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 2024, 곽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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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프롤로그: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 선 분들에게
1장 자신의 한계를 넘어 성공을 쓴 사람들
천재들 사이에 끼었을 때의 자세: 링고 스타와 비틀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란: 제임스 캐머런 이야기
거대한 벽 앞에 선 이들에게: 조 윌프리드 송가의 마지막 눈물
필 콜린스의 버티는 삶
아멜리아 에어하트, 우연한 성공을 필연의 성취로 바꾸다
태도가 인간을 완성한다: 오드리 헵번의 예의와 헌신
2장 성공은 온전한 나로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초조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세기의 걸작: 영화 〈대부〉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 세 탐험가 이야기
당신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가리발디의 결단
성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로열 로빈스 vs 워런 하딩
의미가 없다면 스윙도 없다: 도덕적 명분과 성공에 대하여
온전히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로버트 카파의 진짜 이름
실속 없는 성공, ‘피로스의 승리’가 남긴 교훈
3장 성공과 실패에도 법칙이 있을까?
수학 박사는 어떻게 올림픽에서 우승했을까?: 관행적 사고의 위험성
쓸데없는 짓의 쓸모
때론 기쁨도 독이 된다: 균형감과 루틴에 대하여
성공은 선택이 아닌 준비에서 시작된다
성공의 조건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페니실린의 발견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인내의 힘
과유불급, ‘적당히 하기’의 중요성
4장 성공과 실패 너머로 보이는 것들
세상은 언젠가 이야기가 될 것이다: 변화를 만드는 스토리텔링 효과
모든 것은 때가 있다
리더의 위치는 어디인가?
책임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때: 김성근 감독의 리더십
상상하지 않는 것은 죄악이다: 숫자 너머를 보는 힘의 중요성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일
높은 산을 오르는 법
멋진 포기에 대하여
참고 자료
나이 50을 넘어선 어느 날, 퍼뜩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앞으로 제가 살아갈 날이 지금껏 살아온 날보다 어느새 짧아져 있다는 것이었지요. 평균 수명을 80으로 잡으면 30년, 넉넉잡아 90으로 봐도 40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물론 냉정히 생각하면 7년 동안 땅속에서 기다리다 땅 위로 올라와 겨우 2~3주 만에 생을 마감하는 매미나, 그보다 훨씬 짧은 2~3일 만에 생을 마감하는 하루살이에 비하면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남은 것이지요. 그렇게 보면 너무 슬퍼하거나 조급해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싶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를 엄습했던 불안감은 지난 50여 년 동안 딱히 이루어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에너지 넘치고 많은 기회가 열려 있는 젊은 시절을 거쳐오면서도 손에 잡힐 만한 성취가 없었는데, 지금은 시력과 체력이 감퇴하고 사회관계도 좁아진 데다 은퇴까지의 시간마저 얼마 남지 않았다니. 그 짧은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아니, 해야 할 일은 제대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두려움과 조바심이 났던 것이지요.
그런 두려움의 우물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자니 ‘그렇다면 성공한 삶, 제대로 멋지게 산 삶이란 어떤 것일까? 실패하고 좌절한 삶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란 질문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이고 어떤 의미일까요?
중국의 역사를 다룬 《초한지》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서초 패왕 항우와 한 고조 유방이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에 못지않게 두드러지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유방을 도와 천하무적 항우를 꺾고 한 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명장 한신이죠. 그는 신출귀몰한 전략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그중에서도 큰 강물을 등지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배수의 진’으로 자신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하지만 물을 등지고 싸우는 것은 결코 좋은 전략이 아닙니다. 과거의 전쟁이라는 게 총이나 대포가 아닌 창과 칼로 싸우는 것이다 보니, 일단 밀린다 싶으면 후퇴했다가 전열을 정비해서 다시 맞붙기를 거듭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며 ‘전멸’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배수의 진은 이 후퇴의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전략이지요.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죽기 살기로 싸우기’를 끌어낼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병사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패배할 경우 뒤가 없는 최악의 전략이라 병법서에서도 엄격하게 금하는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서 이 전략을 썼다가 조선군의 정예병인 경군을 전멸로 몰아넣은 것이 임진왜란의 전세를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한신이 이 전략을 사용한 조나라 정벌의 상황은 심지어 포위를 당한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골짜기에 숨어서 싸울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적의 진채(陣砦) 앞을 터벅터벅 가로질러 굳이 강가로 부대를 몰고 가 기어코 배수의 진을 펼쳤습니다. 그는 왜 이런 비상식적인 결정을 했을까요?
한신은 가난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책을 많이 읽고 훤칠한 용모로 뭇사람의 시선을 끌었으며, 훗날 장군이 될 거라면서 큰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건달들과 시비가 붙어 결국 상대방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야 하는 과하지욕(胯下之辱)의 치욕을 당했습니다. 후대에서는 그가 큰 뜻을 품었기에 사소한 일을 참고 넘긴 것이라고 좋게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한신이 정말로 건달들에게 겁을 먹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에게 진짜 치욕스러운 일은 ‘스스로 생각하는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 있는 괴리였을 겁니다.
나중에 한신은 초나라의 항량의 밑에 들어갔다가 다시 항우의 밑으로 옮겼으나 여전히 창잡이 졸병을 벗어나지 못했고 세 번째로 한나라의 유방에게로 자리를 옮긴 끝에 벼락출세해서 갑자기 대장군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한 공도 없고 배경도 없는 그가 이런 출세를 한 것은 당시 파촉으로 쫓겨간 한나라의 다급한 사정과 외모와 언변이 번드르르한 그에게 한눈에 반한 승상 소하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다행히 이후 이어진 소소한 전투들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한신은 대장군으로서의 능력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한신은 한나라의 진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항우와 팽성 대전의 한판 싸움으로 박살이 나버립니다. 56만의 군사로 겨우 3만인 항우의 군대에 대패했을 뿐 아니라 혼비백산해 대장군의 지위도 잊고 유방을 호위하기는커녕 혼자 몸도 내빼지 못했지요. 몇 안 되는 군사들과 강가에까지 몰렸다가 이판사판이다 싶어 반격을 가했더니 초나라 군이 움찔하는 틈을 타 겨우 도망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의 추측이지만 한신은 이 팽성 대전 대패의 충격 속에서 ‘대체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건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짜배기인가, 가짜 종이 인형인가’ 하는 근본적인 고민과 열등감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이후 한신의 행보는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 존재 증명의 과정에 가깝습니다. 3만의 병사를 데리고 한왕 유방의 본진에서 떨어져나와 별도의 부대로 활동하면서 위나라, 대나라 등을 차례로 무너뜨렸는데요. 이 과정에서 본대로 돌아오라는 유방의 명령도 무시하고 유방이 이미 외교적으로 항복을 받아놓은 제나라를 뜬금없이 공격해서 사신으로 가 있던 한나라의 충신 역이기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한나라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배수의 진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한신의 가장 위태로운 시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는 팽성 대전에서 자신이 대패했던 바로 그 장면을 승리로 재현함으로써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헤겔은 이런 인간의 욕구를 ‘인정투쟁’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타자가 나를 자립적인 가치로 인정해주기를 바라며 도전하는 과정은 생사를 건 투쟁의 과정이며 삶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목적과 한계를 잊은 인정투쟁은 자멸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한신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고사성어는 토사구팽(兎死狗烹)입니다. 사냥에서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더니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배신을 당한다는 말인데요. 한신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살펴보면 사실 한왕 유방의 배신이라기보다는 자초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는 유방의 철군 명령을 여러 차례 무시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초나라의 맹장 종리매를 체포하라고 했더니 친구라며 명령조차 무시했습니다. 그러면서 초나라 땅을 차지하고 초왕이 되어 오히려 한나라를 위협하는 독자세력화를 꾀했으니, 정상적인 정치조직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한신을 배제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한신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한나라의 대장군에 머무르지도, 그렇다고 책사 괴철의 조언대로 새로운 나라를 세워 유방에게 대항할 장기적인 의지도 없이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니 비극적인 최후는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지요.
다시 한번 헤겔의 말을 빌리면 성공한 삶이란 인정투쟁에서 승리한 삶입니다. 하지만 헤겔은 한신과 같이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인정투쟁의 끝이 아니며 그 끝은 ‘내가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은 자기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헤겔의 입장에서 ‘자기의식’은 두 개의 양상으로 나뉩니다. 인정받기를 원하는 의식과 이를 객관적 입장에서 인정해주는 타자적 의식이지요. 그 둘 사이의 괴리를 메꾸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노력 끝에 마침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은 그런 의문을 저보다 앞선 시대에, 혹은 저와 동시대에 치열한 삶을 통해 증명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어딘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하고 그 과정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모습들이 폭죽처럼 반짝이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그 반짝임이 과연 진짜일까요? 어떤 경우엔 성공 같아 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한 일도 있고, 반대로 실패했지만 성공에 못지않은 성과를 거둔 일도 있습니다. 세상 속에 숨어 있는 그런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 그리고 그 이면의 속사정들을 옛이야기 전하듯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이들의 삶을 통해 여러분도 나의 삶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자신만의 인사이트를 분명 얻으실 거라고 기대해봅니다.
이 글은 쉽고 재미있는 IT 뉴스를 꾸준히 전하는 온라인 뉴스매체 〈아웃스탠딩〉의 요청으로 약 3년간 연재되었던 글을 정리하고 다듬어 묶은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을 만들어주신 류호성 〈아웃스탠딩〉 에디터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애정을 다해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함께 고민하며 이 책을 만들어주신 한경BP의 김종오 대리님께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대리님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 책이 나오는 건 불가능했을 겁니다.
부디 이 책이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고민하는 분들, 그 기로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분들, 앞으로 올라야 할 높은 산을 바라보며 좌절하거나 얼마 남지 않은 내리막을 보며 아쉬워하는 분들에게 희미하나마 좌표를 알려드리는 작은 별이 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하나입니다. 성공과 실패는 결국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과 타협에 관한 문제라는 겁니다. 저 역시 글을 쓰면서 앞으로 허락된 인생의 시간 동안 과연 어떤 별을 어떻게 따라가야 할지 좀 더 깊이 고민해볼 수 있었습니다. 자, 이제 페이지를 펼쳐 저와 함께 이 여행을 시작해보실까요?
아름다운 도시 부산에서 저자 올림
20세기 최고의 그룹으로 손꼽히는 비틀스(The Beatles), 아마 비틀스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폴 매카트니와 존 레넌은 아시지 않을까 싶은데요. 비틀스의 활동과 성공 과정에서 이 두 사람의 비중은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비틀스의 노래 대부분을 작사, 작곡했는데 워낙 천재들이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든 곡들이 많았지요. 예를 들어 ‘헤이 주드(Hey Jude)’의 경우 앞부분은 폴이 만들고, 뒷부분 ‘나나나’는 존이 만들어 붙여서 완성된 곡입니다. 그렇다 보니 아예 각 곡의 작사·작곡 크레디트를 표기할 때 두 사람의 공동 작사·작곡으로 표기하는 것이 비틀스의 관행이 되어버렸을 정도지요.
| 그림 1 | 비틀스 멤버들이 1964년에 뉴욕 JFK 공항에 도착했을 당시의 사진. 왼쪽부터 조지 해리슨, 폴 매카트니, 존 레넌, 링고 스타다.
두 사람은 연주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수 있었던 폴은 기타도 혼자 익히다 보니 특이하게도 오른손으로 코드를 잡는 왼손잡이 기타리스트가 되었고, 스스로 개발한 독특한 기타 주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의 대표작 ‘예스터데이(Yesterday)’를 기타로 쳐보면 리듬이 상당히 난해한 곡이라는 걸 알 수 있죠.
사실 기타리스트 조지 해리슨도 다른 그룹이었다면 당당히 리더가 됐을 재능의 소유자였지만 폴과 존이 워낙 ‘넘사벽’ 수준의 천재다 보니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기타와 작곡 실력을 꾸준히 갈고닦아 나중에는 ‘히어 컴즈 더 선(Here comes the sun)’, ‘와일 마이 기타 젠틀리 윕스(While my guitar gently whips)’ 같은 히트곡도 만들고 나름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곡과 기타 훈련에 집중하다 보니 방에 틀어박히는 것은 기본이고 인도까지 가서 라비 샹카에게 시타르 연주법을 배워오는 등 음악 활동에만 매진해서 아내인 패티 보이드에게 소홀해졌지요.
이 틈에 에릭 클랩튼이 패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라일라(Layla)’ 같은 노골적인 불륜 곡[정확히 말하면 ‘데릭 앤드 더 도미노스(Derek & the Dominos)’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앨범 〈라일라 앤드 아더 어소티드 러브 송즈(Layla and Other Assorted Love Songs)〉 전체가 패티에 대한 절절한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진짜로 패티가 조지와 이혼하고 에릭에게 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결혼도 끝은 대단히 안 좋았지요.
이렇게 두 천재와 그 반열에 올라가기 위해 끝없이 몸부림치는 조지의 각축이 벌어지는 가운데 제일 천하태평이었던 사람이 링고 스타(Ringo Starr)였습니다. 왼쪽 사진에서 네 사람 중 누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나요? 존 레넌? 조지 해리슨? 의외로 링고 스타가 가장 연장자였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더 어려 보이려고 애교머리를 열심히 앞으로 내렸다고 하죠. 하지만 나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링고 스타의 드럼 실력이 별 볼 일 없었다는 겁니다.
비틀스 활동 후기에는 링고 스타의 드럼이 나름의 색깔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도저히 앨범을 녹음할 만한 실력이 아니어서 스튜디오에서 쫓겨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비틀스의 1집 앨범에는 링고 스타의 이름이 올라가 있긴 하지만 실은 다른 세션 연주가가 연주한 것이었지요. 음악가로서는 더없이 치욕적인 일이지만 워낙 천성이 태평한 그는 각고의 노력을 할 생각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라이브 공연 일정이 많았기 때문에 아예 따로 연습을 안 하고 공연을 연습 삼아 연주했다는 본인의 회고도 있습니다. 유튜브에서 비틀스의 공연이나 녹음이 아닌 라이브를 들으면 ‘아, 이게 뭐야?’ 싶을 때가 가끔 있는데 대개는 링고 스타의 불안한 박자가 원흉입니다.
그래도 항상 칼날처럼 곤두서 있는 세 사람 사이에서 유일하게 둥글둥글한 인물이라서, 비틀스가 깨지지 않고 굴러가는 데 결정적인 접착제 같은 역할을 했다는 데는 멤버 모두 동의했습니다. 심지어 링고는 농담도 잘했습니다. 한번은 스튜디오에서 종일 일하다 밤이 되었는데, 링고가 기지개를 켜면서 “아, 진짜 엄청 빡빡한 날, 아니 밤이네(It’s been a hard day’s night)?”라고 말한 게 히트곡 제목이자 앨범 제목 그리고 그들이 출연한 영화의 제목으로 두루 쓰였다고 합니다.
예상하시다시피 말은 링고가 했지만 노래는 폴과 존이 하루 만에 만들어 온 것이었죠. 그래도 가사의 일부, 심지어 핵심이 되는 콘셉트와 제목을 제시했으니 본인의 기여도나 크레디트 기재를 요구할 만도 하지만 링고는 이 농담이 자신의 입에서 나왔다는 걸 뿌듯해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노래를 만들어 온 두 사람에게 “와, 너희들 천재네?” 하며 순수하게 감탄하고 말아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합니다. 진짜 성격 좋지 않나요?
충청도 사투리에서 ‘애는 착혀’라는 말은 사실 무능한 사람이라는 걸 돌려서 비판하는 말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저 역시 충청도 출신인데 확실히 그런 어감이 있습니다). 더구나 예술가인 링고 스타가 업계 동료들로부터 ‘사람은 좋다’라고 칭찬받는 건 절대로 칭찬일 수 없었지요.
세상없이 태평한 링고 스타도 그룹 전체를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 폴과 사사건건 대립하는 존 사이에서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비틀스 최고의 걸작 앨범으로 손꼽히는 〈화이트 앨범(White Album)〉을 만드는 과정에서는 폴의 전횡이 극에 달해서 링고에게 대놓고 드럼을 그따위로 치려면 차라리 자기가 치겠다며 막말을 하는 수준에 이르렀지요. 아무리 성격이 좋다지만 더는 참을 수 없었던 링고는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링고가 나가자 폴이 직접 드럼을 쳐서 곡을 녹음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곡이 ‘백 인 더 USSR(Back in the USSR)’입니다.
일단 집을, 아니 스튜디오를 나간 링고는 세계적인 스타답게 가출도 세계적으로 해서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 틀어박혀 버렸습니다. 거기서 친구의 유람선을 얻어 타고 놀던 링고는(그렇습니다. ‘절치부심’ 같은 단어는 링고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유람선의 선장에게 점심을 대접받으면서 식탁에 올라온 문어 얘기를 들었지요. 선장이 “문어는 반짝이는 물건이나 예쁜 조약돌이 있으면 바다 밑으로 가지고 내려가서 정원을 만들어요”라고 하자, 링고는 어린애처럼 “정말? 정말?” 하면서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도 정원이라면 껌뻑 죽는 영국인이었으니까요.
다음 앨범이자 비틀스 해체 직전 마지막 앨범이었던 〈애비 로드(Abbey Road)〉 녹음을 위해 돌아온 링고는 아마도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한 이 앨범에 자기 노래를 하나라도 넣고 싶었습니다. 사실 그도 흔히 ‘화이트 앨범’이라 불리는 앨범 〈더 비틀스〉에 첫 작품인 ‘돈트 패스 미 바이(Don’t pass me by)’라는 곡을 넣긴 했습니다. 이 앨범 만들 때 멤버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 각자 곡을 만들어서 집어넣고 끝내는 식이었기에 아무도 링고의 곡에 시비를 걸지 않았거든요. 곡 자체는 팬들에게 ‘패스 잇 바이(pass it by, 이 노래는 거릅시다)’라고 혹평을 받을 수준이었습니다.
아무튼 링고는 선장에게 들은 문어 얘기로 노래를 만들어보려고 했지만 음악과 담쌓고 지낸 그의 수준으로는 딱 한 줄, 그러니까 ‘I’d like to be under the sea In an octopus’s garden in the shade’의 멜로디만 만들고 1년 동안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알아준다고, 그룹 내에서 같은 아웃사이더였던 조지는 맨날 그 곡 하나만 뚱땅거리다가 뒷머리만 긁적이는 사람 좋은 친구를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뒤의 한 줄을 만들어 넣어주고 기타 반주도 만들어줬는데,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링고 스타의 유일한 히트곡인 ‘옥토퍼스 가든(Octopus’s Garden)’입니다.
이 노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딱 두 줄의 멜로디로 만든 곡이라 ‘ABAB’의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링고의 이미지와 맞기도 하고, 단순한 구조에 문어까지 합쳐져 ‘아이들을 위한 동요’로 여기저기 써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링고는 나중에 이 노래로 책도 쓰고 비디오도 만들고 애니메이션도 만드는 등 사골 우리듯 우려먹었습니다. 하지만 노래 자체는 동요라기엔 좀 우울한 내용입니다. 천재들 그리고 그들의 싸움에 지치고 왜소해진 링고가 바닷속에 내려가 바위 그늘에 자신만의 작은 정원을 만들고 살고 싶다는 얘기이기 때문이죠.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비틀스가 해체된 이후 존 레넌을 제외한 세 사람은 수많은 굴곡을 겪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존은 솔로 활동을 성공적으로 했지만 전위예술가였던 오노 요코와의 결합 과정에서 이런저런 구설수와 논란에 휘말렸지요. 음악적, 심리적으로 부침을 겪던 중 그는 1980년 광팬인 마크 채프먼에게 총격을 입고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조지 역시 몇 장의 솔로 앨범이 크고 작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조금씩 잊히다가 2001년 58세라는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가장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이어간 사람으로는 폴 매카트니를 들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 역시 정말 사랑했던 제인 애셔와 맺어지지 못했고 음악적으로도 부침을 거듭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가장 행복한 노후를 보내고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링고 스타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그도 비틀스 해체 직후에는 솔로 활동을 해보려고 몸부림쳤지만 음반사로부터 신작 앨범 제작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요. 이에 낙담하고 잠시 알코올중독에 빠지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그다운 낙천적인 성격으로 훌훌 털어버리고 일어섰습니다.
그의 무던한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많습니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호머 심슨이 “됐어. 그래, 난 필요 없는 존재야. 비틀스로 치면 링고 스타 같은 존재라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을 정도인데요. 어찌 보면 링고의 입장에서는 모욕적인 대사였을 수 있는데, 이 에피소드를 본 그는 껄껄 웃으면서 “20년 넘게 저런 말 들어왔으니 괜찮아”라고 했다고 합니다.
꽤 오래전에는 일본의 사과주스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어로 ‘린고’가 사과인데 두 남녀가 “이거 린고 주스야!”라고 하면 벤치에서 카메라를 등지고 있던 링고 스타가 몸을 돌리며 “나 불렀어?” 하는 게 전부인 황당한 광고였습니다. 정말 링고 스타처럼 무던한 성격이 아니라면 레전드급 뮤지션이 그런 광고에 출연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겠지요.
1989년 이후 그는 솔로 활동을 깨끗하게 접고 ‘링고 스타와 그의 올스타 밴드’를 만들어 세계 투어를 다녔습니다. 사실 그 어떤 스타라도 비틀스의 링고가 전화해서 “이봐, 나랑 공연 하나 하지” 하면 거절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래서 2015년에 내한했을 때도 토토의 스티브 루카서, 미스터미스터의 리처드 페이지, 퀸스라이크의 토드 룬드그렌 등이 동행했습니다. 자기 노래가 몇 개 안 되기 때문에 다른 가수들을 불러 공연의 반을 채우는 공연이라서, 사실 링고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없었지요. 그래서 그가 밴드와 함께 다니는 세계 투어는 말 그대로 ‘투어(tour)’, 그러니까 세계여행이나 팔도유람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왔을 때도 며칠간 여기저기 구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비틀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멤버이다 보니 2024년 기준으로 83세입니다만, 여전히 링고 스타는 올스타 밴드와 함께 공연을 다니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부와 명예, 정신 건강까지 챙기며 즐겁게 살고 있는 링고야말로 비틀스 전설의 진정한 승리자이자 수혜자가 아닐까요?
2022년 12월 개봉한 제임스 캐머런(James Cameron) 감독의 〈아바타 2: 물의 길〉은 당시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러닝타임이 3시간 10분이나 되고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려면 아이맥스 3D 상영관을 찾아야 해서 티켓 가격도 꽤 비쌌는데요.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은 입을 모아 ‘완전히 새롭고 환상적인 경험’이라고 극찬했고 관객과 평론가 모두 호평 일색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바타 2〉는 캐머런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하는 또 다른 대표작이 되었지요.
사실 〈아바타 2〉는 개봉 전까지 우려의 시각이 적지 않았습니다. 일단 제작 기간이 계속 늘어지면서 애초 예정되었던 2017년 개봉이 한 해 한 해 밀려 5년이나 늦어졌습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중국 등 꽤 많은 지역이 완전한 정상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무엇보다 너무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었습니다. 이 영화에 들어간 제작비와 마케팅 비용은 약 4억 달러, 한화로 5,000억 원 이상입니다. 물론 함께 제작된 〈아바타 3〉의 비용 일부까지 포함된 것이라고는 해도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였죠. 캐머런 감독은 개봉 전 인터뷰에서 “상업적 차원에서 보면 최악의 영화”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갔음에도 사람들은 〈아바타 2〉가 손익분기점을 쉽게 넘을 것이며, 최고 흥행 기록을 갱신할 것인가가 문제라고들 했습니다. 그런데 역대 최고 흥행 영화 기록을 살펴보면 재밌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역사상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 1위는 2009년 29억 달러의 흥행을 기록한 〈아바타〉였고, 2위가 2019년 27억 달러를 기록한 〈어벤져스: 엔드게임〉 그리고 3위가 1997년 22억 달러를 기록했던 〈타이타닉〉이었습니다. 즉 역사상 최고 흥행 1위, 3위 영화가 모두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영화였고 이번엔 〈아바타 2〉로 자신이 세운 기록을 또 한 번 깨고자 했죠.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외에 여러 개의 초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달아 찍으면서도 거의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 능력자, 아니 예외적일 만큼 운이 좋은 행운아였습니다. 이 문장에서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하지 않은’이 아니라 ‘거의’라고 쓴 이유는 그 역시 딱 한 번, 아주 크게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캐머런의 가장 처참한 흑역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은 그의 데뷔작이었던 〈피라냐 2〉입니다. 애초에 감독이 아니라 특수효과 담당 스태프로 들어갔던 작품인데, 촬영이 진행되는 중에 영화제작자가 마음대로 영화를 만들려고 감독을 자르고 아무나 골라잡아 앉힌 것이 캐머런이었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감독이 되긴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예산, 말도 안 통하는 이탈리아 배우들, 말도 안 되는 일정 속에서 졸속으로 만들어진 영화였지요. 심지어 캐머런이 명목상 감독임에도 편집 작업에 손도 못 대도록 막아놓았던 터라 엄밀히 말하자면 그의 영화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괴작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본인의 이름이 감독으로 크레디트에 올라갔으니 〈피라냐 2〉는 캐머런의 커리어에 심각한 장애물이 됐습니다. 〈터미네이터〉라는 멋진 각본을 썼음에도 이 흑역사 때문에 어떤 영화사에서도 감독으로 써주려 하지 않았으니까요. 결국 캐머런은 감독을 맡게 해주면 자신이 쓴 각본을 1달러에 넘기겠다는, 말도 안 되는 조건으로 간신히 〈터미네이터〉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다행히 별로 예산도 크지 않았던 이 영화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캐머런은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연이어 〈에이리언 2〉를 감독하면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전작 〈에이리언〉을 뛰어넘는 흥행작으로 만들어냅니다. 드디어 그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지요.
원래 캐머런은 SF 덕후로도 유명했습니다. ‘우주’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접근할 수 있는 우주의 이미지를 가진 ‘바다’는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바다, 그것도 심해저와 관련된 영화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지요. 하지만 바닷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영화를 찍으려면 대형 수조와 특수 촬영 장비가 필요했습니다. 거대한 자본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해양 영화를 초짜 감독이 시도하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죠. 그런데 〈터미네이터〉와 〈에이리언 2〉가 연달아 대박을 터트리자 비로소 그는 해보고 싶던 영화를 마음껏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초대형 프로젝트가 1989년에 개봉한 영화 〈심연(Abyss)〉입니다.
제목 자체가 대놓고 심연, 심해를 의미하는 ‘abyss’였으니, 평생 꿈꿔온 바다 영화의 한을 남김없이 풀고야 말겠다는 캐머런의 야심이 절절히 느껴지지 않나요? 그 야심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안 그래도 완벽주의자인 데다 다혈질에 입도 걸걸하기로 유명한 그의 폭주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산은 마구 초과되었고 촬영 일정도 질질 늘어졌지요. 여기에 대부분 장면이 물속 촬영이었고 감독의 반복된 재촬영 요구와 내용 수정으로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촬영 현장에서는 막말이 오갈 정도였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스태프와 배우들이 영화 제목을 ‘Abuse(학대)’로 바꿔야 한다고 씁쓸한 농담을 했을까요.
서양 속담에 ‘돈이면 다 해결된다(Money Talks)’라는 말도 있듯이, 만일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면 결국은 좋은 게 좋은 것으로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영화가 제한된 예산이나 여건에서 오히려 더 멋진 결과가 나오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산이나 기획의 제한 없이 만들어지는 작품은 감독의 자의식이 과도하게 들어가서 재미가 떨어지고 결국은 망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심연〉이 정확하게 그런 경우였습니다.
더구나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사이 ‘흥행 감독 제임스 캐머런이 심해영화를 찍고 있더라’라는 소문이 할리우드에 돌면서 〈레비아탄〉, 〈딥 식스〉 등 유사한 심해저 액션 영화들이 먼저 시장에 나왔습니다. 결국 너무 많은 예산, 너무 긴 제작 기간, 너무 긴 러닝타임의 〈심연〉은 1989년 당시 자그마치 7,0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지만 북미 지역 수익 5,400만 달러, 월드 박스오피스 최종 9,0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리는 데 그쳤습니다. 그래도 제작비보다 2,000만 달러 정도 더 벌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대작 영화는 순수 제작비의 배 이상이 마케팅 비용으로 들어갑니다. 즉 단순 계산으로도 5,000만 달러 이상의 거대한 적자를 기록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 ‘거대한 실패’는 단순히 좌절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 페이지의 사진 옆에 있는 QR 코드로 영상을 재생하면 외계인이 바닷물을 이용해 여주인공의 얼굴을 흉내 내어 합성하며 소통을 시도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인데요. 당시로서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물의 질감을 표현하는 CG를 만들기 위해 짧은 장면임에도 엄청난 비용과 기술이 투입되었지요. 그런데 이 장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혹시 떠오르는 다른 영화가 없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액션 영화의 영원한 걸작이자 전편보다 나은 속편의 예외로 〈대부 2〉와 함께 언급되는 〈터미네이터 2〉에 나오는 악역 로봇 T-1000이 바로 이 기술로 구현된 것입니다. 〈터미네이터 1〉에서 아무리 총으로 쏘고 불로 태워도 죽지 않는 근육질의 강철 로봇이 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연기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기 때문에, 속편에서 이를 넘어서는 다른 악역이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캐머런은 속편에서 전편의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호리호리하고 빠르지만 몸 전체가 액체금속으로 되어 있어 어떤 모습으로도 변형될 수 있고 어떤 공격을 받아도 금세 복원되는 무시무시한 로봇을 상상해냈습니다.
하지만 이 로봇이 주는 충격의 핵심인 액체금속의 변신 장면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면 이런 구상은 화면에 옮겨질 수 없었겠죠. 아니, 반대로 〈심연〉에서 개발한 이 초현실적인 기술을 활용하고 싶어서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T-1000을 착안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한 추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심연〉의 영향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터미네이터 2〉와 〈트루 라이즈〉의 대성공으로 흥행 감독의 자리를 되찾은 캐머런은 전열을 가다듬은 후, 기어코 다시 한번 바다 영화에 도전합니다. 이쯤 되면 이 양반의 바다에 대한 집착도 참 어지간하다 싶은데, 그렇게 고생하며 만들어낸 영화가 바로 역대 흥행 기록 3위에 빛나는 대작 〈타이타닉〉입니다. 이미 〈심연〉에서 물이 나오는 장면들은 질릴 만큼 찍어봤기 때문에 수조 제작, 수중촬영, 화면구도와 편집 등 이 영화에서 얻은 거의 모든 경험이 〈타이타닉〉에 남김없이 재활용되었습니다. 심지어 〈타이타닉〉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잠수정은 〈심연〉에 나온 잠수정을 다시 등장시킨 것이었습니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재활용했다기보다는 〈심연〉의 실패가 헛되지 않았음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캐머런의 의도가 반영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영화 〈아바타 2〉 역시 관객들의 가장 큰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바로 환상적인 수중 장면의 묘사입니다. 이 또한 〈심연〉에서 시작된, 액체를 묘사하는 촬영 기술 발전의 연장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심연〉의 실패가 가져다준 성과는 캐머런 개인뿐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로 확장됩니다. 캐머런은 〈심연〉 특수효과를 맡은 ILM에 액체가 다양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특수효과를 요구했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것을 동영상으로 구현해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ILM에 근무하던 기술자인 존 놀(John Knoll)은 고민 끝에 당시 개발 단계에 있던 빛, 각도, 질감 등을 계산해 CG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로 한 컷 한 컷 장면을 그린 후 이어 붙여 동영상을 만들어냈습니다. 형제인 토머스 놀(Tomas Knoll)과 함께 개발한 이 소프트웨어는 〈심연〉의 충격적인 영상으로 크게 화제를 모았지요. 이후 PDF 소프트웨어로 유명한 어도비에서 라이선스를 구입해 개인 사용자를 위한 상품으로 내놓아 판매하게 되었고 1995년에는 두 형제에게 3,450만 달러라는 거액을 주고 저작권까지 사들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바로 ‘뽀샵질’이라는 속어까지 만들어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사진 보정에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상 소프트웨어 포토샵(Photoshop)입니다.
결국 〈심연〉의 거대한 실험과 실패가 없었더라면 제임스 캐머런이 역대 최고 흥행 영화 기록을 자신의 이름으로 수놓을 일도 없었을 것이고, 영상 기술의 혁신도 늦어졌을 것입니다. 그처럼 크게 실패할 수 있는 환경, 그렇게 실패하고도 능력과 아이디어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바로 그의 ‘예외적인 행운’의 실체가 아니었을까요?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K-Pop, K-드라마, K-음식을 넘어 요즘은 폴란드에 거액의 무기를 수출하면서 급부상하고 있는 K-방산에 이르기까지, 요즘 우리는 실패를 모르는 기관차처럼 달려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단 한 번의 실패도, 단 한 번의 경로 이탈도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사회라는 점이 많은 사람을 두렵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면 다른 의미에서는 ‘한계’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의 효용이 다할 때가 머지않았다는 것이지요.
그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실패, 때로는 거대한 규모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제까지 기성세대가 아등바등하며 벌어들인 얼마 안 되는 밑천을 바탕으로 다음 세대에게 주어야 할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이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아닐까요?
최근 코로나19로 주춤했었던 야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중에서도 스포츠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인기 종목인 프로야구나 축구의 인기도 여전하지만 요즘 갑작스럽게 많은 관심이 쏠린 종목으로 테니스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보는 스포츠보다는 하는 스포츠로서 접근성도 좋은 편이고, 테니스 패션이라고 불리는 셔츠, 스커트, 모자 등의 산뜻한 기능성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아져서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테니스 역시 보는 스포츠, 특히 프로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인기를 유지해온 종목입니다. 워낙 저변이 넓고 선수들도 많다 보니 전 세계에서 열리는 대회의 숫자도 어마어마하지요. 현재는 마치 피라미드처럼 대회의 수준과 형식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데요. 대회에서 입상하면 얻는 랭킹 포인트와 상금을 차등화해서 이를 바탕으로 세계 랭킹이 정해지기 때문에, 상급 대회에 나가려면 꾸준히 여러 대회에 참가해 포인트를 쌓아야 합니다. 가장 아래에는 ITF 월드테니스 투어, 그 위에 ATP 챌린저 투어, 250투어, 500투어, 마스터스 1000 투어까지 층층시하인데 그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있는 가장 영예로운 네 개 대회를 ‘그랜드 슬램’이라고 부릅니다.
이 네 대회가 열리는 시기를 순서대로 말씀드리면 호주 멜버른에서 1월에 열리는 호주 오픈, 프랑스 파리에서 5월에 열리는 롤랑가로스 오픈, 영국 런던에서 6월 말에 열리는 윔블던 대회, 미국 뉴욕에서 8월 말에 열리는 US 오픈입니다. 이 대회들은 열리는 시기나 대륙, 기후가 모두 다르기도 하지만 코트의 성질도 달라서 팬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데요. 호주 오픈과 US 오픈은 모두 파란색 하드코트지만 롤랑가로스는 ‘클레이코트’라고 불리는 흙으로 된 바닥이고 윔블던은 잔디코트입니다. 코트의 재질에 따라 공이 튀는 각도나 속도, 선수들의 스텝 등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에 다양한 선수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기도 하지요.
그중 롤랑가로스의 흙바닥은 붉은 벽돌 가루로 만드는 ‘앙투카’ 재질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코트가 붉은색을 띠는데요. 앙투카는 롤랑가로스의 상징과도 같아서 대회가 열리는 현지에서는 앙투카를 유리병에 담아 기념품으로 팔기도 합니다.
2022년 롤랑가로스 대회 3일 차였던 지난 5월 24일, 한 남자 선수가 이 앙투카 코트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 흐느꼈습니다. 잠시 후 선수가 고개를 들자 이마에 붉은 앙투카 흙이 잔뜩 묻었는데요. 다부진 몸매를 가진 흑인 선수였기 때문에 흡사 전투에 나서는 아프리카 전사의 얼굴 장식같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지금 막 전투를 마친 상황이었고 전투에서 패배한 뒤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다시는 전투에 임할 수조차 없었지요. 그는 생애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 후 오열하고 있었던 겁니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선수의 이름은 조 윌프리드 송가(Jo-Wilfried Tsonga)입니다. ‘송가’로 불러야 할지, ‘쏭가’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총가’로 읽어야 할지 혼란스러운 그의 성은 콩고인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인데요. 콩고의 핸드볼 선수였던 아버지는 프랑스인 아내를 만나 1970년대에 프랑스로 이주해왔습니다. 송가는 아버지로부터 건강한 신체를 물려받아 188센티미터의 큰 키와 유연하면서도 강한 근육을 지닌 스포츠맨으로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테니스 주니어 대회를 휩쓸었던 그는 19세였던 2004년 일찌감치 프로 무대에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프로테니스 무대는 시작부터 벽에 부딪혔습니다. 프로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들로 불리는 빅 4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1998년에 데뷔한 로저 페더러가 당시 정상을 찍고 있었고, 2001년 데뷔한 나달은 클레이코트에 엄청나게 강한 ‘흙신’으로 군림하며 송가의 홈 무대인 프랑스의 롤랑가로스 오픈을 독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2003년에는 그랜드 슬램 최다 우승을 나달과 다투게 되는 노박 조코비치가, 2005년에는 영국 윔블던의 희망 앤디 머레이까지 등장해 송가는 앞뒤로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어버렸지요.
이 네 명의 선수는 이전에도, 아마 앞으로도 다시 없으리라 여겨지는 테니스계의 신과 같은 존재들로 거의 모든 상급 대회를 휩쓸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송가에게 남겨진 몫은 없었지요. 차라리 꿈조차 꿀 수 없는 실력 차이가 있었다면 깨끗하게 포기했겠지만 송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빅 4의 바로 다음에 있는 ‘인간계 최고 선수’였습니다.
이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가는 프로선수 경력 동안 467승 238패로 승률 66.2퍼센트를 기록했는데요. 4대 그랜드 슬램 대회 모두에서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단 한 번도 타이틀을 따지 못했습니다. 그랜드 슬램 대회 최고 기록은 2008년 호주 오픈 준우승이었는데 이때 우승을 한 것도 빅 4의 노박 조코비치였습니다. 심지어 2012년 송가가 생애 최고의 세계 랭킹인 세계 5위를 기록했을 때도 그 앞의 네 명이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머레이였습니다.
하지만 송가는 메이저 대회에서 이 빅 4를 모두 이긴 적 있는 세 명 중 한 명이었지요. 그것도 한 대회에서 빅 4 세 명을 만나 모두 이긴 유일한 두 명 중 한 명이며,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세계 랭킹 1위일 때 그들을 이긴 세 명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신계로 불리는 빅 4와 맞서 가장 잘 싸운 인간계 선수였지만, 반대로 보면 이렇게 빅 4와 비교하는 것으로만 자신의 성취를 말할 수밖에 없는 불운한 선수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는 18년의 프로선수 생활 동안 마스터즈급 대회를 2회 우승하는 데 그쳤습니다. 송가의 절정기는 2008년이었고 프랑스 마스터즈 대회에서 우승한 것도 이때였는데요. 사실 이 해에 송가는 꿈에 그렸던 그랜드 슬램 타이틀에 가장 가까이 갔습니다. 하지만 첫 그랜드 슬램 대회였던 호주 오픈에서 그의 대진운은 지독히도 나빴습니다. 1회전에 들어가자마자 머레이를 만났고 4강에서는 나달을 만났으며 천신만고 끝에 결승에 올라갔더니 조코비치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나달과 4강전에서 엄청나게 진을 빼지 않았더라면 조코비치가 타이틀을 차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대회에서 빅 4 중 세 명을 줄줄이 만나다니, 이쯤 되면 신이 송가에게 타이틀을 주지 않기로 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심각한 무릎 부상을 입은 송가는 최고의 절정기였던 2008년의 나머지 그랜드 슬램 대회들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흘려보내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높은 벽을 넘기 위해 송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몸부림을 쳤습니다. 원래 그의 강점은 강력한 서브와 짧게 떨어지는 발리입니다. 예전 나무 라켓의 시대였다면 그의 장점은 눈부시게 빛났을 것입니다. 존 매켄로로 대표되는 당시 선수들의 주요 전략은 일단 강하게 서브를 넣은 후 무조건 네트 앞으로 대시해 들어가서, 넘어오는 공을 발리로 커트하는 ‘서브 앤드 발리’ 전략이었습니다. 유튜브에서 당시 경기 영상들을 보면 선수들이 모두 네트 앞으로 다가가려고 안달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라켓의 재질이 카본 그라파이트가 주가 되는 강인한 합성 재료들로 바뀌면서 더 강하고 빠른 스트로크가 가능해졌고, 무작정 네트 앞으로 들어오다가는 좌우로 빠르게 뚫고 지나가는 패싱샷에 당할 가능성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이반 렌들 이후 스트로크 중심의 플레이 스타일이 이제는 거의 공식처럼 정착되어, 코트 맨 끝의 베이스라인 부근에서 강한 스트로크를 퍼붓는 베이스라인 플레이가 대세가 되어버렸습니다. 빅 4가 바로 이런 베이스라인 플레이를 주무기로 삼는 선수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부분도 송가가 운이 없다고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조금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역사가 바뀌었을 텐데요.
하지만 시대를 탓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무 라켓의 전통을 지키자고 주장하던 존 매켄로가 결국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고 변화를 인정했듯이, 송가도 변화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무기로 강력한 포핸드를 장착하고 동작이 느리다는 지적을 받은 두 손 백핸드도 연습을 통해 한 손으로 치는 변형 공격이 가능하도록 훈련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꾀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도리어 무리가 되었던 걸까요? 송가는 끊임없이 부상에 시달렸습니다. 물론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프로선수들에게 부상은 늘 따르기 마련이지만 송가의 경우는 정도가 좀 심했습니다. 2004년 데뷔 시점부터 그는 디스크, 오른쪽 어깨 부상, 배 근육 부상을 시작으로 무릎, 등, 손목, 엉덩이, 발목, 손가락, 내전근, 팔 부상 등 2014년 한 해를 빼고는 매해 심각한 부상으로 기권과 수술, 재활을 거듭했습니다.
특히 2018년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시도한 수술의 예후가 좋지 못했습니다. 스트로크를 할 때 몸을 든든히 받쳐줘야 할 무릎에서 계속 고통이 느껴지다 보니 수술 이후 송가의 성적은 급전직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세계 5위였던 그의 순위는 2022년 어느새 297위까지 떨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2022년 4월 SNS를 통해 “내 몸으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며 이번 롤랑가로스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운명의 5월 24일, 롤랑가로스의 센터코트인 필립 샤트리에 아레나에 수많은 관중이 운집했습니다. 센터코트는 순위 상위권 선수들에게 우선 배정되는 곳이지만 송가의 은퇴 경기가 될 수도 있으므로 주최 측에서 특별히 배려한 것이었지요. 상대는 현재 세계 순위 8위인 노르웨이의 캐스퍼 루드 선수였는데요. 순위도 높지만 클레이코트에 특히 강한 선수였기 때문에 사실상 송가의 현재 컨디션으로는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송가의 마지막 불꽃은 엄청났습니다. 테니스에서는 여섯 게임을 먼저 따면 한 세트를 가져오게 되어 있고 5:5가 되면 두 게임을 먼저 따서 7:5가 되어야 승리, 그런데 6:6까지 가면 경기가 한없이 이어질 수는 없으니 ‘타이브레이크’라는 7점 먼저 내기 승부로 마무리를 합니다. 송가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첫 세트를 타이브레이크 끝에 7:6으로 가져왔고, 두 번째 세트도 타이브레이크까지 갔습니다.
여기서도 이겼다면 영화의 피날레와 같은 기적적인 승리도 가능했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루드의 엄청난 샷이 나오면서 두 번째 세트 그리고 세 번째 세트도 내주었지요. 롤랑가로스에서는 세 개의 세트를 먼저 따면 승리하기 때문에 네 번째 세트를 내주면 경기가 끝이었습니다.
관중들이 역시 이대로 마무리되는 것인가 아쉬워하는 순간 송가가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5:5로 맞선 상황에서 루드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해낸 것입니다. 테니스에서는 서브하는 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서브하는 게임은 가져와야 하고, 만약 상대 선수가 이기면 이런 흐름을 막았다는 뜻으로 ‘브레이크했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남자 테니스는 서브가 아주 강력해서 한번 서브 게임이 브레이크되면 세트 전체를 넘겨줄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런데 송가가 루드의 서브 게임을 브레이크해서 6:5가 되었으니, 이제 서브가 강한 송가가 자신의 서브 게임만 이기면 세트 스코어 2:2로 마지막 승부를 볼 수 있었지요. 송가의 활약에 신이 난 프랑스 관객들은 입을 모아 국가를 제창하는 등 난리가 났습니다.
하지만 송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운했습니다. 하필 바로 그 타이밍에 오른쪽 어깨 부상이 재발한 것입니다. 그의 데뷔 시즌 첫 부상이 어깨 부상이었으니 마치 데칼코마니 같은 불운이었습니다. 의료진까지 들어와서 임시로 치료해봤지만 사실상 어깨를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지요. 하지만 그는 기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나머지 경기를 소화했습니다. 도저히 어깨를 들어 올릴 수 없어 테니스 초심자들도 잘 하지 않는 언더 서브도 넣고, 왼손으로 라켓을 바꿔 쥐어가면서 분투했으나 그런 임시방편으로는 세계 8위의 프로선수를 상대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송가는 루드에게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