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여긴, 소설 원고 안인 거군.’
5년차 (전)편집자 김정진은 생각했다.
‘…근데 굳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나?’
집도, 가족도, 친구도 없고 어제부로는 직장도 없는 곳으로?
‘어차피 돌아갈 방법도 모르잖아.’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물에 빠져 지친 몸은 따듯한 이불 속에서 금세 노곤해졌다. 김정진은 다시금 까무룩 잠으로 빠져들었다.
데르니에 대륙 알비온 왕국, 수도 룬데인의 왕립수도방위대 부설학교 기숙사에서.
그곳은 (전)편집자 김정진이 어제까지 검토했던 소설 원고 <알비온 왕국의 왕자>의 배경이었다.
원고 속으로 (1)
오 년간의 직장생활은 허망하게 끝났다.
주로 거래하던 도매상이 도산한 탓에, 고작 직원 넷 뿐인 역사서 전문 출판사는 부도난 어음쪼가리만 들고 동동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책이 안 팔려 근근이 버티던 차였다. 사장은 아예 출판사를 폐업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은 마지막 회식이었다.
“우리 김정진 편집자가 이제껏 수고가 많았어.”
“아닙니다, 사장님.”
“온갖 궂은일을 다 도맡아 하고.”
여길 나가면 갈 데가 없으니까.
당장 한 달이라도 월급이 끊기면 안 됐으니까.
편집자라고 하면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직업이지만, 실상은 저자의 시다바리에 가까웠다.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동떨어진 직업이었다. 저작의 주제와 방향을 바꿀 만한 대단한 권한 같은 건 없었다.
주석 한 개 빼고 원어병기 세 개 삭제하자고, 저자에게 읍소하는 메일을 보내고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덕분에 속으로 욕을 해도 웃는 낯 하는 법은 아주 제대로 배웠다. 지금도 요 조그만 노인넬 후려치고 싶지만, 퇴직금 못 받을까봐 참는 중이었으니까.
“오히려 제가 사장님 덕에 일을 많이 배웠지요.”
“저자들도 늘 자넬 칭찬했어. 일 꼼꼼히 한다고.”
“제가 뭐 특별히 대단한 일을 했다고, 좋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하고 말이야.”
일처리가 맘에 안 드니, 유도리가 없니 면전에서 비꼬던 사장이 한 입으로 세 말을 한다. 술 마실 때만 다정한 게 사장의 술버릇이었다.
‘뭐 됐다. 이제 끝이야.’
술집에 틀려 있는 텔레비전에선 핵 재무장이 어쩌고 하는 뉴스가 이어졌다. 이럴 땐 그냥 세상이 망한들 어떤가 싶었다.
무거운 분위기의 술자리는 소주를 몇 병이나 비운 뒤에 파했다.
밤은 늦고 답답한 마음은 안 가셨다.
정진은 강북의 회사부터 집까지 무작정 걸었다. 사당동 언덕 꼭대기, 몇 년이나 살았던 옥탑방을 향해.
집주인이 재개발을 기다리며 묵히던 물건이라 세가 엄청나게 저렴했지만, 그만큼이나 낡고 불편했다.
그마저도 곧 퇴거해야 한단 연락을 받았다. 차일피일 미뤄지던 재개발이 다가온 탓이다.
‘거길 나오면 어디로 갈지.’
서울엔 어른이 되어 혼자 올라왔다.
고등학교 때까진 어촌 마을을 떠돌며 자랐다.
어떻게든 시골을 떠나려고, 문과 중에서도 비인기 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평생의 운은 대학 입학 때 다 쓴 것 같았다.
그 후론 일하고 학교 다니고 일하고.
오 년 전 태풍이 왔을 때, 양식장을 손보다 머릴 다친 어머니 병원비를 대고.
몇 년 동안 병석에 계시다 홀연히 가신 어머니의 병원비는, 학자금 대출을 안고 있는 사회초년생이 감당하기에 벅찬 액수였다.
아버지는 김정진이 세 살 때 외항선에서 돌아가셨다. 동생은 어릴 적 저수지서 놀다 잃었다.
인생 내내 좋은 일이라곤 없었다.
온갖 잡생각에 휩싸여 걷는 동안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동작대교 인도로 기어올랐을 땐 이미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이었다.
건너편으론 강의 남쪽. 아파트 숲이 빽빽한 가운데 집 한 칸 없는 처지가 씁쓸했다.
그리고선 얼마나 지났는지.
드르르― 드르르―
그만 멍때리라는 듯이 울어대는 핸드폰 진동에 김정진은 정신을 차렸다.
업무 메일 계정의 알림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는데 누가 보낸 거야.’
[RE: RE: RE: RE: 투고 원고 재중]
[안녕하십니까, 김정진 편집자님.
무사이입니다.
일전의 요청에 긍정적인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원고를 개정하는 작업에 참여해 주신다니 꼭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쓰는 원고는 <알비온 왕국의 왕자>의 <최종고>가 될 겁니다. 이 이야기를 완벽한 형태로 끝내는 것이 제 필생의 목표입니다.
편집자님이 함께해주시면 2부 역시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이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원고 투고자의 뜬금없는 답 메일이었다. 메일을 본 정진은 술이 확 깼다.
“아니 내가 언제 도와준다고 했어?”
.
.
.
김정진이 ‘무사이’란 저자에게 첫 번째 메일을 받은 건 지난 주 금요일이었다.
폐업이 다가오자 오히려 일이 넘쳐나 연일 야근이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번역서 라이센스 정리며, 디자이너 외주비 정산까지 한 번에 처리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일 때, 그 메일이 왔다.
[새 메일이 도착했습니다. (1)]
[제목: 투고 원고 재중.]
첨부 파일: <알비온 왕국의 왕자>.hwp]
투고 받은 원고를 출력한 건 충동적인 일이었다. 사장이 그동안 원고 출력하는 것 가지고도 인색하게 굴어왔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선 프린터도 부숴버리고 사무실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되겠냐.’
소심한 사보타주의 결과인 원고를 가방에 처넣곤 바로 퇴근했다.
주말은 바빴다.
실업급여 신청 요강과 구직 사이트를 살폈다. 자기소개서 파일도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열었다.
문과라서 죄송한 사학과 학사.
경력도 학력도 그저 그런 서른두 살.
맥주 한 캔 따 놓고 자소서 양식을 앞에 두자 절로 딴생각이 났다. 맥주를 비운 정진은 가방 속에서 출력한 원고를 꺼냈다.
<알비온 왕국의 왕자>(무사이 지음)
‘뭐지, 판타지인가? 저자 이름도 닉네임 같은데.’
오래되고 영세한데다, 소설은 안 내는 회사를 어떻게 알고 투고했는지. 출판사 이름을 잘못 보고 보낸 건지도 몰랐다.
환빠 아재들의 집요한 투고에 단련된 정진이었기에, 판타지 정도야 가벼운 마음으로 검토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의외로 글 자체는 꽤 재미있어서, 하루를 꼬박 써 끝까지 읽었다.
그런데 완결이 아니었다.
‘이게 1부 끝이야? 원고지 6천 매나 써놓고?’
뒤에는 저자의 추신이 달려 있었는데, 수기로 먼저 쓰고 한글파일로 옮겼는지, 원고를 ‘받아 옮겨’ 썼다고 해 놨다. 글 자체를 무려 여덟 번이나 고쳐 쓴 거라고.
‘여덟 번?! 끈기가 대단하다.’
원래 분야가 다른 원고, 기준 이하의 투고자에겐 거절 메일조차 안 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이 저자는 글은 너무나도 공을 들여 쓴 것이 보여서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원고를 다 읽은 정진은 저자에게 답장을 보냈다. 금세 회신이 와 몇 차례 메일을 교환하며 조언을 보탰다.
물론 정진은 소설 원고를 보는 편집자가 아니기 때문에, 해당 분야 원고는 황금*지나 자*과 모* 같은 출판사에 투고해 보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했다.
‘그렇게 끝난 얘긴 줄 알았는데.’
되도 않는 동정심을 부린 결과로 이렇게 얼척없는 답이 다시 올 줄은 몰랐지. 새벽 세시에.
‘이 저자 혹시 퇴짜 맞은 줄 모르는 건가?’
[‘언젠가 뵐 날이 있길 바라며, 건필하십시오.’] 로 끝낸 메일은, 얼핏 보면 거절로 안 보일 수 있겠지만… 보통 그런 걸 자길 도와준단 뜻으로 이해하는지.
‘알게 뭔가.’
메일앱을 닫은 정진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무슨 글자 같은 게 눈 앞을 스쳤다.
[―전언이 수신완료 되었습니다.]
“웬 헛것이 다 보이고.”
정진은 머리를 털털 흔들었다. 강에서 센 바람이 불어와 좀 정신이 났다. 그리고는 다리를 마저 건너가려 할 때였다.
동작대교의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 드문드문 불이 켜졌던 강 건너 아파트촌도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어?”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난간 밖으로 몸이 기우는 것 같았다. 불길하게 차오른 강물이 인력을 지닌 듯 검게 일렁였다.
물은 싫었다. 나쁜 일은 항상 물에서 일어났다. 한강 다릴 걸어서 건너다니, 정말 취한 거다. 제정신이면 그런 짓은 안 했다.
‘누가 보면 자살하려는 줄 알겠어.’
실직으로 인한 비관자살 기사가 나는 건 사양이었다.
정진은 퍼뜩 난간에서 물러나려 했지만, 얽매어오는 물의 기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순식간에 강으로 몸이 쓸려 나갔다.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