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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이야기의 급류에 속절없이 휩쓸려 가고 있다는 감각. 고서점과 세상에 단 한 권 남은 책과 미스터리와 몰락한 귀족의 저택과 고풍스러운 바르셀로나의 거리가 주술처럼 뒤엉킨 이야기의 소용돌이 속에 그저 몸을 맡긴 채 밤낮으로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그런 마력을 가진 책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읽힌 활자는 흩어지고 어느새 이미지만이 남아 사방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매혹의 경험.
시간이 흘러 <바람의 그림자>에서 소년이었던 다니엘은 아버지가 운영하던 고서점을 이어받았고 그를 꼭 닮은 아들을 그가 애타게 찾던 작가, '훌리안'으로 이름지었다. 그리고 또다른 한 권의 희귀본 <영혼의 미로>는 다시 모두를 잊힌 책들의 묘지로 이끌며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워온다. 기억과 비밀, 겹겹의 안개에 가려진 스페인의 근대사가 남긴 어둠.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속에 스며든 인물들에겐 어떤 운명이 당도해 있을까.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남긴 마지막 소설로 '잊힌 책들의 묘지'의 세계가 막을 내린다. “이야기에는 들어가는 문만 있을 뿐 시작도 끝도 없다”는 소설 속 문장을 기억하며, 문학에 바치는 그의 마지막 헌사에 경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