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향하여
나의 행자시절 2
박원자 엮음
다할미디어
저작권 박원자
박원자 엮음
디자이너 최성수, 최윤정
2008. 1.25 인쇄
2008. 1.30 발행
출판사명 다할미디어
주소 (우) 135-010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20번지 광윤빌딩 3층
전화 (02) 3446-5381~3
팩스 (02) 3446-5380
ISBN 978-89-89988-53-3
978-89-89988-51-9 (세트)
홈페이지 http://www.dahal.co.kr
전자메일 dahal@dahal.co.kr
발행인 김영애
제작일 2008.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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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제 출가를 기쁘게 받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머니!│ 영진
신심은 생명이니 시처時處에 정진을 게을리 말지어다│ 원조
금강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보낸 무심의 어린 시절│ 석정
하늘 아래 겸허하게 피어 있는 구절초꽃을 바라보며 │ 환성
엮은이의 말
삶의 무대에서
가장 참되게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 대한 기록
2004년 한 해가 저물 무렵, 범어사 염화실로 무비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다. 뜻밖에 맞은 병고로 한 해 정도 고생하시다가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스님은 '행자시절' 취재를 흔쾌히 허락하고 객을 맞아들였다. 아직 쾌차 전이시라서, "스님, 한 시간만 내주세요." 했던 것이, 지난 시절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점심시간을 넘긴 채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담아 그렇게 인사를 드리자, 육척 거구의 스님께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 의미심장한 말씀을 남기셨다.
"앓고 일어나니, 언제나 지금 이 시간, 몸도 마음도 충분히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디다."
염화실 칠판에 단정히 적혀 있던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작년 여름, 지리산 연암에 사시는 도현 스님을 취재하면서 여쭈어 보았다. 비록 세 평짜리 작은 토굴이지만 세상을 다 품은 듯 넉넉해 보이는 스님께 여쭙지 않을 수 없었다.
"삶에서 주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님의 답은 한 편의 아름다운 수필 같기도 했고 명료한 철학 같기도 했다.
"현법낙주現法樂住, 자신에게 닥친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겁니다. 그러려면 항상 자기를 관조해야 합니다. 자신을 수시로 비춰 보는 일에 깨어 있지 않으면 삶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없죠."
그랬다. '행자시절'을 취재하면서 언제나 그렇게 귀한 가르침을 얻었다. 여기 백열두 분 수행자들의 '행자시절 이야기'는 그분들의 초발심 시절에 대한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삶에 있어 무엇을 지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철학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의 행자시절>, 이 책은 세상이라는 삶의 무대에서 가장 아름답게, 가장 뜨겁게, 가장 참되게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는 분들에 대한 기록이다.
월간 <해인>과의 인연은 실로 깊고 깊다. 헤아려 보니 올해 17년째다. <해인>에 연재하고 있는 '나의 행자시절'은 1996년 여름에 처음 취재를 시작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12년째를 맞는다.
그동안 참, 많은 절들을 다니면서 수행자분들을 만나 뵈었다. 맑고 청정한 스님들을 뵙고 아름다운 출가 이야기, 뜨거운 삶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청복의 순례길이었다.
이번에 출간하는 세 권의 책 가운데, 제1권은 2001년 2월부터 2004년 5월까지, 제2권은 2004년 6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모두 예순일곱 분의 글을 모은 것이다.
그리고 제3권(1996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은 2001년 5월에 출간했던 것을 편집을 새롭게 해 다시 묶었다. 미처 읽지 못했던 독자분들에겐 귀한 책이 될 것으로 믿는다.
책을 준비하기 위해 원고를 다듬으면서 보니 그간 많은 분들이 입적하셨다. 중진스님들은 어느덧 노스님이 되셨고, 비교적 젊다고 생각되었던 분들은 중진스님이 되셨다. 그만큼 세월이 흐른 것이다. '행자시절'의 첫 인터뷰 대상자이셨던 해인사 도견 스님은 얼마 전에 뵈니, 허리가 너무나 많이 굽으셨다.
'행자시절 이야기'는 스님들의 출가에 대한 글이지만, 한편으론 한 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스승에 대한 추억이기도 하고 절집안의 법도와 생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이 1900년대 초반부터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한 세기 동안의 한국 불교의 역사와 수행자들의 생활상, 선지식들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만공, 한암, 금오, 효봉, 동산, 향곡, 청담, 지월, 자운, 성철, 해안, 혜암, 일타, 청화 스님 등에 대한 상좌들의 존경과 절절한 그리움 앞에선 옷깃을 여미게 된다.
십년 넘게 '행자시절'을 글을 쓰면서 어느덧 출가를 동경하게 되었고 수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인간의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 수행에 있음을 확인했고 수행한 만큼 불성에 다가간다는 것을 확신했다. 삶의 우선순위를 수행에 두는 신심 깊은 불자로 거듭날 수 있었으니, 오랜 시간 '스님들의 행자시절'과 함께하면서 얻은 크나큰 공덕이다. 한량없는 불은에 합장한다.
2001년 5월에 <나의 행자시절>이 첫 출간되었을 때 많은 독자분들이 사랑해 주셨다. 7년 정도 흐른 뒤 다시 '행자시절'을 내는 데는 그분들의 관심과 격려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보내 주신 그분들께 감사드린다.
쾌히 인터뷰에 응해 주시고 출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백열두 분의 스님들께, 그리고 마치 고향처럼 푸근했던 해인사와 월간 <해인>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수십 년 된 사진부터 최근의 사진에 이르기까지 비장의 사진을 아낌없이 내주셨던 사진작가 김민숙 선생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세상에 처음 공개되는 성철 큰스님의 형형한 눈빛이 그대로 담겨 있는 사진은 여러 사진 가운데 백미가 될 것 같다.
또한 귀한 사진을 제공해 주신 <해인> 전 편집장 종현 스님, 인터넷 다음 카페 '금강' 운영진 여러분께도 감사드린다.
원고를 세심히 살펴 주고, 편집에 심혈을 기울여 좋은 책으로 탄생시키는 데 힘을 아끼지 않은 (주)다미디어의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무아미타불.
불기 2552년(2008) 1월, 함박눈 내리는 날에
박 원 자 합장
출가자는 머리를 깎을 때 이미 세상에서 추구하는 부귀영화의 오욕락을 버린다. 성불 이외의 출세나 오욕락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 그러므로 머물 가치가 없는 것이다.
- 혜인 스님
혜인 스님
혜인 스님
절하다 죽은 놈 없다
나는 이 세상에 와서 참으로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났다.
매운 겨울을 지내보지 못한 사람은 봄바람의 훈훈함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우리 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기로 작정하고 허락을 받기까지, 열다섯에 출가한 후의 여러 해들은 아마도 추운 겨울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출가 수행의 길에 자애로운 어머니와도 같은 스승인 일타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저 행자시절에 한 노보살님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지금 이리도 복된 출가자로 서 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행자시절 이야기를 두 분의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
열다섯에 출가해서 여러 우여곡절 끝에 우리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새롭게 재출가한 것은 스무 살 초엽이었다. 그러나 내가 우리 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동화사 선방에 방부房付를 들이고 있을 때였다. 스님은 그때 태백산에서 다섯 해 동안 홀로 수행하시다 막 나와서 선방에서 수좌들에게 조사스님들의 어록을 설하고 계셨다. 스님의 법문이 얼마나 진지하고 재미있었는지, 나는 그때를 아직 잊지 못한다.
당시 스님은 세수 서른둘.
스무 살에 '팔만대장경'을 독파해 버린 데다,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부처님께 공양한 분으로, 이미 서른 전에 비구ㆍ비구니계를 막론하고 제방에 대단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었다. 스님에게 강의를 들었는데,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정확하고 명쾌했던지 신심이 절로 나면서 스님께 굉장히 좋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후 해인사 선방으로 가서 같이 살면서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절에 들어오던 첫날로 <천수경>을 그 자리에서 다 외워 버릴 만큼 명석하고 불연이 깊은 스님은 강원에 들어가서도 바로 문리가 났으니, 필시 생이지지生而知之한 분이었을 것이다. 일가족 41명이 모두 출가할 만큼 불심이 깊은 집안이었으니, 우리 불교사에 그런 일은 다시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 스님처럼 자애로운 분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수행자로서 빈틈없이 검약하고 아랫사람들에게도 따스하게 대하셨는지, 나는 지금도 더도 덜도 말고 우리 스님처럼만 모든 사람에게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스님은 스승이기 이전에 나에게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다 가면 되는가를 보여 준 분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모질게 말씀하는 법이 없었고, 남이 가슴 아파하는 것은 눈으로 보지 못했다. 행동과 마음과 말씀이 언제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자애로웠다.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였다. 스님께서 곰팡이가 잔뜩 슬어 있는 옷을 입고 계셔서 "어디에 두셨다가 이렇게 곰팡이가 슨 옷을 입으셨습니까?" 했더니, 그때 스님 말씀이, "수좌들이 입다가 수각에 버린 옷이 장마에 썩어 버리게 된 것을 빨아 입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그런 분이었다. 속옷도 당신은 언제나 낡은 것을 입었고, 새것은 상좌들에게 나눠주셨다. 출가해 살아 보면, 그게 쉬운 것 같아도 그리 자연스럽게 되기 어려운 일인데, 스님은 언제나 그랬다. 지족암에 문안드리러 가서도 저녁에 얘기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 때면 이불을 손수 내려 주셨다. 용돈을 조금 드리면 그냥 받지 않으셨다. 붓글씨를 쓴 것 하나라도 내놓으며 "일하다 보면 필요할 거야." 하시며 주셨지, 상좌의 용돈도 그냥 받는 법이 없었다.
열다섯 살 어린 상좌 하나가 레슬링한다며 급소를 걷어차 정신을 잠깐 잃었어도, 팔씨름을 하다가 진 것이 부아가 난다며 당신의 팔뚝을 깨물어 버려도, 예의 그 자애로운 웃음으로 한결같이 따뜻한 모습이었다. 세속적으론 무례하다고 나무랄 수도 있으나, 그럴 수만 있다면 나의 스승처럼 그렇게 천진스럽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내 결론이다.
한번은 상좌 하나가 장가를 갔다. 많이 배우지 못한 그가 처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을 해서 산 지 두세 해가 지났는데도, 스님께선 승적을 정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무개가 애기 낳고 잘살고 있는데 아직 승적이 정리 안 되었습니다." 하고 좀 언짢은 소리를 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렇지만 말이야, 집안 좋고 많이 배운 그 아이 처가 내 상좌와 얼마나 살는지 걱정이 된다. 한두 해 더 두고 봐서 잘살면 정리하고, 만약 돌아오면 받아줘야 하지 않겠니? 그 애가 혹 버림받으면 오갈 데 없이 불쌍하지 않느냐?" 하시는 것이었다.
제방에서 대율사로 존경받고 있는 스님에게 때로 누가 될 수 있는 일이 발생해도 스님은 자신의 안위를 생각지 않고 상좌들의 장래를 염려하고 기다려 주었다. 나로선 상상할 수도 없던, 스승다운 거룩한 모습이었다.
또 한번은 태백산에서 스님을 모시고 살 때의 일이다. 국모를 시해한 문세광이 사형을 당하던 날, 스님께선 그를 위해 영가천도 축원을 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스님, 한 국가의 국모를 죽인 사람을 천도하십니까?" 했더니, "그래도 오늘 사형당하는 날인데 불쌍하지 않나? 사상에 얽매이고, 사람 죽이면 큰 혜택을 준다고 해서 그런 일을 저질렀을 텐데, 피어 보지도 못한 한 젊은 청년의 인생이 불쌍하지 않은가……." 하시는 것이었다.
스님은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없지만 붓글씨나 노트에 쓴 글을 보면 그 필체가 그리 좋을 수가 없다. 타고난 명석함도 있지만, 촌음도 그냥 보내지 않고 매사 노력한 분이다. 필체만 봐도 한두 해 연습해서 된 그런 실력이 아니다.
스님은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서 불법에 사무치고 사무친 마음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때 이미 과거의 모든 업장을 다 태워 버리고, "몸을 다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불법에 추호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불퇴전의 신심을 평생 잃지 않았다.
혜인 스님의 은사이신 일타 스님 ⓒ 김민숙
출가자는 머리를 깎을 때 이미 세상에서 추구하는 부귀영화의 오욕락을 버린다. 성불 이외의 출세나 오욕락은 흐르는 강물과 같은 것, 그러므로 머물 가치가 없는 것이다. 송광사의 구산 스님께서 조계총림의 방장으로 스님을 추대하고자 했을 때, 스님은 "내 이미 연비할 때 모든 벼슬과 지위를 떠났는데, 방장 자리에 앉아 양심을 속이는 법문은 하고 싶지 않다. 조용히 살다 가겠다."며 사양하셨다. 한없이 부드럽고 자애로웠으나 결정적일 때 스님은 연비했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간혹, 어떤 이들이 나를 보고 스님과 음성이 닮고 언행도 비슷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림없는 일이다. 내가 어찌 어느 누구에게나 한없이 자애로운 언행으로, 그리고 연비정신으로 일관했던 나의 스승을 백분의 일이나마 좇아갈 수 있겠는가? 대인관계에 있어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비로웠던 스승을 떠올리며 닮으려고 애쓸 뿐이다.
관음성 보살님은 내가 수행자의 길을 놓아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오게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다. 자비를 행하는 위대한 마음은 유ㆍ무식에 있는 것이 아닌, 수행에서 나온다는 것, 그래서 그 수행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준 그분을 만난 것은 힘들게 행자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착하고 모범적이던 누나가 출가를 해서 잠깐 집에 다니러 왔을 때, 삭발한 누나의 모습을 보고 울면서 '언젠가는 누나 곁에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아마도 그러한 생각이 출가를 하게 했을 것이다. 불연이 깊었는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활동을 활발하게 하면서, <금강경>, <초발심자경문>, <천수경>을 배우면서 출가에의 기초를 다졌다.
중학교 1학년 때, 수계를 하면서 '스님이 된다'는 생각을 늘 가졌으므로 고기를 일절 먹지 않았다. 한번은 고기 기름으로 튀긴 도넛을 먹고는 백일기도 회향 날에 밤새도록 울면서 참회기도를 했으니, 3학년에 올라가자 미련 없이 교복을 벗어던지고 절로 들어온 것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렵사리 어머니의 승낙 도장을 받고 윗옷 양쪽 주머니에 공처럼 둥글게 만 양말 한 켤레씩을 넣은 채 집을 나섰다. 그렇게 양말 두 켤레만을 가지고 집을 나서 이순의 나이를 넘겼으니 출가의 세월이 어언 쉰 해에 가깝다.
중학시절에 가르침을 주었던 혜철 스님에게 갔다가, 고향인 제주도 시내에 있는 한 포교당에서 채공을 하며 행자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나보다 두세 살 위인 공양주 행자가 심심하면 꿀밤을 먹이고 도망가고, 미처 찬이 준비도 되기 전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을 쳐 버리고 하는 등 어찌나 애를 먹이는지 어린 마음에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수시로 일어나곤 했다.
하루는 같이 국수를 먹다가 또 심정을 상하게 해서 울면서 그에게 국수를 뿌려 버린 적도 있다. 그와 맞지 않아 고통을 당하고 있던 어느 날, '중 노릇을 때려치우더라도 저놈을 한번 손보고 말리라' 다짐을 했다. 그를 골탕 먹일 궁리를 사흘 동안 한 끝에, 엉성한 판대기로 만든 문 위쪽에 옹이 진 장작을 올려놓았다.
문만 열면 장작이 떨어질 터였다.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부엌에서 찬간으로 올라가는 문에 하나, 찬간에서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에 하나, 이렇게 무려 세 개의 문에 장작을 끼워 놓고 나무 위에 올라가 공양주가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공양주 행자는 나타나지 않고 노보살님인 관음성 보살님이 나타나 부엌문을 여는 것이 아닌가? 문을 살짝 건드리자 큰 장작이 떨어졌고, 곧 "아이고!" 하면서 노보살님이 쓰러졌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게 아닌가.
그런데 웬일인지 노보살님이 일어나 다시 찬간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는데, 등허리에 장작이 살짝 내리쳤다. 부엌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보니 벌써 피가 많이 흘러 있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사죄를 하니 노보살님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면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 내고 계속 솟아 나오는 피를 누르면서 하는 말씀이, "행자님, 절대 이런 장난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세요. 오늘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겁니다. 빨리 바닥의 피를 닦아 버리세요. 저는 집에 가면 됩니다." 하면서 욕 한마디는커녕 눈 한번 흘기지 않고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하루도 거름 없이 조석예불을 드리러 오시던 노보살님은 그 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내 가슴이 얼마나 탔겠는가? 그런데 한 스무 날쯤 지나서 노보살님이 나타났다. 반가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에 내가 "보살님 치료비 많이 드셨지요? 제가 저희 어머니에게 말씀드려 부담을 좀 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보살님이 "저는 다 나았으니까 괜찮아요. 잊어버리세요." 했다. 그래도 내가 부담이 되어서 안된다고 치료비를 드리겠다고 우겼더니, 노보살님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주시겠어요? 그럼 제가 치료비를 말할 테니 잘 들으세요. 행자님, 행자생활 하는 게 힘들죠?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괴로워도 그만두면 안 됩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큰스님이 되어 전국 방방곡곡 돌아다니시면서 부처님 법음을 전하면서 존경받고 인정받는 좋은 스님 되세요. 이것이 행자님이 제게 주어야 할 치료비입니다."
나는 그때 부처님 법이 정말 위대한 것을 알았다. 한 촌로에 불과한 할머니에게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살아 있는 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그리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어떤 고난이 와도 결코 그만두지 않으리라 새로이 발심했다.
그 후 출가의 길에서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노보살님과의 약속을 상기하곤 했고, 노보살님의 당부처럼 지금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방을 누비고 다니며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으니, 내게 그분은 분명 선지식이었다. 그때 만약 공양주 행자가 다쳤더라면 나는 아마 세속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때 노보살님은 예순을 넘긴 나이였는데 구십이 넘어 돌아가시는 날까지 낮에 방바닥에 등을 댄 적이 없었다. 앉아서 졸지언정 결코 누운 적이 없을 만큼 수행을 잘하셨던 그분은 내게 출가의 길에서 만난 인로왕보살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잘한 것이 별로 없는데, 달랑 양말 두 켤레 들고 나와 이리 행복한 수행자로 살아가는 걸 보면 전생에 공덕을 좀 지어 놓은 것 같다.
서른 살 때의 일이다. 군대에 가 있을 때, 하루 5천배씩 20일 동안 10만배 기도를 하면서, '나이 서른이 되면 그간 알고 모르고 지은 죄, 몸과 마음으로 지은 죄를 한번 완전히 청산하리라. 죄업 청산과 부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리라'는 발원을 했었다. 그리고는 나이 서른이 되자, 해인사 백련암의 성철 스님을 찾아뵙고 "100만배 기도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했더니, 이렇게 내게 힘을 실어 주는 말씀을 했다.
"절? 좋지. 그런데 하다가 중간에 그만둘 바에는 시작하지 말고 끝장낼 작정이면 한번 해봐라."
"하겠습니다." 하는 내 결심을 듣고, 스님은 이렇게 큰스님다운 말씀을 했다.
"명심해라. 지금까지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더라도 지옥은 안 간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번 시작했으면 멋지게 회향해야 한다."
그러나 해인사 장경각에서 시작한 죄업 청산의 길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코피를 제일 많이 쏟았다. 그럴 때면 장경각에 들어가 하늘로 고개를 쳐들어 코피를 삼키고 말리고 나서 다시 절을 했다. 무릎에 고름이 들었으나 무시하고 절을 하다 보니 나중에 저절로 없어져 버렸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절을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방석 밑에 송곳이나 못이 들어 있어서 찌르는 것처럼 무릎이 아팠다. 그런 과정이 너무 괴로웠는데, 어느 눈 깜짝할 한순간 아픈 것이 더는 올라갈 것이 없을 만큼 고통의 절정을 느꼈다. 나는 그때 고통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걸 봤다. 그렇게 확실히 고통의 절정을 느낀 후부터는 전연 고통스럽지 않았다.
절을 하는 거나 안 하는 거나 똑같았다. 중간에 물론 그만두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절하다 죽은 놈 없고 절하다 죽더라도 지옥은 안 간다."는 성철 스님의 한 말씀 때문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누군가에게 "그놈, 해낸다." 하셨다고 한다. 그 말씀이, 그 믿음이 큰스님께서 내게 내린 법력이었고, 200일 만에 100만배를 무사히 마치고 수행자로 거듭나게 하는 힘이 되었다.
출가의 길에서 내 자성불을 찾고 생각하고 또한 항상 그리워하고 있는 나는 누가 뭐래도 늘 당당하다. 돌아보면 순수하기만 했던 나의 행자시절은 이리 떳떳하고 당당한 나의 출가 수행자의 길을 훤히 열어 준 고마운 시절이었다.
각성 스님
각성 스님
마음의 본체는 본디 비고 밝은 것이니
나를 절에 들어가게 한 것은 성리학의 대가이며 해동공자로 불렸던 조선의 석학이자 정치가인 이율곡 선생이었다. 열일곱이던 해, 일제강점기 때 발간된 <오천년 역사>에서 "이율곡 선생이 절에 들어가서 3년 동안 공부했다."는 내용을 읽고는 불현듯 '나도 율곡 선생 못지않게 잘 공부를 해보리라' 하고는 고향인 장성에서 가까운 백양사로 간 것이 출가에의 첫발이었다.
한학자인 할아버지 밑에서 공부하던, 한 동네에 사는 이와 함께 백양사로 가니, 당시 종정으로 계셨던 만암 스님께서 반겨 주셨다. 속가에서 한문을 읽었다고 하니까, 글까지 지어 주면서 좋아하셨다. 그런데, 백양사와는 인연이 안 되었는지, 같이 갔던 이가 돌아가겠다고 하여 그 혼자 가게 할 수 없어서 집으로 함께 돌아오고 말았다.
그 후 집에 있는데도 절에 가고픈 생각이 그치질 않아 다음 해 해인사로 들어갔다. 팔만대장경을 모신 절이라는 점과 불교에 대해 잘 아는 용성 스님의 상좌인 변월주 스님이 그곳에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간 것이었다.
때는 초여름, 흰 양복을 입은 학인 스님들이 밖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스님인지 학생인지 구별이 안 갔다. 1955년 당시는 노장님들이나 승복을 입고 있었지 젊은 스님들은 흰 양복을 입고 있었다.
불교 정화 바로 직전이었던 터라 출가하려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본사에서는 "암자로 가라."고 했다. 해서 지족암으로 올라가니 참선을 하신 영월 스님께서 내가 한학을 공부한 것을 알고는 "나는 참선만 하는 사람이니 백련암으로 가라."고 했다. 그렇게 나의 은사 스님이 되신 도원 스님을 만나 뵙고 불교를 공부하면서 그 수승함을 깨닫고는 3년 만 있으리라던 생각이 저절로 사라져 예순일곱인 지금까지 절집에 머물러 있다.
지금 칠불암에 있는 통광 스님이 돌아가신 일타 스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내가 지족암에 가기 직전 영월 스님께서 석학이었던 옛 강사스님이 지족암을 찾아왔다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는 전생에 분명 출가자였음이 틀림없다. 백양사에 가기 전에 꿈을 꾸었다. 월정 사거리에서 월정사로 들어가는 길을 나무꾼을 따라 들어갔던 꿈이 지금까지 생생하다. 나중에 월정사에 가보니 꿈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꿈에 눈에 익은 20리 길을 걸어 들어가 법당에 들어가서 가사를 걸치고 책을 한아름 가지고 나오는데, 할아버지께서 "너, 그거 가지고 나오면 이 절의 스님이 붙잡아서 중 만든다." 하시며 말렸다. 할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책을 안고 법당을 나오다가 꿈을 깼으니, 경전에 파묻혀 한평생을 산 출가의 인연은 내게 필연이었다 할 것이다.
첫눈에 선풍도골의 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은사 스님은 평생 참선만 하신 분으로 매사에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셨다. 일상생활에서도 알뜰하게 근검절약이 몸에 밴 분이었다. 스님은 행자인 내게 처음부터 아침저녁으로 참선을 시켰고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게 했다.
그리곤 남들이 하는 것처럼 부엌에 들어가 밥 짓고 나물도 장만하고 채소도 가꾸고 나무도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그랬다. 본디 예의범절이 깍듯한 유교 집안에서 자랐던 터라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하는 절집생활에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은사 스님의 꾸지람을 들었거나 한 적은 없다.
<천수경>을 외우는데 다른 것은 다 알겠으나 한자가 없어 의미를 알 수 없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외우기 힘들었다. 그리고 은사 스님께서 "각성이는 재주가 좋아서 <천수경>을 하루 만에 외웠다."고 대중들 앞에서 칭찬해 주셨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가 한학자였고, 또 그분들 밑에서 <천자문>에서부터 <명심보감>, <동몽선습>, <고문진보>, <통감>, 그리고 사서와 삼경을 다 외우고 익혀 출가를 했다. 한문이라면 이미 문리가 나 있던 내게 <반야심경>도 한자로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려워 보이진 않았다. 그런데 막상, 매일 <반야심경>을 외우다 보니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의 뜻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히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의식이 있는데, 왜 부처님께서 없다고 하셨는지, 부처님께서 망언을 하실 리가 없는데, 왜 그 도리를 모르겠는지 답답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은사 스님께 여쭤 봐도, 희랑대에서 평생 <금강경>만 공부하신 노스님께 여쭤 봐도 도통 모르겠는 것이었다. 나중엔 은사 스님이 용성 스님께서 번역하신 <금강경>을 주어서 읽어 보았으나 알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어쩌면, 5개월 남짓 되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의 나의 행자시절은 '왜, 무안이비설신의인가'라는 화두에 묶여 있었던 시간들이 아니었나 싶다. 그 시간들은 불교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생짜배기로 출가한 내게 비로소 '불교의 요체'에 눈뜨게 하는 예비의 시간들이었고, 경안經眼을 열게 한 세월이기도 했다.
'무안이비설신의'에 대한 숙제는 칠월 보름에 계를 받으면서 마감한 행자시절이 끝나도록 풀리지 않았고, 이런 나에게 은사 스님은 그해 가을, 달성군 유가사 도성암으로 가서 백일기도할 것을 명했다.
'옴마니반메훔' 육자주를 지송하라고 명했는데, 불철주야 육자주에 매달렸으나 백일이 다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지 않은가.
다음 해 가을, 나는 육자주를 내려놓고 마음을 텅 비운 채 도성암 벽안당에 홀로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범어사에서 그곳 강원 조실이신 고봉 스님께 <능엄경>을 몇 달 배우다가 도성암으로 돌아와 <능엄경>을 틈틈이 보다가 비로소 앉은 자리였다. 그야말로 허심虛心을 한 것이었는데, 내가 있는 공간도 잊어버리고 시간의 흐름도 잊어버린 그때 비로소 느꼈다.
'아……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혀도 없고 몸도 없고 의식도 없구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자리로구나.'
'무안이비설신의'에 대한 꽉 뭉쳤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공한 그 자리에 도달하고 나니 '오온이 공함'과 '불생불멸 부증불감', 그리고 팔만대장경의 모두가 이해되었다.
후에 <대승기신론>을 보면서 "삼계가 허망하고 거짓되어서 오직 하나의 마음으로 된 것이니, 마음을 떠나면 곧 육진 경계가 없다."는 말씀에서 내가 체험해서 깨달은 경계를 확증하고는 무릎을 쳤다.
그때 체험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