믿는 사람들이, 왜 인간은 두발로 '사회'와 '개인'의 두 축에 서 있다는 걸 믿지 않거나 그 믿음을 실천하지 않는가? 이제 우리는 처세술에서 이기주의의 냄새만을 맡는 기존 습속에서 벗어나 앞 다투어 '공공적 처세술'의 영역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이 세상이 각자의 생존과 성장을 위한 치열한 각개약진 전투로 더 살벌해지기 전에 말이다. ('왜 '공공적 처세술'은 없는가?' 중에서) - 강준만(엮은이)
누군가는 "한국은 축구다"라고 햇다. 독일이 그걸 흉내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일은 '2006월드컵'에 임하면서 "독일은 축구다"라고 했다.
나는 축구는 한국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그 말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의미가 좀 다르다. 한국보다 축구를 더 잘하는 나라는 다 자기 나라가 곧 축구라고 주장하겠지만, 축구가 한국이라는 건 한국이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뜻이다. 물론 그러한 의미 부여는 축구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