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해준 당신에게
제 이야기가 어떤 방식으로든
닿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작은 욕심이 있다면,
원의독백으로 시작된 이야기가
누구나의 독백으로
이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 각자의 세상에서
각자의 작은 원을 그리며
더 큰 원 안에서 만날 수 있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으려 하지 마세요.
그랬다가는 당신은 부담을 느껴 도망가고 싶어질 겁니다.
저도 야심차게 시작했다가 끝까지 못 보고
그만둔 장편 드라마가 한두 편이 아니거든요.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INFP이고 ADHD 자가 진단을
만점받은 사람으로서
얇은 책이나 짧은 영화도 한 번에
끝을 보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위해서 (죄송하지만, 저를 위주로 한)
이 책은 제 단편적인 생각을 짤막하게 엮은 책입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소설책이 아니라서 읽다가 중간에
언제든지 멈춰도 좋습니다.
그저 제 인생에서 이 책만큼은 처음 한두 페이지만 읽히고
어딘가 처박히는 책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은 <워킹 데드>보다는
<블랙 미러>나 <러브, 데스+로봇> 같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위대한 철학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전문적인 작가도 아닙니다. 그러니
수려한 필력을 기대하고 이 책을 샀다면
실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저 이 이야기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평범한 저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작점 정도라고 할까요.
저는 이 책이 지저분한 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읽다가 어떠한 생각이 불현듯 떠오른다면,
언제든 볼펜으로 끄적댈 수 있는
그런 일기장 같은 책, 대화 같은 책이요.
저 또한 제 생각이 적힌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저와 끝없는 논쟁을 하게 될 테니까요.
모든 게 다 그렇잖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죠.
학교에 처음 간 날의 설렘을 기억한다. 2013년, 갓 성인이 된 그때 나는 광주에서 막 서울로 온 어리바리한 왕자님이었다. 당시 나는 남도학숙이라는 곳에서 살았다. 전라도 학생들을 위해 교육청에서 제공한 기숙사였는데, 학교에 가려면 1호선 전철을 한 시간 넘게 타야 했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게 너무 즐거웠다. 교통카드를 사서 충전하고 대방역 개찰구에서 교통카드를 찍고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나에겐 다 모험이었다.
플랫폼에 올라 미세먼지 가득한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매캐하고 혼탁한 먼지 냄새가 어찌나 고소하던지. 거기에는 화려하고 투명한 나의 미래도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학교로 가는 길, 나는 늘 사람들을 착실하게 구경하곤 했다. 노량진에서 젊은이들이 우르르 탔고, 종각에서는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동묘앞역에서는 가끔 악당이 등장하기도 했는데, 마구 소리를 지르며 싸우던 아저씨들이 기억난다. 누구의 승리인지, 합의를 이끌지 못하고 한 분이 내렸다. 마치 대사를 끝내고 사라지는 배우처럼 극적인 퇴장이었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전철을 타는 게 너무나 고된 일이 되었다. 힘들고 지루한 과정이 되어버린 이 이동 시간을 어떻게든 보내기 위해 나는 스마트폰을 보기 시작했다.
경쟁이 치열한 한국 서버의 게이머인 나에게 전철 이동은 맵과 맵 사이의 로딩 페이지일 뿐이다.
캠퍼스에서 남은 한 학기의 시간을 대부분 혼자 지냈다. 집에서도, 전철에서도, 쉬는 시간에도, 밥을 먹을 때도. 설렘 대신 권태에 잠겨버린 대학 생활은 어느덧 얼른 지나 보내고 싶은 로딩 화면이 되어버렸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몇 년 사이 스마트폰의 화면은 더욱 커졌고 화질은 선명해졌다.
대신 현실은 보잘것없어지고 감각은 흐릿해졌다.
우리는 정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빛보다 빠른 것은 생각’이라고 하거나, 마음은 무한하달지. 근데 가만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정신은 우리의 작은 뇌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화학적 신호이기 때문에 정신 또한 물리 법칙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뇌는 대략 2,500테라바이트의 용량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보다 작구나 싶었다. 뇌가 그렇게 작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니 조금 조급해진다. 머릿속에 들어오는 정보를 좀 더 엄선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좋은 걸 보고, 내 기준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넣기로 한다. 지저분한 인스타그램 댓글이나 뉴스 댓글로 소중한 뇌 공간을 낭비할 여력은 없다.
개발자들이 격언처럼 여기는 말이 있다. “GARBAGE IN, GARBAGE OUT.” 말 그대로 쓰레기가 들어오면 쓰레기가 나온다는 뜻인데, 질이 낮은 정보가 들어가면 출력되는 결과물도 부정확함을 의미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다.
머릿속 구조도 비슷한 것 같다. 우리의 뇌는 말하자면 믹서기 같은 존재다. 넣은 것은 틀림없이 갈려 나온다. 생각으로든, 말로든, 글로든, 음악으로든, 비디오로든. 그러니까 되도록 좋은 걸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나는 변화하고 싶었다. 본능을 거스르고, 이성으로 삶을 통제하고 싶었다. 일찍 일어나 활기차게 신체 활동을 하고,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일찍 자는 삶을 살고 싶었다.
다만, 터닝 포인트를 계속 기다렸다.
흔한 다이어트 성공담처럼.
“고백했는데 뚱뚱하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미친 듯이 운동해서 3개월 만에 100kg을 뺐어요!”
나도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인생에 한 번만 찾아올지도 모를, 그런 터닝 포인트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찾아와 불씨를 당겨주기를, 당겨주기만 한다면 그 뒤로는 모든 게 저절로 활활 타오르리라 믿었다.
내게도 이따금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다. 하지만 터닝 포인트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불씨를 계속해서 살려두고 유지하는 건 결국 내 몫이다. 결심에 불이 붙지 않는 이유는 나 때문이다. 실패한 이유에 핑계를 만들어 ‘그래, 이번에도 역시 똑같네.’라고 상황을 합리화시킨, 내가 원인이었다.
작은 불꽃에 차가운 물을 끼얹는 건 언제나 나였다.
항아리 게임이란 게 있다. 캐릭터를 움직여서 산 정상으로 옮겨놓으면 되는 게임인데, 재미의 여부를 떠나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흥미를 잃고 도전을 포기했는데, 그 이유가 이 게임에는 세이빙 포인트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단계별 저장 기능이 없어서 중간에 실패하면 곧바로 밑바닥으로 떨어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한 번의 실수로 지금까지 쌓은 모든 공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인생 역시 똑같다. 세이브 기능이 없는 게임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록해야만 한다. 기록하지 않는 인생은 항아리 게임과 같다. 성공한 기억, 실패한 기억, 당시 나의 선택과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 머릿속의 아이디어, 모든 성과와 교훈은 기록하지 않으면 금방 휘발되어서 사라지고 만다. 아무리 가슴 아픈 교훈일지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다시 쌓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튜브는 내게 마치 세이브 포인트와 같다. 모든 성공과 실패가, 즐거움과 슬픔이, 경험과 교훈이 휘발되지 않도록 기록하고 남겨두는 게임의 세이브 기능처럼.
낯선 사막에서 길을 잃어 헤맨다고 가정했을 때, 긴 시간 걷고 걸으며 길을 찾는 일은 꽤 힘든 과정이 될 것이다. 심지어 돌고 돌아 지나왔던 지점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테고, 보이지 않는 목적지에 지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나가는 길목의 포인트를 횃불로 표시하면 어떨까? 어디로 걸어야 할지 모르는 건 똑같지만, 내가 표시한 횃불을 토대로, 어느 곳으로 가야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을 수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척한 길의 그 끝이 어디로 향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론가 갈 수는 있을 것이다. 시작했던 지점에서 먼 곳으로.
그리고 어쩌면 그건 발전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배달 음식의 단점으로는 너무 비싸다는 것. 살찌게 한다는 것. 양 조절이 힘들다는 것. 엄청난 쓰레기가 나온다는 것이 있겠다. 그러나 가장 나쁜 점은 편리하다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에는 먹는 행위, 그 자체 외에도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신중하게 채소를 고르는 일. 고기를 손질하는 일. 레시피를 공부하는 일. 세심하게 계량하는 일. 불을 조절하는 일. 정성을 들여 접시에 담는 일. 그러니 배달 음식을 먹는다는 건, 무수히 많은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만 취하는 것.
배달 음식을 끊기로 하고 직접 요리를 시작하면서 다시금 알게 된 것이다. 그 모든 일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모든 순간에서 새콤하고 달콤하고 쌉싸름한 맛이 나고 있다는 사실을.
한 가지 더 매력적인 건,
곱빼기를 먹어도 추가 금액이 없다는 사실.
사람들과 섞이고 싶다. 그곳에 기회가 있으니까.
일찍 일어나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출근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퇴근 시간이 되면 일제히 집을 향해 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 오르는 삶. 그래야 나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알아줄 테니까.
대한민국 국민의 평균 수명은 83년이라고 한다.
그걸 날짜로 바꾸면 30,300일쯤 될 것이다.
나는 오늘로 10,000일을 살았다. 인생이 3부작이라면 나는 오늘로써 1부의 끝을 맺는다. “보람찬 삶이었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던 거 같다. 경험보다는 이론을 중시하며 대부분을 책상에서 보냈다. 참 부질없는 시간이라 생각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재미없는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운전도 할 줄 아는 그런 어른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진짜 어른이 되고 나니까, 어른은 공부 안 하고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운전하는 그 이상의 것이 존재했다. 월세를 내고, 세금을 내고, 책임을 지는 것.
삶을 혼자서 지탱하는 것.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책상에서 보낸 시간을 비로소 납득한다. 그건 배우는 과정이었던 거다. 그런 재미 없는 과정이 없었다면, 오늘의 난 더 형편없이 깨졌을지도 모르겠다.
사회는 고등학교가 아니다. 고등학생 때는 일부러 영어 발음을 딱딱하게 했다. 놀림을 받을까 봐.
어렸을 때는 발음에 집착했다. 미국인처럼 발음하지 못하면 영어를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부족한 영어를 남발하면 잘난 체한다고 눈총을 맞았다. 겉으로 드러나는 영어 발음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남의 영어 실력을 쉽게 재단하게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기준도 높아지게 되는 것 같다.
나는 곧잘 영어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영어로 말할 때마다 무척 더듬는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영어를 할 때면 엄청 엄청 더듬곤 한다. 우리 집에 금송아지가 있다고 자랑하는 것만큼 어이가 없겠지만, 사실이다. 정말 웃긴 건, 혼자서 하면 술술 잘만 나오는 영어가 사람들 앞에만 서면 잘 안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껏 나는 영어를 수학과 같은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수식에 깃든 단 하나의 실수만으로 거짓이 되어버리는 수식처럼. ‘for’와 ‘to’를 헷갈려서 잘못 쓴 문장은 완전히 틀린 것이 되어버린다. 외국에서 살아 본 적이 없는 나는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문제집과 교과서에 무조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영어는 발음이기 전에 ‘언어’라는 것을 간과했다. 언어는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도구이므로 의미만 전달할 수 있으면 된다. 발음이 안 좋아도, 문장 구조가 어색해도, 어휘력이 부족해도. 정말 맛있는 음식은 못생긴 그릇 위에 내놓아도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것처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맛있다면, 엉망진창 문법과 발음으로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좋아해 줄 것이다.
도구는 연마해야 날카로워지는 법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또래 사이에서 튀기 싫어서 영어를 감춘 건 큰 실수였다. 나의 최종 목표는 가장 사랑하는 시트콤인 <더 오피스>를 자막 없이 보는 것이다. 한글 자막이 없으면 캐릭터들의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고, 놓쳤던 장면 속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세계가 확장될 테니.
나는 사실
그렇게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특대 족발.
그리고
그걸 사이좋게 나눠 먹을 애인.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