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저명한 고전학자 존 마하피 교수의 지도 아래 고대 그리스 문학과 문화를 공부했고, 옥스퍼드 모들린 칼리지에서 고전문학을 공부하며 유미주의의 선구자인 월터 페이터와 존 러스킨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유미주의의 사도’를 자처하면서 그 이론을 설파하는 강연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1882년 1년간의 미국과 캐나다 순회강연으로 두 대륙 간의 유명 인사가 되었다. 1884년 콘스턴스 로이드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1880년 첫 희곡 『베라, 혹은 허무주의자』를 발표한 이래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특히 1891년에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과 예술비평집 『의도들』을 출간하고 희곡 『살로메』를 집필하는 등 작가이자 평론가로서 절정에 이르렀다. 1892년에는 희곡 『윈더미어 부인의 부채』가 성공하고, 『보잘것없는 여인』 『진지함의 중요성』 『이상적인 남편』이 잇달아 연극으로 만들어져 흥행하면서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91년 옥스퍼드 대학 후배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만나 동성애 스캔들 끝에 1895년 2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출감 후에는 별다른 작품을 쓰지 못하고 파리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900년 11월 30일 뇌막염으로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레딩 감옥에서 더글러스에게 쓴 편지를 묶은 『심연으로부터』가 사후에 출간되었다. 이 장문의 편지는 차디찬 감옥의 어둠과 침묵 속에서도 자신이 타고난 예술가임을 말하고 입증하고자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절절한 기록이며 뜨거운 삶의 고백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옮긴이 박명숙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보르도 제3대학에서 언어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프랑스 고전주의 문학을 공부하고 ‘몰리에르’ 연구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와 배재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현재 출판기획자와 전문번역가로 활동중이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제르미날』 『여인들의 행복 백화점』 『전진하는 진실』, 오스카 와일드의 『거짓의 쇠락』, 조지 기싱의 『헨리 라이크로프트 수상록』,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로랑 구넬의 『가고 싶은 길을 가라』, 플로리앙 젤러의 『누구나의 연인』, 엘렌 보나푸 뮈라의 『잃어버린 연인들의 초상』, 카타리나 마세티의 『옆 무덤의 남자』, 다니엘 포르의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도미니크 보나의 『위대한 열정』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
두 살 무렵 블루 벨벳 드레스 차림의 오스카 와일드.
1867년 여동생 이솔라 프란체스카가 열 살의 나이로 죽자, 슬픔에 빠진 와일드는 예쁘게 장식한 봉투에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넣어 죽을 때까지 고이 간직했다. 봉투의 중앙에 마가복음 5장 39절에서 인용한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1876년 3월, 옥스퍼드 대학 모들린 칼리지의 동창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22세의 오스카 와일드(윗줄 맨 오른쪽).
오스카 와일드가 1882년(28세) 미국과 캐나다로 순회강연을 떠났을 당시 뉴욕의 유명한 사진가 나폴레옹 사로니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당시 와일드는 적어도 스물일곱 번의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그중 첫번째 것이다.
‘유미주의의 사도’를 자처하던 와일드를 잘 보여주는 특유의 나른한 포즈. 블랙 벨벳 코트와 무릎 바로 아래에서 홀친 승마 바지, 블랙 실크 스타킹과 플랫 슈즈는 평소 그가 즐기던 차림이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은 1881년에 출간된 그의 『시집』이다.
와일드의 아내 콘스턴스와 첫째 아들 시릴 와일드(1889년).
와일드의 둘째 아들 비비언 와일드의 다섯 살 때 모습.
1884년 무렵부터 ‘후기 유미주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선언한 와일드는 치렁치렁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새롭게 변모한 모습을 선보였다. 사진은 1889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첫번째 버전을 발표할 무렵의 모습.
오스카 와일드(39세)와 앨프리드 더글러스(23세). 1893년 5월, 옥스퍼드.
와일드는 1893년 1월, 옥스퍼드생이던 더글러스를 가리켜 “아폴론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히아킨토스가 바로 그리스 시대의 당신이었음을 난 알고 있소”라고 했다.
앨프리드 더글러스(1897년, 27세).
윗줄 오른쪽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레지널드 터너, 로버트 로스, 오스카 와일드(1889년, 35세), 로버트 셰라드, 앙드레 지드(1891년, 22세).
1895년 5월 4일 자 『폴리스 뉴스』의 위쪽으로는 와일드가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하던 모습과 보 가의 경찰서에 구금된 모습이, 전면에는 와일드의 재판 광경이, 아래쪽으로는 4월 24일 그의 장서를 비롯하여 모든 동산이 경매에 부쳐지는 광경과 그가 살던 타이트 가의 집 모습이 실려 있다.
프란스 마세렐이 와일드의 『레딩 감옥의 발라드』의 표지(1924년 판)를 위해 제작한 목판화. ‘C.3.3.’은 와일드의 수인번호였다.
원즈워스 교도소에서 편지를 쓰고 있는 죄수들. 그들은 석 달에 한 번씩만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자필 편지 『심연으로부터』의 첫 페이지.
오스카 와일드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알자스 호텔 전경. 그후 5성급 호텔로 변모하면서 ‘호텔(L’Hôtel)’로 이름이 바뀌었다.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이 호텔의 단골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거의 언제나 옳다”라는 말을 남긴 그는 아홉 살 때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스페인어로 번역했다. 그후 평생 동안 와일드의 열렬한 팬이었던 보르헤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흠모하던 작가가 세상을 떠난 곳에서 죽고 싶어했다고 한다.
와일드는 알자스 호텔의 방 두 개를 빌리면서, 하나는 ‘글을 쓰기 위한 곳’이고, 다른 하나는 ‘불면을 위한 곳’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생애 마지막 날들 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단 한 편의 글도 쓰지 못했다.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와일드의 무덤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조각가 제이컵 엡스타인이 제작한 ‘날아가는 수호천사’ 상이 세워졌다. 수많은 여성 팬들의 키스 자국으로 인해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2미터 높이의 투명 플라스틱 보호막이 설치되었다.
1.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는 Oscar Wilde, De Profundis and Other Prison Writings, Penguin Classics, Revised edition, 2013, 앙드레 지드의 『오스카 와일드』는 André Gide, Oscar Wilde, Mercure de France, 1910(1989)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2. 『심연으로부터』는 옮긴이가 임의로 장을 나누었다.
3. 『심연으로부터』의 주석은 모두 옮긴이주이며 미주로 처리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주는 각주로 표시했다.
4. 본문 중 고딕체는 원서에서 이탤릭체와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이다.
옮긴이의 말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번의 전환점은,
아버지가 나를 옥스퍼드에 보냈을 때,
그리고 사회가 나를 감옥에 보냈을 때였다.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에서
한 번의 키스는 한 인간의 삶을 망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오스카 와일드, 『보잘것없는 여인』에서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저명한 외과의사 윌리엄 와일드와 민족주의 시인이자 번역가인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의 세례명은 오스카 핑걸 오플래허티 윌스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였다. 평범하지 않은 부모의 비범한 아들 오스카 와일드는 훗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며 이름을 그에 걸맞게 수정한다.
“내 이름에는 두 개의 O, 두 개의 F, 두 개의 W가 있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이름은 너무 길어선 안 된다. 광고할 때도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세례명이 유용하거나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나처럼 유명해지고자 하는 사람은 이름에서 몇 개를 버려야만 한다. 열기구를 타는 사람이 높이 올라가기 위해 불필요한 바닥짐을 버리듯이…… 그래서 난 내 이름 다섯 개 중에서 두 개(오스카 와일드)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기구 밖으로 던져버렸다. 난 머지않아 나머지 하나도 마저 버리고 ‘더 와일드’나 ‘더 오스카’로만 불리게 될 것이다.”
트리니티 칼리지 재학 시절부터 돋보이는 차림새, 빛나는 지성과 현란한 말솜씨, 뛰어난 유머감각, 선함과 관대함을 모두 갖춘 성품으로 특별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청년 와일드는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에 진학한 후에도 동료 학생들 사이에서 나날이 인기가 높아졌다. 어느 날,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묻는 친구들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난 절대 옥스퍼드의 따분한 교수가 되진 않을 거야. 나는 시인, 작가, 극작가가 될 거야. 어떤 식으로건 유명해질 거라고. 만약 유명해질 수 없다면 악명이라도 떨치고 말 거야.”(그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이다. 어떤 식으로건 유명해진 것은 분명하니까.) 이 이야기는 당시 와일드가 라파엘 전파前派와 유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백합을 잔뜩 꽂은 블루 차이나(청자기)로 자신의 기숙사 방을 장식하고는 “블루 차이나의 수준에 맞춰 사는 것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진다”라고 말해 재학생들 사이에 경탄을 자아냈던 유명한 일화와 함께 많은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훗날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된 웨일스 공이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했던 말은 당시 그의 사회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나는 아직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지 못했다. 그와 친분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알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극작가와 소설가, 동화작가와 평론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부터 세기말의 데카당스와 맞물린 유미주의의 주창자로서 ‘유미주의의 사도’ ‘미학 교수’를 자처하며 이름을 날렸다. 1882년에 그는 불과 28세의 나이로 미국 전역과 캐나다로 1년간 순회강연을 떠남으로써 일약 두 대륙 간의 유명 인사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때 미국 세관에서 “신고할 것이라고는 내 천재성밖에 없다”고 한 그의 말은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1891년에는 그의 대표작이 된 장편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비롯하여 「사회주의에서의 인간의 영혼」, 문학·예술 평론집 『의도들』, 단편집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동화집 『석류나무 집』을 연이어 출간하고 12월에는 파리에서 『살로메』의 집필을 끝내면서 말 그대로 ‘경이로운 해annusmirabilis’를 맞이한다. 가히 오스카 와일드의 해였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가 훗날 연인이 된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으로 만난 것도 그해 여름이었다. 그로 인해 채 4년도 지나지 않아 와일드가 끝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질 줄은 그 자신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생애 최고의 정점에서 추락의 싹이 움트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삶의 아이러니와 반전이 또 있을까. 아마도 오스카 와일드처럼 화려한 명성의 극을 달리다가 한순간에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작가나 예술가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와일드는 그의 유미주의 미학을 설파한 「거짓의 쇠락」에서 문학이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삶이 문학을 모방하고 재현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문학은 언제나 삶을 앞지르지. 삶을 모방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삶을 빚는 거야.” 오스카 와일드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만남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묘사된 화가 바질 홀워드와 도리언 그레이의 첫 만남과 몹시도 흡사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와일드의 주장대로, 마치 삶이 문학을 모방하고 재현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 난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몸을 반쯤 돌렸고, 그때 처음으로 도리언 그레이를 보았지.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난 기이한 두려움에 휩싸였어. 그 존재만으로도 그토록 매혹적이어서, 내가 허용하기만 한다면 나의 본성과 나의 영혼 전부를, 나의 예술 자체를 다 빨아들이고 말 누군가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 나는 내 삶이 그 어떤 외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아. 내 천성이 독립적이라는 건, 해리 자네도 잘 알 거야.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의 주인이었고, 적어도 언제나 그래왔어. 도리언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데…… 대체 이걸 자네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무언가가 내게, 내가 삶에서 어떤 끔찍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어. 운명이 나를 위해 강렬한 기쁨과 강렬한 슬픔, 그 모두를 마련해두고 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들었지.
소설의 이 부분은 훗날 열린 ‘퀸스베리 재판’에서 피고측 변호사에 의해 와일드에게 불리한 증거(그의 동성애 성향을 보여주는)로 인용된다.
1891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아홉 번이나 읽고 그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온 더글러스는 시인 라이어널 존슨의 소개로 오스카 와일드를 만난다는 생각에 한껏 격앙된다. 오래전에 와일드가 다녔던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 재학중인, 그리스 조각상을 닮은 스물한 살의 미청년과 영국 사회의 유명 인사이자 위험하다는 평판을 얻은 서른일곱 살 와일드의 만남은 오래지 않아 치명적인 열정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해 5월, 와일드는 ‘무분별한’ 편지(필시 동성애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을) 한 통으로 인해 공갈범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던 더글러스를 곤경에서 구해주었고,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3년간 이어진 그들의 관계는 끊임없이 창작을 해야만 했던 와일드에게 예술적, 재정적,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파괴적인 영향을 미친다. 와일드는 과격하고 충동적이며 낭비벽이 심하고 끊임없이 관심과 돈을 요구하는 더글러스에게서 벗어나고자 그의 어머니를 설득해 더글러스를 몇 달간 이집트로 보내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심연으로부터』에서 세세하게 묘사되듯이, 와일드가 그를 떨쳐내려 할 때마다 더글러스는 수없이 전보를 보내며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까지 서슴지 않는다.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치명적인 매력과 집요함에 번번이 굴복하고 그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하던 1894년 10월, 더글러스의 큰형인 드럼랜리그 자작이 사냥중에 총기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사고사로 포장되었지만 사실 그는 당시 외무장관이던 로즈버리 경과의 동성애 의혹을 받고 있던 차에 스캔들이 두려워(혹은 총리가 된 자신의 연인과 결별한 것에 절망하여)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와일드 자신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겠지만, 더글러스의 형의 죽음은 와일드가 감옥에 가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와일드는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더글러스에 대한 연민으로 또다시 그를 받아들인다. 더글러스와의 공공연한 관계로 인해 법정에 서고 돌이킬 수 없는 파멸에 이르기까지 와일드는 그와의 반복된 다툼과 화해, 수차례의 결별과 재회로 이어지는 연인들의 사랑의 과정을 모두 겪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수난Passion을 연상시키는 진정한 고행의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 연인으로 알려진 앨프리드 더글러스는 누구인가. 그는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귀족 가문의 후손인 아홉번째 퀸스베리 후작의 셋째 아들이다. 그가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와일드의 명성에 가려지긴 했지만 그 자신도 시인이자 작가이며 번역가였다. 와일드를 만나기 전부터 동성애를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초기에는 주로 동성애를 주제로 하는 시를 썼고, 옥스퍼드 재학 시절에 그가 편집장을 지냈던 잡지 『스피릿 램프The Spirit Lamp』는 동성애를 옹호하기 위한 은밀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과 끊임없이 대립했고, 부자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격렬하고 과격한 방식과 언사로 표출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망설이던 와일드로 하여금 자기 아버지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도록 적극 부추긴 것도 앨프리드 더글러스였다. 퀸스베리 후작은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영국 권투의 현대적 규칙을 만든 인물로, 아내와 자식들에게 함부로 대하고 공공연하게 정부情婦들을 만나며, 화가 나면 사람들에게 말채찍을 마구 내리치는 난폭하고 과격한 성향의 소유자였다. 이는 와일드의 언급대로 퀸스베리 후작과 더글러스의 피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가문의 유전적인 기질이었다. “당신은 예전에도 종종 얼마나 많은 당신 가문 사람들이 자신의 피로 손을 더럽혔는지 이야기하곤 했지. 당신 삼촌이 그랬고, 당신 할아버지도 아마 그랬을 것이며, 당신이 혈통을 이어받은 광기와 사악함으로 얼룩진 계보의 또다른 이들도 그랬다고 말이지.”
식구들에게 독재자처럼 군림하는 아버지에게 격렬한 증오심을 품고 있던 더글러스는 부모의 이혼과 형의 비극적인 죽음을 모두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면서 무례하고 모욕적인 편지와 전보를 끊임없이 보내 그를 도발했다. 와일드는 더글러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동성애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다니지 않았지만,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세인의 이목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자유롭게 활보하던 두 사람은 앨프리드 테일러가 운영하던 유곽에서 젊은 남자들을 소개받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위험한 행보를 이어갔다. 와일드로서는 예의 그 ‘표범들’에게 관대하게 굴면서 그들과 함께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당시의 청교도적이고 엄격한 사회에 대한 무의식적인 도전인 셈이었다. 당시만 해도 그는 그러한 만남들이 자신의 피할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했겠지만. “사람들은 식사 자리에 행실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에 대해 내게 맹렬한 비난을 퍼붓곤 했지. 하지만 삶의 예술가로서 그들에게 다가가 살펴본바 그들은 유쾌한 암시와 자극으로 가득찬 존재들이었어.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마치 검은 표범들과 주연酒宴을 벌이는 것과도 같았지. 거기서 느껴지는 흥분의 반은 그 속에 포함된 위험에서 오는 것이었어.”
이미 카페와 와일드의 집에서 그와 여러 차례 대면한 바 있는 퀸스베리 후작은 동성애 스캔들로 큰아들을 잃은 후 셋째 아들만은 지키겠다는 부성애 넘치는 아버지의 일념으로 더이상 그들의 관계를 묵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실행에 옮긴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증오로 가득찼던 더글러스는 그에게 와일드와의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장전된 권총을 들고’ 와일드의 편을 들 것이라고 단호하게 경고한다. 와일드는 『심연으로부터』에서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무례한 당신의 전보는 자연스럽게 거만한 변호사의 편지로 이어졌고, 당신 변호사가 당신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들은 물론 그의 화를 더욱더 돋우는 결과를 낳았지. (…) 그래서 그는 (…) 공개적으로, 공인으로서의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어. (…) 너무나도 비열한 그의 공격에 반격을 했더라면 나는 파멸하고 말았을 거야. 그리고 반격하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로 파멸했을 거고.” 와일드는 자신이 그들 부자간의 갈등의 희생양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아니면, 당신 아버지와의 증오 싸움에서 내가 당신들 각자에게 방패이자 무기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건가? 아니면 한술 더 떠서, 그 전쟁이 끝난 다음에 벌어진, 내 인생을 건 그 끔찍한 사냥에서 당신이 친 그물에 먼저 걸려들지 않았더라면 당신 아버지가 결코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던 건가?”
1895년은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이자 평론가로서 영광의 정점에 다다른 오스카 와일드가 한순간에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최악의 해annushorribilis’로 기록되고 있다. 그해 1월 3일, 런던의 헤이마켓 극장에서는 와일드의 『이상적인 남편』이 초연되었고, 2월 14일 런던의 세인트제임스 극장에서는 와일드 최고의 극작품으로 꼽히는 『진지함의 중요성』이 초연될 예정이었다. 퀸스베리 후작은 극이 끝나고 와일드가 무대 인사를 할 때 그에게 썩은 야채 다발을 던질 궁리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미리 그 사실을 떠벌리고 다닌 덕분에 와일드는 경찰을 동원해 그를 저지하여 봉변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자 퀸스베리 후작은 2월 18일에 와일드의 단골 클럽인 앨버말 클럽에 자신의 명함을 남겨놓았는데(와일드는 열흘 후에야 그 명함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남색자를 자처하는 오스카 와일드에게ToOscarWildeposingSomdomite’라고 씌어 있었다(‘Somdomite’는 ‘Sodomite’를 잘못 쓴 것이다. 퀸스베리의 필체가 불분명한 탓에 ‘남색자를 자처하는’인지 ‘남색자인 척하는’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수개월간 그의 집요한 추적과 공격에 시달리고, 자기 아버지에 대한 증오에 눈이 먼 더글러스의 충동질에 지치고 궁지에 몰린 와일드는 그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하지만 당신은 증오에 눈이 멀었던 거야. (…) 당신이 늘 하던 말대로 그가 ‘피고인석에 서 있는 것’을 보는 것, 당신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만으로 가득차 있었지. 당신은 그 말을 매일같이 지겹도록 반복했지. 난 식사할 때마다 그 말을 어김없이 들어야 했어. 어쨌거나 당신은 소원을 이룬 셈이지. (…) 당신들은 역겹기 짝이 없는 ‘누가 더 미워하나’ 게임에서 내 영혼을 걸고 주사위를 던졌고, 그 결과 당신이 지고 말았지.” 로버트 로스(와일드는 그를 ‘로비’라고 불렀다)를 비롯한 그의 친구 몇몇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소송을 당장 취하하고 가족과 함께 파리로 떠나 있을 것을 강력하게 충고했다. 와일드가 그들의 충고를 따르려고 할 때 뒤늦게 나타난 더글러스는 소송비용까지 대주면서 소송을 진행하도록 그를 밀어붙였다. “더이상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제 무언가가 일어날 차례입니다.” 그는 불과 두어 달 전 알제에서 앙드레 지드를 만났을 때 이렇게 예고한 바 있다. 그는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고, 이제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나야 할 터였다. 와일드는 그의 죽음의 천사가 된 연인의 손에 이끌려 마치 최면에 걸린 제물처럼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당신들 사이에서 난 이성을 잃고 만 거야. 나의 판단력은 나를 저버렸고, 두려움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지. 솔직히 말해서, 그때는 당신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았어. 난 눈이 가려진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비틀거렸지. 나는 엄청난 정신적 과오를 범한 거야.”
와일드가 퀸스베리 후작에 맞서 제기한 명예훼손에 대한 재판(퀸스베리 재판)은 4월 3~5일 런던의 중앙형사법원(올드 베일리)에서 열렸다. 재판의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와일드는 자신이 ‘남색자를 자처한’ 적이 없음을 입증해야만 하며, 퀸스베리는 자신의 주장은 진실이고, 그 진실은 대중의 이해를 위해 모두에게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했다. 피고측은 본격적인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열다섯 개의 소인訴因을 작성해 와일드측에 전달했다. 그중 열세 개는 와일드와 함께 남색행위를 했다고 주장하는 젊은 남자들의 명단에 관한 것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그의 글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와일드는 그중 몇몇에 대해 집중적인 해명을 해야만 했다. 그가 더글러스에게 보낸 편지들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부도덕성, 그리고 더글러스의 부탁으로 그의 친구인 존 프랜시스 블록섬이 펴내는 동성애 성향의 잡지 『카멜레온』에 기고한 글이 법의 도마 위에 올랐다. 더글러스에 대한 열정적인 찬사로 가득한 와일드의 편지들이 더글러스의 부주의로 직업적인 공갈범들의 손에 들어갔고, 이로 인해 와일드는 여러 차례 그들에게 협박을 받았다. 그는 이 문제와 관련한 피고측 변호사 에드워드 카슨(그는 와일드와 트리니티 칼리지를 같이 다녔다)의 질문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특히 문제가 된 편지는 1893년 1월, 옥스퍼드생 더글러스가 보낸 시에 대한 화답으로 와일드가 보낸 것이었다. “나의 소중한 소년이여, 그대의 소네트는 정말 사랑스럽구려. 붉은 장미꽃잎 같은 그대의 입술이 격렬한 입맞춤과 더불어 감미로운 노래를 위해서도 존재하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그대의 날렵한 황금빛 영혼은 격정과 시 사이를 거닐고 있구려. 아폴론이 미치도록 사랑했던 히아킨토스가 바로 그리스 시대의 당신이었음을 난 알고 있소.” 와일드의 변호사인 에드워드 클라크와 와일드는 히아킨토스에게 보낸 편지의 말들이 “피고측에서 주장하는 역겹고 추악한 것에 대한 암시와는 아무 상관 없는 순수한 시적 감정을 표현한 것뿐”이며, 산문으로 쓰인 소네트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실제로 1893년 5월 4일, 프랑스 작가 피에르 루이스는 그 편지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잡지 『스피릿 램프』에 발표했다. 에드워드 카슨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부도덕성과 사악함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와일드가 자신의 소설은 도덕이 아닌 예술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카슨은 『카멜레온』에 실린 「신부와 복사服事」를 와일드의 글이라고 주장하며(익명으로 실린 이 글은 사실 블록섬 자신이 쓴 글이었다), 이야기의 사악함과 잡지의 나쁜 평판을 이용해 와일드의 부도덕성을 강조하고, 배심원들의 마음속에 그의 신망에 대한 의문을 심어놓고자 했다. 와일드가 더글러스의 부탁으로 그 잡지에 짧은 글을 기고한 사실 역시 그에게 불리한 증거로 악용되었다.
또한 그간 와일드가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 등지에 초대하고 값비싼 선물들을 안겨주었던 하층민 출신의 젊은이들은 퀸스베리 후작에게 매수되어 자신들은 와일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그의 등에 칼을 꽂기를 서슴지 않았다. 오직 이들을 소개하는 역할을 했던 앨프리드 테일러만이 그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여 그와 똑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와일드는 그들에게 선물을 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들과는 결코 성적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와일드의 변호사는 선물의 사심 없는 성격을 강조하며 사실을 축소하고자 했고, 퀸스베리 후작이 자신의 아들에게 보낸 과격하고 살벌한 내용의 편지들을 읽어주면서 배심원들에게 그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했다. 반면, 퀸스베리의 변호사는 와일드가 자신의 나이를 한 살 낮추어 얘기한 것을 물고 늘어지면서 그를 정직하지 못한 사람, 세상 물정 모르는 순수한 젊은이를 유혹하여 타락시키고자 한 사악한 ‘늙다리’ 호색한으로 몰아갔다.
에드워드 카슨이 이끈 반대신문은 이내 두 사람 사이의 치열한 설전으로 바뀌었다. 카슨은 점점 더 끈질기고 치밀하게 와일드를 추궁했고, 와일드는 법정을 연극무대로 변모시키면서 평소처럼 여유로운 모습으로 재치 있는 즉답과 언어유희를 구사하여 법정의 청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는 지나치게 자신만만한 나머지 사법제도와 기존의 질서를 경멸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점차 배심원들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와일드는 자신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한 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지나치게 말을 많이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결정적인 허점을 보였고, 에드워드 카슨은 그 틈새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반대신문에서 카슨은 와일드에게, 옥스퍼드에서 더글러스가 머물렀던 저택의 하인 월터 그레인저에 관해 질문했다. 이에 대한 와일드의 답변은 그를 자승자박의 굴레에 빠지게 하면서 그에게 결정적인 충격타를 가했다.
“그에게 키스를 했습니까?”
“오, 맙소사, 천만에요! 그는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주 못생겼고요. 참으로 딱할 정도로 말이죠.”
“그래서 키스하지 않은 겁니까?”
“카슨 씨, 아주 무례하시군요.”
“그 청년의 못생긴 외모를 언급한 이유가 뭡니까?”
카슨은 이 문제를 계속 물고 늘어지면서 와일드의 답변에 담긴 외설스러움을 강조했고, 자신이 내뱉은 말의 덫에 걸린 와일드는 당황하며 허우적거렸다. 다음날 그의 변호사는 상대 변호사와 판사에게 고소를 취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그후 배심원들은 일사천리로 퀸스베리 후작의 주장과 반소反訴 청구는 지극히 정당하다고 선언했다. 청중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지만 와일드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던 판사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평소 와일드에게 조롱당했던 언론 역시 일제히 적의로 가득찬 자극적인 기사를 줄줄이 쏟아냈다. 4월 5일, 사흘간 이어진 재판에서 패소하고 법정을 떠난 와일드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자 『이브닝 뉴스』에 짧은 편지를 보냈다. 그로서는 더글러스를 그의 아버지와 맞서는 증인으로 법정에 세우지 않고서는 재판에서 이길 수 없었음을 설명하는 편지였다. 그는 또한 더글러스가 증언에 응하겠다고 했더라도, 자신은 친구를 그토록 고통스러운 입장에 처하게 하기보다는 불명예와 치욕을 홀로 감당하고 싶어했을 거라고 말했다.
한편 무죄로 풀려난 퀸스베리 후작은 그 즉시 오스카 와일드에게 불리한 자료들과 증언들을 검찰총장에게 보냈고, 검찰총장은 그것들을 곧바로 내무부로 보냈다. 그날 이른 오후, 와일드는 친구들로부터 자신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고, 그들은 즉시 그에게 프랑스로 떠나라고 재촉했다. 심지어 당국조차도 그에게 도망갈 틈을 주려는 듯 시간을 지체했다. 하지만 와일드는 끝내 머무는 편을 택했고, 저녁 6시 30분 더글러스가 머물던 캐도건 호텔에서 다수의 동성과 외설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스코틀랜드 야드(런던경찰국)로 끌려갔다. 그리고 보 가街의 경찰서로 이송, 구금되었다. 재판을 받기도 전에 이미 유죄선고를 받은 셈이었다. 언론과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이 퀸스베리의 뒤에서 하나로 똘똘 뭉쳐 그와 맞섰다. 앨프리드 테일러도 그와 함께 체포되었다. 와일드는 보석 신청도 거부되어 4월 26일 그의 첫번째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홀러웨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4월 24일에는 퀸스베리 재판의 비용을 갚지 못해 타이트 가에 있는 집의 모든 동산과 장서가 경매에 부쳐졌다.
4월 26일에 열린 재판에서는 『카멜레온』에 발표한 더글러스의 시 「두 개의 사랑」이 와일드에게 불리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나는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니”라고 한 시의 마지막 구절은 금지된 사랑, 동성애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 상대는 와일드라는 암시를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5월 1일, 배심원들은 불일치 판결을 내렸고, 어렵게 보석으로 풀려난 와일드는 살아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거리에서 그를 알아본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쫓기기도 했으며, 호텔과 레스토랑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5월 20일에 다시 열려 엿새 동안 이어진 두번째 재판에서 와일드는 태도와 어조를 완전히 바꿔 겸손하고 법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예전 재판들에서와 똑같은 신문, 반대신문, 증언 그리고 논고가 끝없이 이어진 끝에 와일드는 테일러와 함께 ‘다른 남성들과 역겨운 외설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1885년에 발효된 형사법 개정안 11조에 근거하여) 법적 최고형인 2년간의 강제 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일찌감치 예상되었던 판결이었다. 재판장이었던 윌리스는 판결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이토록 가증스러운 사건은 다뤄본 적이 없으며, 저질러진 범죄에 비하면 법적인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가차없는 논평을 덧붙였다. 와일드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발언조차 저지당한 채 퇴장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빛나는 재담으로 좌중을 매료하던 예전의 오스카 와일드가 아니었다. 박탈당한 영예로운 이름 대신 수인번호 C.3.3.으로 납덩어리보다 무거운 침묵을 강요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한낱 흉악범일 뿐이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와일드의 동성애에 대한 단죄는 단지 한 개인을 풍속사범으로 감옥에 보낸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와일드의 두번째 재판에서 배심원 대표는 판사에게 “앨프리드 더글러스 경과 오스카 와일드의 친밀한 관계를 고려해볼 때” 더글러스에게도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는지 물었다. 이에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오자 그는 이번에는 그러한 조치를 고려하고 있는지 물었다. 판사는 또다시 부정적인 답변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그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지 않은 데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의 증언을 가로막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배심원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실에만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배심원들이 의문을 제기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더글러스에게는 어떤 법적인 조치나 처벌도 가해지지 않았으며, 그는 와일드의 재판이 시작되자 그다음 날 유럽으로 떠나 3년간 영국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성애 스캔들이 터지기 몇 년 전에도 이와 유사한 스캔들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1889년, 경찰이 클리블랜드 가의 유곽을 검색하던 중, 그곳에 소속된 남창들과 정계 인사들을 포함한 영국의 유력 인사들 사이에 은밀한 거래가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후 사건의 수사는 재빨리 덮이면서 유야무야로 끝나버렸고, 그로 인해 국가의 신망에 커다랗게 금이 갔다. 따라서 당국으로서는 이번에야말로 추락한 국가의 도덕성과 명예를 회복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줄 때였던 것이다. 게다가 와일드의 스캔들 뒤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대하고 심각한 스캔들이 숨어 있었다. 1894년 10월 18일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더글러스의 형 드럼랜리그 자작은 외무장관에 이어 영국의 총리가 된 로즈버리 경의 비서관이자 동성 연인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근간마저 뒤흔들지도 모르는 엄청난 스캔들을 또다른 스캔들로 덮어버리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야 할 강력한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
그가 유죄선고를 받자, 런던의 극장과 서점가에서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과 그의 연극, 책 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다. 심지어 그의 축출을 축하하는 파티까지 열렸으며, 그가 다녔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우등생 명판에서도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그가 복권된 후에 다시 올려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런던에서 가장 ‘핫한’ 유명 인사였던 오스카 와일드는 이제 몇몇 충실한 친구들을 제외한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버림받은 무명의 죄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아내 콘스턴스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떠났고,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으며, 그는 죽을 때까지 두 아들을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후손은 끝내 와일드라는 성을 되찾지 않았다.
5월 25일, 뉴게이트 교도소와 홀러웨이 구치소에서 각각 수감절차를 마친 와일드는 펜턴빌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7월 4일에는 원즈워스 교도소로 옮겨졌고, 11월 21일에는 다시 레딩 감옥으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형기를 마쳤다. 와일드가 복역했던 19세기 말 영국 교도소는 끔찍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조금만 규율을 어겨도 가차없이 처벌을 받았고, 고되기 그지없는 강제 노역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마저 지키지 못하도록 신체를 혹사시키고 모든 의지를 꺾어놓았다. 와일드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채 배고픔, 추위, 일상적인 치욕, 절망감 그리고 침묵과 싸워야 했다. 그는 매일같이 이어지는 뱃밥 따기로 손에는 피멍이 들고, 하루에 여섯 시간씩 거대한 물레방아 돌리기와 같은 가혹한 신체적 징벌과 불결한 음식과 불면 탓에 탈진과 설사를 거듭했다. 배변조차 자유롭지 못해 감방 안에서 양동이로 처리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상적인 고통 가운데서 무엇보다 그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온전히 홀로 견뎌야 하는 지적인 굶주림이었다. 누구보다 책과 대화를 사랑하던 와일드는 새로운 교도소장이 부임할 때까지 모든 문화적인 것과 단절된 채 더욱더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가 감옥에서 14개월을 보냈을 때 부임한 새 교도소장 제임스 오스먼드 넬슨 소령은 악명 높았던 전임 소장과는 달리 와일드에게 깊은 연민을 느껴 그가 자유롭게 책을 보고 편지를 쓸 수 있게 배려했다(그에게는 오직 사적인 편지를 쓰는 것만 허락되었다). 하지만 외부로 편지를 내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아 넬슨 소장은 와일드가 쓴 편지를 모아두었다가(그는 자신이 아주 중요한 문서를 보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출소할 때 되돌려주었다. 편지는 매일 한 페이지밖에 쓸 수 없었으며, 다 쓴 편지는 펜과 함께 반납해야만 했다. 따라서 와일드는 자신이 쓴 편지를 다시 읽어보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이로써 편지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문법적인 오류나 잘못된 기억과 문학적 인용 등이 설명된다). 와일드가 수감되자 그와 가까운 몇몇 친구들은 런던과 파리에서 각각 “그가 감옥에서 고통받고 쇠약해져 죽는 일이 없도록” 그의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특히 프랑스의 저명한 극비평가인 앙리 바우에르는 ‘문명화된 국가에 걸맞지 않은, 인류에 대한 모독이나 다름없는 판결과 형벌의 가혹함’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와일드는 단 하루도 감형받지 못하고 형기를 꼬박 채워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몇 주간은 바깥세상의 적대감과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특히 1895년 11월 21일 레딩 감옥으로 이송되던 날 클래펌 분기점에서 겪었던 끔찍한 일(13장 참조)은 그의 수감 기간을 통틀어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경험으로 그를 내내 따라다녔다. 또다시 세간의 조롱과 경멸 어린 시선을 견뎌야 한다는 생각에 겁을 집어먹은 와일드는 예정된 5월 20일 대신 15일에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의 법은 끝까지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럼에도 넬슨 소장은 그가 18일에 출소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와일드는 19일 아침에 처음 수감되었던 펜턴빌 교도소에서 다시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언젠가 넬슨 소장은 와일드를 면회했던 로스에게 와일드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괜찮은 듯 보이지만, 와일드 씨처럼 이런 중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그도 아마 앞으로 2년 내에 죽게 될 겁니다.” 와일드는 그로부터 3년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와일드는 1897년 5월 19일, 자신의 편지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영국을 떠나 20일 프랑스의 디에프에 도착해 로스를 만났다. 그는 로스에게 그것을 건네주면서 한 부를 타자해서 간직하고 원본은 더글러스에게 전해줄 것을 당부했다. 편지를 간직하고 있던 로스는 원본은 자신이 갖고 타자한 한 부를 더글러스에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더글러스는 자신은 편지를 받은 적이 없다고(여러 정황상 거짓말로 추측되지만) 주장했다가, 나중에는 첫 장만 읽고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말하기도 했다. 와일드의 편지가 세상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공개된 것은 1905년 독일에서였다. 같은 해, 로스도 런던의 메수엔 출판사에서 편지의 삭제판을 펴냈다. 당시 로스는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더글러스와 그의 가족과 관련된 모든 구절(전체 분량의 3분의 2에 해당)을 삭제하여 이 편지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1949년에 와일드의 아들 비비언 홀랜드가 여전히 불완전한 편지의 새 버전을 펴내고, 1962년 비로소 완전한 와일드의 편지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될 때까지 사람들은 『심연으로부터』를 오스카 와일드의 단순한 ‘참회록’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국내에도 그의 작품들이 수백 권의 책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그 어디에서도 『심연으로부터』에 대한 제대로 된 언급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너무나 오랫동안 통용되어온 잘못된 정보를 이제는 바로잡을 때인 것이다.
본래 와일드가 자신의 편지에 붙인 제목은 ‘감옥에서, 사슬에 묶여 쓴 편지Epistola:InCarcereetVinculis’(호라티우스에게서 빌려온 표현)였다. ‘심연으로부터’는 로스가 1905년에 삭제판을 펴내면서 구약의 시편 130편의 첫 문장에서 빌려와 붙인 제목이다. 그는 편지를 좀더 안전한 곳에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1909년, 향후 5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과 함께 영국박물관에 원본을 맡겼다. 편지의 수신인이 앨프리드 더글러스라는 사실이 세상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12년이었다. 로스의 친구였던 아서 랜섬이 『오스카 와일드: 비평적 연구』라는 책을 펴내면서 문제의 삭제된 구절들(로스가 개인적으로 알려주어 알게 된)을 언급한 것이다. 다음해, 더글러스는 책의 저자와 편집자를 명예훼손죄로 고소했고, 문제의 편지 구절들은 법정에 증거로 채택되어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읽혔다. 배심원들은 랜섬이 진실을 말했음을 인정했고, 더글러스는 패소했다. 하지만 자신의 책이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랜섬은 책의 다음 쇄에서 문제의 구절을 삭제했고, 그후 로스가 이미 요구했던 바와 같이 더글러스의 생전에는 와일드의 편지 전문을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비공식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시간이 흘러 로스는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타자한 편지를 와일드의 차남 비비언에게 물려주었다. 1945년에 더글러스가 사망하자, 비비언은 아버지의 편지 전문을 세상에 공개할 때가 왔다고 생각해 1949년, 여전히 ‘심연으로부터’라는 제목으로 최초의 완전하고 진정한 판본이라고 믿은 와일드의 편지를 책으로 펴냈다. 그러나 로스가 건네준 원고에는 다음과 같은 잘못된 부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에는 명료하고 우아했던 와일드의 필체가 읽기 어렵게 변하여 때때로 내용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긴 오류, 로스가 불러주는 편지의 내용을 잘못 이해한 타이피스트의 실수로 인한 오류, 로스 자신이 문법과 구문에 관한 수정을 하고, 문장과 때로는 단락 전체의 위치를 바꿔서 생긴 오류 등이 그것이다. 게다가 로스는 더글러스와 그의 아버지에 관한 와일드의 신랄하고 비판적인 말들을 100여 군데나 삭제했다. 그후 와일드의 편지는 무려 65년을 기다린 끝에 1962년에야 비로소 어떠한 수정이나 가감 없이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와일드는 형기가 5개월 남짓 남은 시점에서 더글러스에게 기나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편지의 앞부분에는, 연인의 기나긴 침묵에 지치고 절망한 와일드가 쏟아내는 구구절절한 원망과 신랄한 비난, 그와의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지 못한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대한 쓰디쓴 자책이 가득하다. 고통스러운 수감생활로 심신이 피폐해진 와일드는 때로는 감정이 격화되고 부정확한 기억을 드러내기도 한다. 오스카 와일드는 앨프리드 더글러스의 단점과 잘못을 들추어내면서 모든 비극을 그의 탓으로 돌리기 위해 이 글을 썼던 것일까? 앙드레 지드에게 ‘예술에는 1인칭이 없다’고 단언했던 와일드가 유일하게 자신의 맨얼굴과 치부를 드러내며 써내려간 이 글을 하나의 단면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예단일 터이다. 『심연으로부터』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흥미로운 면모와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이다. 와일드로 하여금 이토록 기나긴 편지를 쓰게 했던 중요한 한 가지 동기는 글을 다 쓴 직후 로스에게 보낸 1897년 4월 1일 자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자네가 나의 문학과 관련한 유언집행자가 되려면 퀸스베리와 앨프리드 더글러스에 대한 나의 기이한 행동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유일한 문서를 확보하고 있어야만 할 거야. 이 편지를 다 읽으면, 자넨 그 속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 어리석음의 극치와 천박한 허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일 내 행동에 대한 심리적인 해명이 들어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언젠가 진실은 밝혀질 거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이나 더글러스의 생전에는 아닐지 몰라도. 하지만 난 언제까지고 저들에 의해 기괴한 공시대에 매달려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문학과 예술에서 고귀한 이름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야. 그래서 나는 그 이름이 영원히 퀸스베리 부자의 방패막이와 무기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 나는 내 행위에 대한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단지 해명할 뿐이지.
또한 그 편지 속에는 감옥에서의 나의 정신적 성장과, 지난 삶에 대한 지적 태도와 나의 기질의 필연적인 변화를 다루는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어. 나는 자네를 비롯하여 변함없이 나에 대한 애정을 간직한 채 내 편에 서 있는 이들이 내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세상과 맞서고자 하는지 정확히 알기를 바라.
오로지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온 와일드는 자신의 삶의 계획에 포함되지 않았던 슬픔과 고통과 씁쓸함과 치욕으로 가득한 낯선 세계에 내던져졌다. 그곳에서 그는 “단지 기다란 복도에 있는 한 조그만 감방을 나타내는 숫자와 알파벳”에 불과했고, “생명 없는 천 개의 삶 중 하나, 생명 없는 천 개의 숫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고통과 치욕이 일상이 된 세상에서 와일드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예술적 삶의 완성과 궁극적인 자아실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강렬하고 놀라운 실재實在’이자 ‘삶의 비밀’인 고통을 거부하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삶에 스스로 제약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연으로부터』가 포함한 특별함 중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와일드의 참신하고 새로운 해석이다. 와일드의 종교적 열망은 언제나 그의 유미주의 철학과 일치하는 미학적이고 낭만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전향을 거부해온 그는 예술가처럼 그 본질에 ‘강렬하고 불꽃같은 상상력’을 포함한 그리스도에게서 ‘지고한 개인주의자’의 전형을 본다. 스스로를 “타고난 도덕률 폐기론자이며, 법이 아닌 예외를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규정한 와일드는 그리스도를 두고 “그에게는 법칙이란 것은 없었어. 오직 예외만이 있을 뿐이었지”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리스도로 하여금 영원한 문제적 인간이 되게 한 그의 철저히 자유로운 행보는 당대의 문제적 인간으로 낙인찍힌 와일드의 행보와 비교되며,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십자가의 형벌은 와일드 자신의 형벌을 연상시킨다. 영어생활 동안 고통과 연민이라는 감정에 새롭게 눈뜬 와일드는 예수의 도덕성 또한 연민이었음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연민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고통이 있는 곳에는 신성한 땅이 존재하는 법이야.” 그는 심지어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해 감옥에 가는 것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르네스트 르낭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그러한 계획이 다른 이들에게 하나의 예를 제공함으로써, 즉 내밀함이 보편성을 향해 열림으로써 자신을 넘어설 때만 가치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심연으로부터』를 읽다보면 편지의 진정한 수신인은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과 와일드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더글러스와의 관계에서의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되짚어보면서, 자신의 삶을 파탄에 이르게 한 크고 작은 일들을 재구성하여 그것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동시에 절절한 사랑 고백에 다름아닌 편지를 써내려가며 자신과 더글러스 사이에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음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자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마치 푸닥거리를 하듯, 더글러스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삶의 혼란과 무질서를 몰아내고, 자신을 벌하고 내친 사회와의 새로운 관계 정립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그려보고자 한 것이다.
와일드는 감옥이 그에게 가르쳐준 고통과, 그것과 연관된 감정들, 슬픔, 치욕, 부당함, 분노를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의 자아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내 사랑받았던 과거의 자신과 배척당한 현재의 자신 사이의 단절된 연결고리를 찾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영예로웠던 이름,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자신의 이름에 실체를 부여하고, 한 인간과 예술가로서의 존엄성을 되찾고 싶었던 게 아닐까.
만 2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온 와일드는 가톨릭으로 개종해 1년 정도 수도원에서 머물기를 원했지만 예수회 수도사들에게 거부당하고 영국을 떠나야 했다. 그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디에프 부근에 있는 조그만 시골마을 베른발에서 서배스천 멜모스라는 가명으로 조용히 지냈다. 디에프에서 마주친 영국인들은 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그를 따돌렸다. 와일드는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두 아들을 끝내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표류하듯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그는 베른발에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집필하여 1898년 2월에 출간한 것(오스카 와일드가 아닌 수인번호 ‘C.3.3.’으로 출간) 말고는 더이상 글을 쓰거나,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거나 잃어버린 명예를 회복하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삶에 대한 모든 의욕을 상실한 그에게는 잠시나마 외로움을 잊기 위해 카페를 어슬렁거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생계는 『레딩 감옥의 발라드』를 포함한 몇몇 작품에서 나오는 약간의 인세 수입과, 아내 콘스턴스(그녀는 죽을 때까지 와일드와 이혼하지 않았다)가 보내주는 얼마간의 돈과 몇몇 친구들과 지인들이 가끔씩 보태주는 돈으로 이어갔다. 이 책에 실린 앙드레 지드의 회상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지인들에게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어떤 때에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어서 저녁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그는 친구인 프랭크 해리스의 배려로 남프랑스의 니스와 라나풀에서 겨울을 보내기도 했고, 부유한 영국인 해럴드 멜러의 초대로 스위스에서 잠깐 체류하거나 그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하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에 이끌렸던 와일드는 로마에서 교황 레오 13세를 여러 차례 알현하여 축복을 받았다.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는 이 호텔 저 호텔을 전전하며 시간을 죽여나갔다.
그는 대부분 혼자였고, 세상 사람들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적대감과 끊임없는 치욕을 견뎌야만 했다. 그는 로비에게 보낸 편지(1897년 4월 1일 자)에서 예고한 대로, 자유를 되찾은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또다른 감옥’으로 옮겨간 것뿐이었다. “물론 어떤 관점에서는, 감옥에서 나가는 날, 나는 단지 하나의 감옥에서 또다른 감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