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잉타이龍應台
타이완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폭넓은 지식과 날카로운 시사적 감각, 촌철살인의 명쾌한 문장으로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중화권 최고의 사회문화비평가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다. 중화권에서 ‘지식인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에 선정되었고, 2012년 5월 타이완 문화부가 신설되면서 2014년 12월까지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지금까지 가장 능력있고 따뜻한 장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6년부터 1999년까지 독일과 스위스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곳 신문에 칼럼을 써서 중국 지식인의 시각과 견해를 서양 세계에 보여주었다. 타이완으로 돌아온 1999년부터 2003년까지는 타이베이 시 문화국 국장을 지냈고, 이후엔 홍콩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홍콩 사회의 정치제도 개혁, 문화보호, 국제교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왔다. 2005년에는 ‘룽잉타이 문화기금회’를 공동 창설해서 지금까지 청년들의 글로벌 시민 자질 함양에 힘쓰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룽잉타이 인생 3부작’이라 불리며 출간된 지 십 년 가까이 독자들에게 스테디셀러로 읽혀온 《사랑하는 안드레아》 《아이야, 천천히 오렴》 《눈으로 하는 작별》 외에 중화권에 룽잉타이 돌풍을 일으킨 사회문화비평서 《야화집》과 1949년 이후의 분단과 중국에서 건너온 타이완 사람들의 디아스포라 같은 삶을 조명해 중화권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강대해 1949》 등이 있다.
‘룽잉타이의 세계’ 페이스북 페이지 facebook.com/lungyingtai.kr
눈으로 하는
작별
옮긴이 도희진
연세대학교 사학과 및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다. 현재 서울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중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중국어 국제회의 동시통역사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중국 과학 이야기》, 《잠재규칙》, 《번역학 비판》 등이 있다.
目送(A Long Gaze)
written by 龍應台(Lung Ying Tai)
Copyright ⓒ2008 Lung Ying Tai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2015 Tindrum Publishing Ltd.
All rights reserved.
Korean translation rights is arranged through Pauline Kim Agency with Lung Ying Tai.
이 책은 피케이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자와 독점계약을 하여 (주)양철북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저작권법에 따라 한국 내에서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目送 눈으로 하는 작별
1판 1쇄 인쇄 2016년 5월 3일 | 1판 1쇄 발행 2016년 5월 10일
지은이 룽잉타이|옮긴이 도희진
펴낸이 조재은|펴낸곳 (주)양철북출판사|등록 제25100-2002-380호(2001년 11월 21일)
책임편집 조연주|편집 임중혁 김연희 이정우|표지와 본문 디자인 김모|디자인 육수정
마케팅 조희정|관리 정영주
주소 서울시 마포구 양화로8길 17-9|전화 02)335-6407|팩스 02)335-6408
종이책 ISBN 978-89-6372-194-1 03820
전자책 ISBN 978-89-6372-206-1 0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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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에게 바친다.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1
침실 서랍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서랍 구석 깊숙이, 무언가 손가락에 걸렸다. 손으로 더듬어 꺼내보니, 붉은 상자였다.
속옷과 손수건, 양말 같은 잡동사니로 꽉 차 있는 서랍이었다. 한구석, 손이 잘 닿지 않는 귀퉁이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놓은 것이다. 당연히 내가 넣어둔 것일 텐데,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상자를 열어보니 무언가가 검은색 비단으로 잘 싸여 있었다. 풀어보니 묵직해 보이는 금목걸이 두 개와 반지, 귀고리, 브로치 등이었다. 장신구들은 가을날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검은색 비단을 배경으로 은은한 황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예쁜 것들을 좋아했던 엄마는 평생 장신구를 즐기셨다. 병원에 계신 아버지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어느 날 밤이었다. 침실로 나를 부른 엄마가 상자를 꺼내 장신구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담았다.
“가져가렴.”
나는 웃으며 엄마의 손을 물리쳤다.
“엄마, 저 반지 안 끼는 거 아시잖아요. 두고 끼세요.”
엄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부모님의 침대를 바라보았다.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고향에서 가져온 자수가 걸려 있었다. 달빛을 연상시키는 미색 바탕에 은은한 색감으로 수놓은 네 폭의 춘란, 연꽃, 국화, 매화가 시원한 돗자리가 깔린 더블침대를 내려다보는 듯했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가 천천히 돌아가며 바람소리를 내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과 사람의 손길을 고스란히 담은 방이었다.
엄마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얘야, 나중에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것보다는, 지금 너에게 주고 싶구나.”
엄마는 상자를 내 손 위에 올려놓고는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쥐었다. 시선은 어둑해져가는 창밖에 둔 채,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뚜껑을 덮어 상자를 다시 서랍에 넣은 후, 거실로 나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신호음을 들으며 나는 바다 쪽 발코니로 나갔다. 막 해가 저무는 참이었다. 바다는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만약 저 멀리, 바다를 건너 섬들을 지나 구름을 뚫고 날아갈 수 있다면, 아마도 마카오에 닿겠지. 더 가면 베트남, 미얀마. 다시 더 가면 인도, 결국 아프리카까지. 하지만 타이완은 해 뜨는 방향에 있다. 저 바다 쪽으로는 가도 가도 결코 닿을 수 없다. 수화기를 꽉 움켜쥔 채 황금빛 바다를 향해 선 나는, 저 바다 건너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저예요, 샤오징小晶. 당신 딸…… 기억하시나요?”
2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지치면 밖으로 나가 걷는다. 가끔은 친구를 만나 함께 걷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걷게 되면 동행에게 마음의 절반을 빼앗겨, 주변 풍경에는 나머지 절반의 마음만 쏟게 된다.
풍경을 즐기고 싶다면 혼자 걸어야 한다. 그래야 풍경과 온전하게 만날 수 있다.
희미한 여명 아래 돌계단을 내려가는 꼬부랑 할머니가 보인다. 산꼭대기까지 이어진,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의 모습은 벼이삭처럼 작고 연약해 보인다.
버려진 폐가의 무너진 담장 아래 누운 게으른 얼룩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짙푸른 나팔꽃이 향기를 내뿜고 있지만, 얼룩 고양이는 무심하게 허리를 쭉 편다.
어슴푸레한 밤의 가로등이 보인다. 흰색 담에 비친 변전상자의 그림자와 늘어진 가로수 가지의 그림자가 겹쳐,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속삭이던 발코니처럼 보인다.
시인 저우멍뎨周夢蝶1의 얼굴이 보인다. 손을 흔들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버스가 그 앞에 멈춰 선다. 버스가 멋진 액자라도 된 듯, 네모난 창문 속에 그의 얼굴이 쏙 들어간다.
봉황목 가지에 내려앉은 물까치가 보인다. 붉은 꽃이 만개한 어린 가지가 그 무게를 못 이기고 축 늘어진다. 운동화만한 고깃배가 보인다. 소리도 없이 어느새 내 왼쪽 창에 나타났다.
내 사진 솜씨는 유치원생 수준이다. 이론은 물론이고 작동법조차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떠돌며 풍경과 만나면서, 세상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눈도 마음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당신이 이 꽃을 보기 전에는,
이 꽃은 당신처럼 외로운 존재.
당신이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꽃의 빛깔이 선명해지니,
이 꽃이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의 풍경이 내 마음에 이토록 뚜렷한데, 어찌 내 마음 밖에 있다 하겠는가? 사실 중요한 것은 카메라가 아니다. 카메라는 내 눈의 독백이고 내 마음의 주석註釋일 뿐이다. 그래서 길을 나설 때 늘 카메라를 배낭에 챙긴다. 그리고 내킬 때마다 꺼내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의 마음을 담는다.
눈에 들어온 모든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차곡차곡 모은 모든 순간에서 나는 어떤 절박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아름다운 순간은 조금만 느슨하게 쥐어도 금세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아주 조금만 느슨해도……
3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그리고 미국을 통틀어 가장 널리 읽힌 글이 <눈으로 하는 작별>이다. 사람들 말로는, 이 글을 읽어보라고 이메일을 보내는 친구가 최소한 열 명이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글은 <믿음과 불신 사이>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중국이라는 집단 영혼이 어떤 벽에 부딪히면서, 그동안 절대적으로 믿었던 어떤 것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끼고, 이제 다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기 때문일까. 하지만 타이완이나 다른 나라에서 믿음의 문제는 이제 더이상 절실하지 않은가보다. 그들에게는 은밀하고 개인적이어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실’과 ‘떠나보냄’이 가장 큰 아픔이 아닐까.
알 수 없다. 사람은 같은 ‘꽃’ 앞에 서서, 서로 다른 모습들을 그려내고 서로 다른 빛깔을 찾아내는 존재니까.
여행자인 나는 한동안은 믿었다가 다시 한동안은 믿지 못했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도 여전히 어떤 믿음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이제 세월 앞에서 믿음이나 불신 모두 별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 책은 그 긴 세월에 대한 침묵과 생명에 대한 작별의 결과물이다.
4
정말, 어렵다.
1 1921~2014, 본명은 저우치수(周起述). 중국 허난(河南) 출신의 타이완 시인으로, 타이완 제1회 ‘국가문학상’을 수상했다. 가정 형편과 전란으로 인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입대했다가 퇴역 후 1952년부터 시를 발표했는데, 평생 다섯 권의 시집만 남길 정도로 과묵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다.
차례
서문
이 꽃을 바라보는 순간
1부
목송目送
눈으로 하는 작별 | 엄마 딸 | 열일곱 살 | 사랑 | 홀로 가야 하는 길 | 외로움 | 믿음과 불신 사이 | 그때, 우리는 | 선명해지는 것 | 무엇 | 함께 늙기 | 만약에 | 넘어졌을 땐_K에게 | 걱정 마 | 화장 | 겨울 빛깔 | 산책 | 누구를 위해 | 클럽 | 집으로 가는 길 | 오백 킬로미터 | 시간 | 엄마와의 대화 | 비밀계좌 | 행복 | 마지막 오후의 티타임
2부
풍경
두견새 | 우울증 | 우리 동네 | 헬렌 | 화재 경보 | 폭풀람 | 원숭이 마피아 | 도시의 원주민 | 두보杜甫 | 댄스 플로어 | 큐빅 팔찌 | 침향沈香 | ‘지뢰 조심’ | 애기장대 | ‘보통 사람들’ | 서울 | 나라 | 홍콩 | 눈처럼 새하얀 천 | 복제된 샛별 | 노래기 | 상식 | 치치淇淇 | 늑대가 온다 | 또다른 이민자 | 울남 하늘 | 꽃나무 | 흉가 | 새해 | 메콩강 뱃길 | 시간이 멈춘 곳 | 연꽃의 나라 | 느리게 보기
3부
시간
심연深淵 | 무장해제 | 반야심경 | 여인 | 틀니 | 동창회 | 고비 | 노자老子 | 걸음마 | 눈 | 말 | 작별 | 공空 | 1918년, 겨울 | 귀혼歸魂
안드레아가 첫 등교를 하던 날,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몇 블록을 걸어 빅토리아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때는 9월 초, 집집마다 정원의 사과나무와 배나무에 크고 작은 열매들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열매 때문에 담장 밖으로 축 처진 나뭇가지에 지나가는 행인들의 머리카락이 걸리기도 했다.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엄마 아빠의 든든한 손에 고사리손을 맡긴 채 겁먹은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생애 첫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치원을 졸업하긴 했지만, 하나의 끝이 곧 또다른 시작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에는 아직 어린 아이들이었다.
수업 종소리가 울리자, 잠시 우왕좌왕하던 사람들이 이내 서로 다른 목적지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내 눈에는 내 아이의 뒷모습만이 정확하게 들어왔다. 마치 갓난아기 수십 명이 동시에 울음을 터뜨려도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정확하게 구별해내는 엄마들처럼. 알록달록한 책가방을 등에 메고 걸어가던 안드레아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아득한 시공의 강을 건너가기라도 하는 듯. 안드레아의 시선과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내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아이의 자그마한 뒷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안드레아는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 교환학생으로 일 년 동안 미국에 가게 되었다. 공항에서 우리는 작별의 포옹을 했다. 내 머리가 아이의 가슴께에 겨우 닿았다. 마치 기린의 다리를 붙들고 선 기분이었다. 안드레아는 엄마의 깊은 사랑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듯 보였다.
출국심사를 기다리며 지루하게 늘어선 줄을 따라 천천히 나아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나는 줄곧 눈으로 뒤쫓았다. 마침내 안드레아의 차례가 되었다. 창구 앞에서 잠시 멈춰 섰던 아이는 여권을 돌려받더니 순식간에 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기다렸다. 잠깐이라도 뒤돌아보지 않을까. 하지만 아이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스물한 살이 된 안드레아는 공교롭게도 내가 강의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이는 등교할 때 내 차에 타길 꺼린다. 어쩌다 차를 타도 언제나 이어폰을 귀에 꽂고 혼자서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은 굳게 닫힌 문을 떠오르게 한다. 가끔씩 나는 아파트 창밖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안드레아의 모습을 내려다보곤 한다. 늘씬한 청년이 회색빛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나처럼 저 아이의 마음속에도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가 있겠지만, 상상에 그칠 뿐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버스가 도착한다. 아이의 뒷모습이 버스 안으로 사라진다. 버스가 떠나자 텅 빈 길가에는 우체통만 덩그러니 남는다.
나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깨닫고 있다. 나의 외로움은 어쩌면 또다른 뒷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박사학위를 받고 타이완으로 돌아온 나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강의 첫날, 아버지는 사료를 나를 때 쓰던 낡고 작은 트럭을 몰고 학교까지 나를 데려다주셨다. 도착하고 나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학교 정문으로 가지 않고 옆문이 있는 좁은 골목에 차를 세웠다. 아버지는 손수 짐을 내려주고 나서 다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하지만 바로 출발하지 않고 창문을 내리고는 얼굴을 내밀고 말씀하셨다.
“이 차는 대학교수가 탈 만한 차가 아닌데, 너한테 미안하구나.”
아버지의 초라한 트럭이 조심스럽게 방향을 돌려 털털 소리를 내며 검은 연기만 남긴 채 골목 밖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트럭이 안 보일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옆에 짐을 부려둔 채로.
주말마다 병원으로 아버지를 찾아뵌 지도 벌써 십 년이 되었다. 휠체어를 밀면서 산책을 하다보면, 아버지는 어느 틈엔가 잠이 들어 고개를 가슴께로 떨어뜨리곤 했다. 가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가 배설물로 흠뻑 젖을 때면, 나는 무릎을 꿇고 손수건으로 바지를 닦아냈다. 그런 날에는 치마에 배설물을 묻힌 채 타이베이로 출근해야 했다. 간호사에게 휠체어를 넘긴 후 나는 핸드백을 들고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휠체어가 자동 유리문 앞에 잠시 멈춰 서더니 이내 안으로 사라졌다.
항상 나는 어둑해질 무렵에야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나무관이 마치 크고 무거운 서랍처럼 천천히 화장장 아궁이 속으로 미끄러져들어갔다. 나는 아궁이에서 채 오 미터도 되지 않는 곳에 서 있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어도 되는 줄은 몰랐다. 가랑비가 바람에 날려 회랑 안으로 들이쳤다. 비에 젖어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면서도 나는 눈을 떼지 않고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는 이 순간을 영원토록 눈 속에 담으려는 듯.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해해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부모와 자식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점차 멀어지는 서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이별하는 사이가 아닐까. 우리는 골목길 이쪽 끝에 서서, 골목길 저쪽 끝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 뒷모습이 당신에게 속삭인다. 이제 따라올 필요 없다고.
세계 어느 곳에 가든 나는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건다. 전화가 연결되면, 첫마디는 언제나 같다.
“저예요, 엄마 딸.”
국제전화일 경우, 나는 기다린다. 세 마디 말이 아득한 대기권을 건너 엄마의 귀에 가 닿을 때까지 조금은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러면 대답이 돌아온다.
“위얼雨兒? 내게 자식이라곤 위얼 하나뿐인데.”
“네, 저예요.”
“오, 위얼이구나. 지금 어디니?”
“홍콩이에요.”
“왜 통 날 보러 오지 않니? 언제쯤 올래?”
“어제 갔다가 오늘 아침에 헤어졌잖아요.”
“그래? 기억이 안 나는구나. 그럼 언제 또 올 거니?”
“일주일 후에요.”
“그런데 누구세요?“
“엄마 딸이에요.”
“위얼? 내게 자식이라곤 위얼 하나뿐인데. 지금 어디니?”
“홍콩이에요.”
“왜 통 날 보러 오지 않니? 언제쯤 올래?”
……
핑둥屏東1으로 엄마를 찾아뵐 때면, 이제 혼자 자는 게 편하지만 꼭 엄마 곁에서 같이 잔다. 아이를 돌보듯이 이불을 잘 덮어주고, 좋아하는 옛날 노래를 틀어주고, 화장실의 작은 등만 남기고 불을 끈 다음 옆에 누웠다가, 엄마가 잠들면 그제야 일어나 글을 쓴다.
조금씩 어둠이 걷히는 새벽, 엄마는 어느새 깨어나 아무 말 없이 내 곁에 앉는다. 나이든 여인은 다 그런 걸까? 몸이 점점 왜소해지면서 발걸음도 가벼워지고 목소리도 작아진다.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감이 점점 희미해진다. 나이든 여인은 다 그런 걸까?
나는 쓰던 글을 멈추지 않고 말한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우유라도 데워드릴까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가만히 속삭인다.
“그쪽은 내 딸을 닮았네요.”
나는 고개를 들고 엄마의 성근 흰머리를 어루만지며 말한다.
“엄마, 맞아요. 제가 엄마 딸이에요.”
엄마는 깜짝 놀라 나를 쳐다보고는 금세 기뻐하며 말한다.
“어쩐지, 아무래도 닮았다 했더니 정말로 너로구나. 그러고 보니 이상하지. 어젯밤에 누군가 곁에 누워 계속 보살펴주면서 내 딸이라고 하더라고. 정말 이상한 일이야.”
“어젯밤의 그 사람이 바로 저예요.”
나는 차가운 우유를 유리컵에 따라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린다. 멀리서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다.
“넌 어디서 왔니?”
엄마의 얼굴은 조금 당황한 듯 보인다.
“타이베이에서 엄마 보러 왔잖아요.”
“왜 타이베이에서 와?”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애쓰면서, 엄마는 따뜻한 우유를 받아든 채 계속 캐묻는다.
“내 딸이라면, 왜 내 곁에 있지 않지? 내가 키우지 않아? 누가 널 데려가 키우는 거니?”
나는 다시 옆에 앉아 엄마의 깡마른 손을 감싸쥐고 엄마의 눈을 들여다본다. 엄마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다. 어슴푸레한 여명 속 눈동자의 맑은 빛이 젊은 시절 찬란했던 광채의 여운인지, 촉촉이 고인 눈물의 반짝임인지 모르겠다. 나는 차근차근 얘기를 시작한다.
“엄마에게는 자녀가 모두 다섯 명 있어요. 그중 하나는 중국에 두고 왔고, 넷은 타이완에서 자랐죠. 엄마는 네 아이를 모두 훌륭하게 키웠어요. 셋이나 박사가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돈을 무지 잘 벌어요. 모두 엄마가 길러내셨어요.”
엄마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하다.
“그렇게들 잘 컸어? 그럼…… 너는 어떤 일을 하니? 나이는? 결혼은 했고?”
우리의 대화는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금씩 환해지던 거실에 어느새 햇빛이 쏟아져들어온다.
가끔씩 도우미 아주머니에게 엄마를 타이베이까지 모시고 오게 한다. 그럴 때는 공식 일정을 줄이고 엄마와 함께 하루 코스의 타이베이 관광에 나선다. 첫 코스는 온천욕이다. 뜨거운 김이 솟는 온천탕 속에 앉은 엄마는 벌거벗은 여인들에게서 호기심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하나하나 품평을 시작한다. 누군가를 가리키려 뻗는 손을 내가 재빨리 잡아 끌어내리면, 엄마는 웃으며 말한다.
“하, 미안하구나. 저 여자는 정말, 크네.”
다음 코스는 버스 드라이브다. 먼저 벚꽃길을 통과하는 5번 버스를 탄다. 차창 밖으로는 온통 벚꽃이 만개해 있고, 엄마는 창밖 풍경을 조용히 바라본다. 분홍빛 벚꽃을 배경으로 유리창에 비친 엄마의 얼굴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엄마의 눈동자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 먼 곳을 떠돌기라도 하는 듯 아득해 보인다.
버스는 기차역에 도착한다.
“엄마, 고속열차 타는 거 처음이시죠? 여기 앉으세요. 사진 찍어드릴게요.”
프레임 속, 양손을 무릎 위에 살포시 얹고 우아하게 앉은 엄마 뒤쪽으로는 푸른 숲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 한 노인의 지친 뒷모습이 함께 들어온다.
“엄마, 웃는 모습이 보고 싶어요.”
엄마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어 보인다. 그제야 엄마가 하얀 칼라가 달린 검은색 원피스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마치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소녀 같다.
1 타이완 섬 최남단의 행정구역으로, 타이완 섬의 북쪽 끝에 해당하는 타이베이에서는 직선거리로 사백 킬로미터, 고속도로로 오백 킬로미터의 여정이다.
강연차 케임브리지를 방문했을 때, 독일에 있는 둘째아들 필립이 나를 보러 오기로 했다. 히드로 공항에서 케임브리지까지는 버스로 두 시간 삼십 분쯤 거리였다. 나는 버스정류장까지 걸어서 마중 나가기로 했다. 우산 위로 보슬비가 떨어지고 하얀 비둘기가 스치듯 날아간다. 16세기 풍의 붉은 벽돌 건물들을 하나하나 지나치고, 싱그러운 연초록의 잔디밭을 가로질러 나는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작은 정류장 지붕 밑은 비를 피하려는 사람들로 이미 가득했고, 나는 바깥쪽에 서서 기다리기로 했다.
원앙새 한 쌍이 서로의 목을 감은 채 나무 그늘 속에 잠들어 있고, 드넓은 풀밭을 가로지르는 진흙길 위로는 거위들이 줄을 지어 뒤뚱뒤뚱 걸어오고 있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일장 장터로 향하는 아낙네들 같았다. 가까이에서 보니, 거위라고 생각했던 것은 케임브리지에서 한 철을 나는 캐나다 야생 기러기였다.
잇따라 버스가 도착했다. 모두 히드로 공항에서 출발한 차들이었다. 버스 문 밖으로 하나둘 내려오는 사람들 가운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산을 쓰고 있어도 보슬비는 점점 신발과 바짓단으로 스며들었고, 추위에 손도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기다림이란─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리는 것이 얼마 만인가. 낯선 소도시에서 열일곱 살 된 아들이 타고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느낌이란─달콤한 행복이라고나 할까.
드디어 필립이 내렸지만, 나는 곧장 다가가지 않고 멀찌감치 서서 버스 짐칸에서 가방을 꺼내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내아이 특유의 귀엽고 동그란 얼굴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열일곱 살 소년은 이제 광대뼈가 불거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바닥까지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처럼 상쾌했던 그 갓난아이의 눈동자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나를 발견한 아이의 눈동자는 솟구치는 감정을 눌러 숨긴 듯 그윽하고 깊었다.
준비한 우산을 건넸지만 필립은 받지 않았다.
“거의 그쳤어요.”
“감기 걸릴라.”
“필요 없어요.”
가느다란 빗방울에 필립의 머리카락이 젖어들었다.
갑자기 나의 열일곱 살 시절이 생각났다. 기어이 우산을 챙겨 넣어주곤 했던 엄마에게 얼마나 짜증을 냈던가.
날이 개자 우리는 캠 강변을 걸었다. 젊은 시인 쉬즈모徐志摩1가 사랑했던 캠 강이 이토록 작은 다리 밑을 흐르는 냇물이었던가. 풀밭과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구불구불 조용히 흐르는 냇물. 냇물을 따라 조금 더 깊이 들어가자 어느새 주변은 온통 향기로운 들꽃으로 뒤덮여 있다. 이 들꽃이 혹시 《시경詩經》에서 ‘미무蘼蕪’라고 부르고 《초사楚辭》에서 ‘강리江離’라고 부르는 향초일까? 꽃이 만발한 풀밭을 지나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시냇물 위에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흰 셔츠라도 떨어뜨린 걸까?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것은 날개 아래 긴 목을 파묻은 채 한가로이 잠든 어미 백조였다. 그 옆에는 새끼 백조가 혼자서 수면에 비친 제 그림자와 놀고 있었다. 나는 풀숲에 무릎을 대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왠지 모를 감동으로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내 모습에, 필립이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어린애같이!”
로열 칼리지 맞은편에서 아침을 먹었다. 전형적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가 나왔다. 달걀, 쇠고기, 소시지, 버섯, 토마토 볶음…… 너무 기름져 부담스러웠다. 포크와 나이프를 집어들다가 불쑥,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유레카!”
필립이 빤히 쳐다보았다.
“원래 빵이랑 잼 정도의 간단한 아침식사를 ‘콘티넨털 브렉퍼스트’라고 하잖아. 그래서 이렇게 상대적으로 부담스러운 아침식사를 ‘영국식’이라고 이름 붙인 것 아닐까.”
아이는 웃지도 않고 핀잔을 주었다.
“호들갑은…… 이제야 아셨어요?”
천천히 과일잼을 바르며 필립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영국인과 유럽인을 구분해서 말하는 거예요. 서로 너무나 다르니까요. 영국인은 영국인일 뿐, 유럽인이 아니에요.”
트리니티 칼리지 앞에서 나는 말라비틀어진 작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나무가 뉴턴의 사과나무 후손이라네.”
“어린애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마세요.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요.”
중세풍의 고풍스러운 거리를 벗어나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아프리카인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짐바브웨 대통령의 독재 폭압 정치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피켓에 쓰인 것을 읽어보니, 해외 망명자 수와 참혹한 경제지표가 놀라울 정도였다. 그동안 수단 내전에는 관심을 가졌지만 짐바브웨의 독재에 대해서는 몰랐다고 내가 말했다.
“그래요? 짐바브웨는 원래 ‘아프리카의 파리’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나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였는데, 무가베 대통령의 독재 때문에 이제 아프리카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로 전락했어요. 게다가 심각한 기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고요.”
세인트존 칼리지를 지나다 커다란 밤나무 앞에서 긴 꼬리를 가진 산꿩 한 마리를 발견했다. 흥분한 내가 아들에게 보여주려고 산꿩을 가리켰지만, 아이는 몸을 돌려 앞서가버렸다. 다섯 걸음쯤 가더니 그제야 아이는 멈춰 서서 말했다.
“엄마, 제발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좀 마세요. 엄마랑 외출할 때마다 정말 난처하다니까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집 밖에 나와 세상 구경하는 다섯 살짜리 꼬마처럼 왜 그러세요!”
1 1897~1931, 저장(浙江) 출신의 시인 겸 수필가. 본명은 쉬장쉬(徐章垿)로, 1921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유학 시절 쉬즈모로 개명했고, 1924년부터 베이징대학 등에서 가르쳤으나 1931년 비행기 사고로 요절했다.
케임브리지에서 런던으로 오는 길에, 우리는 렘브란트 호텔에 묵었다. 네덜란드의 위대한 화가의 이름을 딴 이 호텔은, 그 이름만으로도 위상과 품격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내심 웅장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을 기대하며 커튼을 젖혔지만, 건물 뒤편 정원 쪽으로 나 있는 창밖으로는 저 멀리 벽돌로 지은 낡고 평범한 아파트가 보일 뿐이었다. 살짝 실망하면서 커튼을 치고 돌아서는데, 언뜻 건물의 윤곽과 색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와 엷은 자줏빛 커튼이 살짝 나부끼고 있었다. 순간 건물 자체는 희미해지고 세월에 빛이 바랜 외벽의 색깔과 검은 윤곽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격자무늬 창틀의 배치마저 신비롭게 느껴지고, 서로 의지하듯 늘어선 건물들이 비밀스러운 대화라도 나누는 듯했다.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올라 정적을 깰 때까지, 나는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크롬웰 거리를 따라 버킹엄 궁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고등학교 2학년인 필립은 독일어 시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토론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니?”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본다. 나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 책을 읽었다. 1969년, 타이완에서 나는 괴테와 충야오瓊瑤1를 함께 읽었다.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처음 간행된 이후 이천 명이 넘는 유럽의 청년들이 사랑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피비린내 나는 원정중에도 이 소설을 한시도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는 말도 있다.
“엄마는 믿기 어렵겠지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필립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대로 ‘순수한’ 사랑을 맹신해서는 안 된다. 사랑이 지속되려면 두 사람 사이에 ‘상호 이익’이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랑은 결코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깜짝 놀라 아이를 쳐다보았다.
“너도 그 말에 동의하는 거니?”
필립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나의 열일곱 시절을 떠올렸다. 나와 또래 친구들은 충야오를 맹신했다. 남자라면 모름지기 고통을 감춘 듯 깊은 눈동자를 가져야 하고, 여자라면 차갑고 작은 손과 미치광이처럼 불꽃 튀는 열정을 가져야 했다. 사랑은 육체가 아닌 영혼으로 하는 것이고, 회오리바람처럼 한순간에 인생이 휩쓸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야말로 아름답고 낭만적이며 순수한,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필립은 친구 존을 예로 들면서 말을 이었다.
“들어보세요. 존의 부모님은 이혼했는데, 존의 아빠는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랑 오래갈 것 같아요. 첫째, 존의 아빠가 은행 지점장이고 여자친구는 비서거든요. 그녀는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겠죠. 둘째, 존의 엄마는 대학 학장인데, 존의 아빠가 그걸 못 견뎌했어요. 학식이나 지위, 두뇌 모두 자기보다 못한 비서를 사귀면서 존의 아빠는 자신감과 안정을 되찾았죠. 이런 ‘상호 이익’이 있으니 두 사람은 아마 오래 만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일곱의 내 아들을 다시 보았다.
“맙소사, 네가 그런 것까지 어떻게 아니?”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길에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 지금은 21세기예요.”
저녁이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극장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아르헨티나 페론 총리의 부인인 에바 페론의 일생을 소재로 한 뮤지컬 <에비타>가 상연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마오>의 익숙한 선율이 극장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흔여덟의 페론 장군이 자선 무도회에서 스물넷의 에비타를 운명처럼 만난다. 로맨틱한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부드러운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에비타가 춤을 추며 페론에게 다가간다. 나는 필립에게 속삭였다.
“저기, ‘상호 이익’이 또 나오는구나……”
필립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엄마, 제발…… 전 이제 겨우 열일곱이에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자꾸 강조하지 마세요. 독일어 선생님도 엄마도 모두 사랑을 부정하지만, 전 이제 열일곱 살이라고요. 아직은 무언가는 믿어야 할 나이 아닌가요?”
무대를 쳐다보고는 있었지만, 한참 동안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의 질문에…… 휴,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들어오는데도, 필립은 아직 자고 있다. 커튼을 젖히고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풍경을 확인하며 생각해본다. 이 평범한 일상 속에 오히려 크나큰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1 1938~, 타이완의 유명한 애정소설 작가로, 대부분의 소설이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되어 크게 성공했다.
오만 명의 사람들이 타이중臺中1의 노천극장으로 모여들었다. 밤바람을 타고 흘러가던 구름들이 살짝살짝 달빛을 가렸다. 그다지 밝지도 둥글지도 않은 달은 대충 손으로 반을 갈라 식탁 위에 놓아둔 자몽 반쪽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극장에 들어서자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객석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막히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오만 명이 동시에 자리에 앉는 순간, 침묵조차 엄숙한 선언 같았다.
노랫소리가 부드러운 비단 띠처럼 어두운 동굴 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와 저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끌어내자, 관객들은 박자에 맞추어 손뼉을 치면서 저도 모르게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힘찬 박수로 감동을 표현하긴 했지만, 젊은이들처럼 함성을 지르며 춤을 추거나 무대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미 사오십대였다.
내 오랜 친구인 차이친蔡琴2이 등장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둘째 줄 정중앙에 앉아 조용히 친구를 바라보았다. 이게 얼마 만인가. 더 마르지는 않았나. 얄밉게도 첫 줄에 앉은 두 사람의 머리가 내 시야를 가렸다.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이자 두 사람의 머리 사이로 그녀가 겨우 보였다. 오늘 밤 차이친은 미풍에 소매가 살짝 나부껴 더욱 우아해 보이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기자들이 무대 앞으로 몰려들고, 카메라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그녀는 오늘 ‘노래’가 아니라 다른 ‘일’ 때문에 다들 몰려온 것 아니냐며 재치있게 인사말을 던졌다. 전주가 깔리면서 그녀의 청아한 노래가 시작되었다. “누군가요, 나의 창문을 두드리는 그대는. 누군가요, 나의 가슴을 울리는 그대는……” 강물처럼 깊고 황혼처럼 쓸쓸한 목소리가 좀처럼 깨지 않는 숙취처럼 관객들을 휘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을 감돌던 그 여운이 막 사라지려는 찰나, 관객들은 열정적인 박수로 화답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제 인생이 아니라 제 노래랍니다.”
그녀는 그렇게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속에서 꼼짝 않고 그녀를 주시했다. ‘일’이란 올해 쉰아홉이었던 에드워드 양 감독의 죽음이었고, ‘인생’이란 그녀 자신의 인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어느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제 인생을 걸었던,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이 죽었다. 차이친, 네 노래의 어느 가락이 슬픔에 찬 애도이고, 어느 가락이 작별의 인사이며, 어느 가락이 새로운 약속일까. 또 어느 가락이 너 자신을 위한 영원한 준비일까.
앞자리에 앉아 내 시야를 가린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은 후즈창胡志強3이었다. 그는 일 년 전 중풍을 앓고 난 뒤로 다리를 약간 절었다. 그래서인가, 뒷모습이 더 우직해 보인다. 그 곁에 바싹 붙어앉은 이는 큰 사고로 한쪽 팔을 잃은 그의 아내였다. 후즈창은 아내의 가냘픈 손을 들어 자신의 뭉툭한 손과 맞댔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했던가. 모진 세월을 함께 견뎌낸 두 손이 합쳐져 박수가 만들어졌다.
나머지 한 사람은 정치가 마잉주馬英九4였다. 오만 명의 관객과 함께 앉아 있긴 하지만 그는 과연 노래를 즐기고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쉬지 않고 달리고 있다. 호탕하고 유쾌한 그의 모습 뒤에는 지독한 외로움이 있다. 마잉주와 그 정적政敵들이 몰고 가는 차에 ‘후진’ 기어는 없다. 물론 ‘중립’ 기어도.
우리 세대는 구불구불한 역사의 산길을 걸어왔다. 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게 늘어선 채, 우리는 서로 밀치고 밀리며 그 길을 걸어왔다. 때로는 서로 피 터지게 싸우고 또 때로는 상대의 생채기를 보듬어주면서. 묵묵히 앞장섰던 나이 지긋한 이들은 갈림길 앞에서 갈팡질팡하기도 했지만 냉엄한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그들부터 줄의 맨 끝에 선 이들까지, 우리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같은 공기를 호흡했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걸어온 동시대인이었다.
차이친이 <당신의 따스함처럼>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지막하게 노래가 울려퍼지자, 사람들이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 해 어느 날인가요. 세상이 무너진 얼굴이었죠.
어렵게 꺼낸 작별의 말에, 모든 것이 사라져갔어요.
쉬운 일은 아니었죠. 하지만 우리는 울지 않았어요.
소리없이 왔던 사랑을, 이제 아름답게 보내야겠죠.
나는 모자챙을 깊이 내려 시선을 피했다. 참으려 했지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오늘은 7월 7일 밤이다. 앞장섰던 이들 중 한 사람인 선쥔산沈君山5선생이 중풍으로 쓰러져 혼수상태에 빠진 지 이틀째다. 여기 오만 명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기고 있다. 박수소리, 웃음소리, 노랫소리가 도시의 화려한 불빛 속에 섞여들며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평생을 과학자이자 교육자로, 그리고 위대한 바둑기사로 추앙받던 선쥔산 선생은 홀로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 온전히 혼자서.
그는 알 것이다. 현자라면 누구나 아는 가슴 시리도록 차가운 현실을. 어떤 일은 혼자 해내야 하고, 또 어떤 고비는 혼자 넘어야 하는 것처럼, 어떤 길은 온전히 홀로 가야만 한다는 그 사실을.
1 타이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인구 약 300만의 대도시로, 2010년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2 1957~, 타이완 가오슝(高雄) 출신의 가수 겸 배우, 방송 진행자. 1979년 <당신의 따스함처럼>이라는 곡으로 데뷔하여 다수의 음악상을 수상하였다. 1985년 에드워드 양(1947~2007) 감독과 결혼했고 1995년 이혼했다.
3 1947~, 타이완의 정치가.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유학했고, 타이중 시 시장, 국민당 부주석 등을 역임했다.
4 1950~, 정치가, 중화민국 제12대 대통령. 홍콩에서 태어나 1952년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며, 타이베이 시 시장, 국민당 주석 등을 거쳐 2008년에 팔 년간 집권한 민진당의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5 1932~, 바둑기사이자 물리학자로, 1994~1997년 타이완 국립칭화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한때 나는 타이베이 시의회 의사당에 몸담고 있었다. 그 정치판에서는 번뜩이는 언어의 칼날이 사람들의 목덜미를 위협하곤 했다. 의원들이 마이크를 잡고 늑대처럼 포효하면 공무원들이 답변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그 사이로 기자들의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지는 난장판을 지켜보던 나는, 카메라 줌을 밀어내듯 눈동자의 초점을 멀리 옮겨보았다. ‘펑’ 하고 사라지는 마술처럼, 싸움판이 저 멀리 자그맣게 밀려나며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순간, 벌어진 입, 부릅뜬 눈, 과장스런 몸짓, 책상을 내리치는 손이 모두 흑백 무성영화의 슬로모션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태풍의 눈 속에 앉아 있는 것처럼, 사위가 죽음처럼 고요해졌다. 그리고 그때, 하늘을 누렇게 뒤덮은 황사처럼 재빠르고, 귀신처럼 소리없는 외로움이 다가와 어느새 나를 옥죄어왔다.
언젠가 나는 한 달 동안 산장에 칩거한 적이 있었다.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고, 매일 발코니에 앉아 해가 지는 시각과 해가 산등성이와 만나는 지점의 변화를 기록했다. 가끔 길 잃은 새가 집 안으로 날아들어, 서가 이쪽저쪽으로 파닥거리며 출구를 찾아 헤매기도 했다. 끈적끈적한 날씨 속에서 발코니로 이어지는 큰 창을 활짝 열어젖힌 채,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저 멀리 산꼭대기에 걸린 뭉게구름을 지켜보곤 했다. 산봉우리 저쪽에서부터 천천히 다가온 구름들이 발코니를 지나 거실까지 성큼 들어와서는 나를 에워쌌다가, 방방마다 흘러들어가 자그마한 구름 뭉치들로 흩어져서는 창문으로 빠져나가 다시 산속 운무로 돌아가곤 했다.
냉장고는 늘 비어 있었다. 내 생사를 확인하러 산을 찾아올 때면, 친구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냉장고는 항상 비어 있었다. 동사무소의 자원봉사자가 독거노인을 돌보듯이, 친구들은 늘 우유나 빵을 챙겨왔다. 먹을 것이 떨어지면 나는 해질 무렵 산책을 나갔다. 길옆으로는 농부의 텃밭이 있기 마련이었고, 거기엔 항상 이런저런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몇 줌 뜯어서 집에 돌아오면 한 끼 국거리로 충분했다.
여름 밤하늘은 가끔 짙푸른 색을 띤다. 산등성이 가까이, 낮은 하늘에 샛별이 나타나면 곧 달이 떠오른다. 울창한 숲속의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면 나뭇잎이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