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저자로, 《래디컬》, 《래디컬 투게더》, 《팔로우 미》, 《카운터 컬처》, 《복음이 울다》(이상 두란노) 등을 통해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로 살아가도록 일깨우고 격려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맥린바이블교회(McLean Bible Church)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뉴올리언스침례신학교(New Orleans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석사(MDiv), 신학석사(ThM), 철학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2006년부터 2014년까지 앨라배마주 브룩힐즈교회(The Church at Brook Hills)에서 담임목사로 섬겼으며, 성도들이 세상적인 성공을 좇는 대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래디컬한 믿음으로 초청했다. 브룩힐즈교회를 사임한 뒤에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완수하도록 교회들을 돕는 국제적인 센터인 ‘래디컬’(Radical Inc)을 설립했다. 또한 세계 각지 복음의 불모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교회들의 연합인 남침례교 국제선교이사회(IMB; International Mission Board)의 대표로 활동했다.
사랑하는 아내 헤더와 다섯 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다.
DON’T HOLD BACK
Copyright©2023 by David Pla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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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shed in association with Yates & Yates, www.yates2.com
Korean translation copyright © 2023 by Duranno Ministry
This transla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WaterBrook,
an imprint of Random House, a division of Penguin Random House L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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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서지 마
지은이 | 데이비드 플랫
옮긴이 | 정성묵
초판 발행 | 2023. 6. 21
전자책 발행 | 2023. 7. 12
등록번호 | 제1988-000080호
등록된 곳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65길 38
발행처 | 사단법인 두란노서원
영업부 | 2078-3333 FAX | 080-749-3705
출판부 | 2078-3332
정가 : 16,000원
전자책 정가 : 11,200원
ISBN 978-89-531-4511-5 03230
e-ISBN 978-89-531-4521-4 05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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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서원은 바울 사도가 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을 따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던 장소입니다. 사도행전 19장 8-20절의 정신에 따라 첫째 목회자를 돕는 사역과 평신도를 훈련시키는 사역, 둘째 세계선교TIM 와 문서선교단행본·잡지 사역, 셋째 예수문화 및 경배와 찬양 사역, 그리고 가정·상담 사역 등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980년 12월 22일에 창립된 두란노서원은 주님 오실 때까지 이 사역들을 계속할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goodnews)이다. 한 분이신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요 사랑 많은 창조주이며 주권적인 왕이요 만사의 거룩한 심판관께서, 그분의 형상을 따라 경이롭고 동등하고 독특하게 창조된 인간들이 그분께 반역하여 그분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분 앞에서 죽어 마땅하게 된 것을 보시고,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신 그분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 완벽하고도 강력한 삶을 살고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죽임을 당한 뒤 무덤에서 일어나 죄와 사탄과 죽음에 대해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는 좋은 소식이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초대(graciousinvitation)이다.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 속한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죄의 용서를 받고, 모든 우상에서 돌아서서 왕이신 예수님만을 향한 충성을 선포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믿으라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복음은 약속(guarantee)이다. 예수님이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속된 사람들을 위해, 그분의 거룩한 임재의 빛으로 만물이 새로워진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분의 나라를 세우고 영원토록 공의로운 통치를 펼치기 위해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지옥에서 끔찍한 고통을 영원토록 당할 것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의 만족스러운 교제를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해리(Harry)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물었다. 내가 살아온 세월보다도 몇 십 년 더 예수님을 따른 그는 진지하게 나에게 질문했다. 우리는 미국 수도인 워싱턴 D.C. 도심의 성경 박물관(MuseumoftheBible) 꼭대기에 있는 접견실의 작은 탁자에 앉아 있었다. 해리의 어깨 너머로 미국 국회의사당 건물이 보였다.
몇 해 전 우리 가족은 워싱턴 시내로 이사 왔고, 그 뒤로 나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맥 빠지는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물론 십 년 전 예수님을 따르고 성공 신화에서 벗어나 진정한 신앙을 되찾는 데 따르는 대가를 주제로 책을 썼을 때도 비판과 반대가 잇따랐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찬사와 기회도 따라왔다. 당시 목회하던 교회는 나날이 성장했고, 나는 미국 전역을 넘어 전 세계 곳곳에 강사로 초청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성공 신화를 걷어차라고 외친 책을 쓴 결과, 오히려 그 성공 신화와 결부된 많은 것을 얻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여느 교회들처럼 우리 교회도 팬데믹의 직격탄을 맞았다. 우리의 도시와 나라는 선거와 시위와 폭동으로 격동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정치와 인종을 둘러싼 긴장은 깊은 갈등을 낳았고 이로 인해 가족과 교회 안에 심한 분열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예수님을 따르는 것의 의미를 설교했지만 이번에는 찬사가 쏟아지지 않았다. 대신 인격 모독과 비방이 날아왔다. 하나님과 그분 말씀을 향한 나의 사랑이 의심받았다. 나는 지쳤고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해리는 소문을 듣고 뉴스를 봐서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다. 또한 교회 안에 분열을 겪고 있는 전국의 많은 목회자와 대화를 나눈 덕분에 우리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목사님은 대형 교회의 안정적인 자리에서 좋은 평판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걸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해리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한 친구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목사는 오래전 교회에서 큰 난관에 부딪쳤다. 많은 교인이 ‘이것’은 너무 과하고 ‘저것’은 너무 부족하다며 그를 비난했다. 결국 그 목사는 치명적인 결정을 내렸다. 해리의 말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보다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목회의 방향을 틀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고 자신의 평판을 유지하면서 교회 내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쪽으로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 방법은 통했죠. 그 목사는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교인들은 만족스러워 했어요. 하지만!” 해리의 말은 계속되었다. “결국 그는 목회에서, 더 중요하게는 삶에서, 대체할 수 없는 무언가를 잃고 말았습니다. 그는 내면 깊은 곳의 확신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를 용기가 없었습니다.”
해리는 다시 나를 응시하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목사님, 꿋꿋이 버티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고개를 숙였고, 해리는 내게 옳은 길로 꿋꿋이 나아갈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할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이 책을 쓰고 있는 것은 해리의 말이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 낙심하고 좌절하고 지친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만이 아니다. 이 나라의 중심지에서 보니 사방이 아우성이다. 교회 안에서 영적, 감정적, 관계적, 심지어 육체적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 냉랭해진 가족들, 서먹해진 친구들, 편을 나눠 서로 원수처럼 다투는 장로들, 파벌들이 서로 빼앗고 뺏기는 교단들, 실망감에 신앙을 떠나는 수많은 청년, 대학생, 십대들…. 그런데 이 점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세상을 위한 예수님의 메시지나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와 전혀 상관이 없다.
교회 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나는 교회에 환멸을 느끼거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크리스천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직접 봐서도 알고 전해 들어서도 안다. 많은 사람이 교회, 나아가 예수님에 관해 의문을 품고 있다. 내 삶에 어두움이 찾아오면, 나도 그럴 때가 종종 있다.
이 순간까지 오는 여정은 각자 다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사회적, 정치적, 영적, 개인적 위기가 한꺼번에 몰아친 역사적인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는 교회의 정치 알력에 환멸을 느꼈다. 혹은 연민이 없는 교회의 모습에 등을 돌렸다. 우리는 교회 리더들의 스캔들을 목격했다. 심지어 그들의 성폭력을 보았다. 기득권들의 자기 보호와 권력자들의 이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한 연민보다 우선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터넷에서 끝없는 비방의 글을 보았고, 소셜미디어에서 신앙인들 사이의 공격에 지쳤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교만, 이기주의, 권력욕의 바이러스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우리 교회를 감염시키는 모습을 보았다.
이러한 소용돌이에 문화적 기독교(CulturalChristianity, 기독교 문화에 자신의 정체성과 배경을 두는 것) 즉 명목상 기독교에 존재해 왔던 냉담함과 현실 안주가 더해져 많은 이들은 주일 아침마다 ‘예수님은 다를 줄 알았는데. 교회는 다를 줄 알았건만’이라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런데 나는 “분명 다르다”라고 말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다. 진짜 예수님과 교회는 지금 우리가 보는 세상과 전혀 다르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런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예수님의 놀라운 경이로움과 그분의 교회가 보여 주는, 세상과 다른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무언가가 달라져야 한다. ‘저 사람들’이 아니라 먼저 ‘당신과 내 안에서’ 무언가가 달려져야 한다.
이 절박감은 이 책의 제목으로 이어졌다. 앞서 말했듯이 십 년 전 나는 크리스천들이 성공 신화(아메리칸 드림)로부터 신앙을 되찾아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썼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나라의 수도로 거처를 옮긴 뒤 미국 교회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나니 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문제는 우리의 삶을 사로잡은 ‘아메리칸 드림’(Americandream)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앗아 간 ‘아메리칸 복음’(Americangospel, 이후에 때에 따라 ‘거짓 복음’으로도 병행해 사용하려 한다-편집자 주)이었다.
‘아메리칸 복음’이란 무엇일까?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님을 높이는 성경적인 복음을 버리고, 그 자리를 안위와 권력과 정치와 번영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아메리칸 복음과 맞바꿔 왔다. 아메리칸 복음은 아메리칸 드림에 기독교의 색깔만 입힌 거짓 복음이었다. 증거는 도처에 깔려 있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연합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개인적인 신념과 정치적인 신념이라는 우상 앞에서 너무도 쉽게 분열된다.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 가능하게 하신 다인종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는 여전히 피부색 때문에 분열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 광야에서 목마른 친구들을 위한 물로 사용하기보다는 문화 전쟁에서 적을 향해 휘두르는 무기처럼 사용하고 있다. 우주의 공의로운 통치자를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주변에 가득한 불의를 모른 체하고, 복음을 열방에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사실상 무시한 채 자기 나라의 위대함을 높이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깊은 낙심과 환멸과 상처와 의심과 분열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거짓 복음을 받아들인 결과이다. 하지만 진정한 복음으로 돌아가기 위한 겸손과 용기가 있다면 예수님을 따라 다른 미래로 갈 수 있다.
그 미래는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싸우는 미래이며 우리는 그런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복음은 적대감의 벽을 세상과 다른 차원의 연합으로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서로를 그리스도 안의 형제자매로 여기는 미래로 갈 수 있다.
교회 안에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인종 차별의 물줄기를 바꾸어 아름다우신 예수님에게서 정체성을 찾는 미래로 향할 수 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까지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으면서도 (의견이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을 연민으로 사랑하는 미래로 걸어갈 수 있다.
정의에 관해 논쟁만 하지 않고 실제로 정의를 실천하는 미래로 향할 수 있다.
열국이 예수님을 누리고 높이도록 만드는 일에서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하는 미래로 발맞추어 갈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복음의 목표요 선물이며 상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새롭게 혹은 처음으로 깨닫는 미래이다. 우리의 영혼이 갈망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는 미래로 나갈 수 있다.
물론 아메리칸 복음을 문제로 본다고 해서 하나님이 미국에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몰라하면 곤란하다. 우리 교회에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기회를 지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서로 힘을 합쳐 말할 수 없는 희생을 감내한 남녀가 가득하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자유와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 나라에서 온 이민자 가족들도 가득하다. 이 책에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들 모두에게 깊이 감사한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고 전할 자유를 주는 이 나라에 깊이 감사한다. 단지 이 책은 아무리 큰 축복을 받았다 하더라도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우상들을 손에서 놓고 영원토록 다스리실 왕의 복음을 굳게 부여잡기 위한 길을 보여 주려는 시도이다.
내가 모든 답을 손에 쥐고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 마음이 내가 기술하려는 거짓 복음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없다. 나 역시 여행 중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을 모르지만 앞에 놓인 길이 매우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안다. 하지만 물러서고 싶지 않다.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가 제시하는 것은 아메리칸 복음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분을 온전하게 경험하고 누리고 싶다.
하나님이 나를 아버지가 되게 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른 곳에서 여러 번 말했듯이 아내와 나는 오랫동안 불임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결국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얻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가족을 이루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믿었기에 카자흐스탄에서 첫째 아들 케일럽(Caleb)을 입양했다.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집에 돌아온 지 2주째에, 놀랍게도 아내가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홉 달 뒤에 내가 수년간 기도해 왔던 아이인 조슈아(Joshua)를 품에 안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문득 하나님이 내가 꿈도 꾸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 가족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 후 우리가 중국에서 딸 매러(Mara)를 입양하면서 우리 가족은 더욱 확장되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놀랍게도 아내는 다시 임신을 했다. 그리고 우리의 네 번째 아이 아이제이어(Isaiah)가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여섯 명이 되었다.
몇 년 뒤 아내와의 저녁 데이트에서 다시 입양 이야기가 나왔다. 나도 아내도 입양에 관한 대화를 또 하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날 밤 음식점에서 계산을 마칠 즈음, 우리는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입양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확신을 얻었다. 우리의 얼굴은 환히 웃는 가운데서도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어느 날 아내와 나는 각자 하나님과 단 둘이 시간을 보내면서 시편 127편을 읽던 중에 둘 다 특별히 갓난아기를 입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느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입양 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몇 달 뒤 곧 여자아이를 출산 예정이며 입양을 원하는 한 산모에 관한 정보를 얻게 되었다. 이 생모는 이미 딸의 이름을 지어 놓은 상태였다. 아내와 나는 하나님이 또 다른 딸을 주시면 머시(Mercy)로 이름을 짓고 싶다고 늘 말해 왔기 때문에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 아이를 입양하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생모를 만났는데 글쎄 그녀가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었는지 아는가?
바로, ‘머시’였다!
이 예쁜 여자아이는 생후 이틀 만에 우리에게 맡겨졌고, 이 책의 집필이 끝난 지금 공식적으로 머시 플랫(MercyPlatt)이 되었다.
온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앉을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이런 가족을 이루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하나님이 그려 주신 이 가족의 그림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책의 포문을 여는 지금, 당신에게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무한히 더 놀랍고도 아름다운 가족 즉 하나님의 가족을 보여 주기를 원한다. 그것은 얼굴 생김새와 피부색이 전혀 다른 형제자매들로 이루어진 가족이다. 저마다 생각이 다르고, 각자 다른 사회규범에 따라 살아왔으며, 각자 다른 배경과 나라에서 왔다. 아이오와주 꿈의 구장에서든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에서든 아니 세계 어디에서든 이렇게 모인 가족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렇게 철저히 다른 사람들이 공통점이 있단 말인가?’
당신이 이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나라에서 와서 최근 이 나라의 시민이 된 신자의 얼굴을 보라. 그 옆자리에는 인종 차별 철폐를 외치는 검은 얼굴의 오순절파 교회 신자가 앉아 있다. 그 옆에는 군에서 제대한 뒤 경찰관으로 일하는 침례교인과 변호사로 일하는 보수적인 장로교인이 나란히 앉아 있다. 그 옆에는 공유 주택에서 생활하는 26세의 사회 운동가가 중앙아메리카에서 막 들어온 크리스천 불법체류자와 나란히 앉아 있다. 이 불법체류자는 플로리다주 중부에서 온 글로벌기업인 페이스북 그룹 임원에게 식탁에서 감자를 건네고 있다. 이 모든 사람이 어떻게 한자리에 모일 수 있었을까?
답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에 있다. 이들 모두는 같은 하늘 아버지를 두고 있다. 이들은 모두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 입양되었다. 그분의 아들딸로서 그분의 가족으로 환영을 받았다. 이들을 향한 그분의 놀라운 사랑으로부터 서로에게 놀라운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흘러나온다.
이 가족을 교회라 부른다. 당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면 당신도 이 가족의 일원이다. 당신도 같은 식탁에 앉아 있다. 지금 이생에서만 이 가족의 일원이 아니다. 당신과 나는 영원토록 하나님 가족의 일원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 전, 지금 우리는 중요한 가족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이 대화는 힘들지만 꼭 해야만 한다.
자, 준비되었는가?
우리 교회 가족은 아픈 상태이다. 특히 미국에 둥지를 틀고 있는 가족들이 심하게 아프다.
우리는 식탁에서 함께하는 자리를 즐기며 서로를 격려하고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대신, 툭하면 서로를 비난하고 깔보고 배척하고 불신하는 문화적 풍토에 갇혀 있다. 너무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분열을 넘어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실망감과 상처를 안고 식탁을 떠나고 있다.
하지만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서로 잘 지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말할 수 없이 좋으신 아버지 앞에서 말할 수 없이 화목한 가족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연합
예수님은 연합의 대가이시다. 그분은 이 점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성격이 서로 완전히 딴판인 사람들을 한 무리로 묶으셨다. 즉 노동자 계층인 못 배운 어부들을 부르실 뿐 아니라 애국에는 일체 관심도 없어 로마 압제자들에게 세금을 걷어 바친 부유한 세리들도 부르셨다. 그런가 하면 스펙트럼의 정반대 끝에서 종종 군사적으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던 열성당원 시몬도 부르셨다. 정치적인 성향이 완전히 달랐던 사람들이 함께 생활했다는 것이 상상이 가는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서로를 참아 주는 법을 배웠다. 서로에게 목숨을 내어 주는 법을 배웠다. 바로 이런 연합이 예수님이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이다. 연합은 그들의 미래를 위한 그분의 비전이었다. 실제로 그분은 그들을 위해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기도에서 그들이 하나가 되어 그분의 사랑에 관한 초자연적인 그림을 세상에 보여 주게 해달라고 기도하셨다(요17:20-26).
결국 그들은 그렇게 되었다. 그들이 세운 교회의 새로운 신자들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졌다. 남자와 여자,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 노예와 자유인, 히브리인과 헬라인이 한데 어우러졌다. 이방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그들을 미워했다. 하지만 유대인 제자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모든 것이 변했다. 태생이 유대인이고 스스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라고 자부했던 바울은 한때 증오했던 사람들을 사랑해 주는 일에 평생을 보내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결국 유대인과 부유한 로마인과 온갖 이교도 문화에서 온 가난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되기를 위해 기도하셨고, 그들은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 결과, 복음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것이 오늘날 당신과 내가 하나님의 가족 안에 있는 이유이다. 우리가 앞서간 그들의 본을 따른다면, 연합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대로 한다면,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해 주는 일에 한몫하게 될 것이다.
연합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가족을 적들로 편 가르기 위한 온갖 종류의 이유를 찾아왔다. 그로 인한 감정적, 영적 폐해는 실로 엄청나다. 우리가 피부색에 따라 어떻게 여러 교회로 분열되었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피부색으로만 분열되어 있지 않다. 정치적으로도 분열되어 있다. 여론 조사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교인들과 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점을 보여 준다.[1] 우리는 영적 은사, 종말의 시점, 세례 방식, 교회 리더십 같은 신학적 이슈로 분열되어 있다. 교회 음악, 예배 시간의 길이, 교회 장식 등 온갖 형식적인 취향으로도 분열되어 있다.
물론 이런 것에 대해서 다른 의견들을 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내가 목회하는 우리 교회만 찾아 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지역에서 (나아가 전국에서) 다른 신념에 따라 다르게 목회하는 교회라 하더라도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을 믿는 교회라면 얼마든지 응원한다. 그 교회들이 더 많은 사람을 전도하기를 바란다. 같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와 매우 다른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며 깊고도 진정한 교제를 누릴 길이 있는가?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다른 교회에 다니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교인들에게도 초자연적인 사랑을 보여 줄 길이 있다. 각 교회 안에서, 각 국가의 교회들 사이에서, 전 세계적인 그리스도의 몸 전체 안에서 이런 사랑의 연합을 이룰 길이 있다.
그 길은 누가 우리를 연합시키는지, 그리고 서로 나뉠 수 있는 이유와 나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
세 개의 통
세 개의 통을 머릿속에 그려 보라. 첫 번째 통은 분명한 성경적 신념과 관행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모든 제자를 연합시키는 통이다. 이 통에는 복음이 담겨 있다. 복음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복음은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우주의 창조주께서 절망적으로 악한 사람들을 보시고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인 아들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서 그 죄의 심판을 받게 하시고 그분의 부활을 통해 죄를 이기는 능력을 보여 주신 덕분에 어느 나라의 누구든지 죄와 자기 자신에게서 돌아서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그분과 영원토록 살 수 있다는 복된 소식이다.”
첫 번째 통에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 무오성, 충족성도 들어 있다. 그 말씀 안에 있는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진리와 명령들도 들어 있다. 뒤에서 자세히 탐구하겠지만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충분한 기초이다.
크리스천들은 첫 번째 통에 포함된 신념과 관행에서 불신자들과 분명히 나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거나 구원이 은혜로 받는 것이 아니라거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고 돌봐야 하지만 그와 함께 교회를 이루어 예배할 수는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같은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권위와 충족성(sufficiency)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안에서 그와 연합할 수는 없다. 다만 그를 불신자로서 사랑하고 그를 예수님께로 이끌기 위해 우리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세 개의 통 중에서 두 번째 통에는 지교회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연합시키는 신념과 관행이 들어 있다. 이 통에는 교회마다 의견이 다른 것들이 포함된다. 지교회들은 주로 이 두 번째 통에 포함된 신념과 관행에 따라 여러 교단으로 나뉜다. 그럼에도 모든 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다른 교단의 교회들과 협력한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는 아기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고 다른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 본인에게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믿을 수 있다. 어느 교회는 남녀 상관없이 목사가 될 수 있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믿는 반면, 다른 교회는 성경에 따르면 오직 남자만 목사가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또 어느 교회는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언이나 방언이나 치유의 영적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 반면, 다른 교회는 그런 은사가 과거에서처럼 오늘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 크리스천들은 두 번째 통의 신념과 관행에 따라 각기 다른 교회로 나뉘지만, 어디에 있든 예수님의 제자로서 서로를 응원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손을 잡으며 연합할 수 있다.
세 번째 통에는 같은 교회 안에서도 교인들끼리 다를 수 있는 신념과 관행이 포함된다. 한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세례, 영적 은사, 교회 리더십에 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하지만 언제 종말이 시작될지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할 수 있다. 정치적 선택을 비롯해서 다양한 개인적 신념은 다를 수 있다. 대개 교인들은 이런 문제에서는 각자 다른 입장을 고수하더라도 입장이 같은 교인들끼리 나가서 따로 교회를 세우거나 하지는 않는다.
통을 혼동하다
교회 연합의 문제점들은 이 통들을 혼동하여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최근 미국 대선 기간 중에 몇몇 크리스천들 심지어 교회 리더들이 “아무개를 뽑지 않으면 크리스천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다. 다른 진영의 크리스천들 역시 이 문장의 처음에 ‘아무개’ 대신에 그들이 지지하는 후보자 이름을 넣었다. 이러한 대립은 대선 후보 선택을 첫 번째 통의 범주로 혼동해서 빚어진 일이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이유로 서로의 신앙을 의심하는 일이 벌어진다. 하지만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할지에 관한 입장은 결코 복음의 핵심이나 성경의 권위에 관한 확신만큼 중요하지 않다.
2020년 대선 기간에 나도 모르게 논란이 될 만한 발언을 하고 말았다. “교회로서 우리는 대선 후보 선택 때문에 분열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로 우리가 갈라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은 이 교회와 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부디 맞는 교회를 찾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자매로 축복하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부디 복음을 선포하고 성경을 믿는 교회에 가셔서 계속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길 바랍니다.”[2] 다시 말해, 우리는 대선 후보 선택을 세 번째 통에 넣기로 결정했다. 그런 이슈에 관해서 서로 의견은 다를 수 있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나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혹시 궁금해할 것 같아 말하자면, 우리 교인들은 누구에게 투표할지에 관해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여전히 교회로서 똘똘 뭉쳐 있다.
우리 교회 가족은 다양한 색깔이 어우러진 다민족 교회이다. 수백 개 이상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우리 교인들을 둘러볼 때마다 세 번째 통의 이슈들에서 연합하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