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한 도전
2022년 11월 18일 초판 1쇄 발행
지은이 정경화
기획 토스 브랜드커뮤니케이션 팀
디자인 권영찬
마케팅 주소은, 이지영, 용석민
펴낸곳 ㈜북스톤
주소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이로20길 3, 6층 602호
대표전화 02-6463-7000
팩스 02-6499-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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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등록 2015년 1월 2일 제2018-000078호
펴낸이 김은경
편집 권정희, 이은규
마케팅 박선영
디자인 김경미
경영지원 이연정
ⓒ 비바리퍼블리카
(저작권자와 맺은 특약에 따라 검인을 생략합니다)
ISBN 979-11-91211-89-4 (05320)
정가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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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책을 떠올린 것은 2021년 늦은 가을이었다. 봄에 뿌린 씨앗이 여름 내 뜨거운 햇볕과 거센 빗발에도 살아남아 기어이 열매를 맺는 계절. 토스는 그 해 토스증권을 론칭해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렸고, 토스뱅크도 활짝 문을 연 참이었다. 덕분에 토스 사용자 수는 해를 넘기기 전에 2000만 명을 돌파했다. 하나의 앱에서 금융의 모든 순간을 가능케 만들겠다는 꿈은 현실이 됐다. 토스는 마치 이 계절처럼 결실을 거둬들일 채비를 마친 듯했다.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면 이 책은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돋보기로 들여다본 토스는 달랐다. 일견 거대해 보이는 성취는 ‘실패’라는 수없이 많은 획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지나온 단계마다 도전과 좌절, 충돌과 갈등이 있었고, 여전히 겪는 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담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실패를 겁내지 않으며, 치열하게 다투고, 급진적으로 솔직한, 단순함을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한 권의 책으로 엮어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이야깃거리가 토스팀에 넘쳐났다.
먼 미래에 토스팀의 시작을 돌아볼 수 있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현실에 굳게 발 딛고 있는 기록은 오래도록 큰 힘을 발휘한다고 믿었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조심스럽게 “하고픈 일이 생겼다”는 말을 꺼냈을 때, 커뮤니케이션 헤드인 윤기열 님은 단숨에 “책?”이라고 반문했다. 토스팀 리더인 이승건 님은 “가장 솔직하고 과감하게 써달라”고 즉답했다. 열일 제쳐두고 한동안 매달려야 할 것이 빤했는데도 동료들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 · 현직 토스팀원 35명 인터뷰를 책의 뼈대로 삼았다. 처음엔 20명 정도 만나볼 생각이었는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궁금한 게 많아지고 욕심이 나서 수가 자꾸 늘었다. 이 가운데 8명의 인터뷰는 금혜원, 이지영 님이 흔쾌히 맡아주었다. 여섯 차례 20시간에 걸쳐 온갖 잡다한 질문에 정성스럽게 답해준 이승건 님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완성될 수 없었다. 정확히 기억하는 이가 드문 창업 초창기를 이해하는 데에는, 특히 남영철 님이 보관하고 있던 당시의 메모와 회의록이 큰 도움이 됐다. 재직 중인 팀원들은 물론이고, 이제는 토스팀을 떠난 이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어 흥미롭고 입체적인 기억을 들려주었다. 무엇보다 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토스의 현재를 이루고 있음을 기록해두고 싶다.
이 책은 2011년 봄부터 2022년을 시작하는 순간까지, 약 11년의 기간을 다룬다. 그보다 더 가까운 현재는 마치 살아 숨쉬는 생물 같아서 감히 글로 정리하지 못했다. 그저 ‘앱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던 단 한 명에서 시작해 2000명의 공동체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어야만 했던 부끄러운 실패, 절체절명의 위기, 돌아보니 중차대했던 결정, 짜릿한 성공의 순간 순간을 성실히 묘사하고자 했다. 토스팀의 일원인 덕분에 더 내밀한 이야기를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관찰자의 시각을 지키고 싶었다. 팀원들이 꿈꾸고 좌절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극복하고 기뻐한 기억과 그 감정에 불순물을 보태지 않으려 노력했다. 인터뷰 외에도 슬랙 메신저에 남아 있는 대화, 주요 이메일, 언론 기사나 영상 등 가능한 많은 자료를 발굴해, 과거를 회상하는 팀원들의 목소리에 현재성과 객관성을 불어넣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균형 잡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 책에 불충분한 설명과 편협함이 남아 있다면, 이는 온전히 나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토스팀원끼리 주고 받은 이메일과 슬랙 메시지 등은 최대한 원문 그대로 실었다. 다만 어색한 문장은 곡해하지 않는 선에서 다듬었다. 업계에서만 통용되는 표현, 전문 용어는 독자가 따로 찾아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본문 내에서 풀어 썼다.
‘유난하다’는 단어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토스팀에는 유난히도 많은 도전이 찾아왔다. 말 그대로 칠전팔기 끝에 찾아낸 간편송금은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셧다운됐다. 재개한 후에도 모든 시중은행과 제휴 맺기까지 꼬박 3년이 걸렸다. 야심 차게 시작했던 토스대부는 그 이름 때문에 탈퇴 러시로 문을 닫았다. 증권사와 인터넷은행에 멋모르고 뛰어든 탓에 고난은 계속됐다. 덩치 큰 경쟁자들은 늘 곁에 도사렸다.
그래서인지 토스팀 사람들은 유난했다. ‘토스 한번 살펴봐달라’는 손편지를 수백 장 써서 은행 지점장들에게 부쳤다. 늦은 밤까지 일하다 퇴근해도 아침이면 1분 1초라도 빨리 사무실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차올랐다고 했다. 내 손가락이 더 빨리 움직일 순 없을까 아쉬웠다고 했다. 제품을 출시한 날에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격려하기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1시간 간격으로 밤새워 지표를 들여다봤다. 성장은 피곤도 아픔도 잊게 한다고 했다. 끝의 끝까지 파내려가야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토스팀원들이 말하는 몰입의 순간들이었다.
다시 가을이 왔다. 지난 1년은 ‘이 사람들, 왜 이렇게까지 할까?’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여정이었다. 묻고 또 묻고, 답변 내용을 찬찬히 여러 번 들여다보고 글로 써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답을 찾지 못해 헤맸다. 어느 밤에는 토스가 시작되었던 선릉역 낡은 오피스텔을 찾아가 가만히 서성여보기도 했다.
끝의 끝에서 겨우 건져올린 답은 싱거웠다. 남다른 성취를 하고 싶다면 남달리, 유난히, 각별히 노력하고 헌신하는 수밖에, 그보다 영리한 지름길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노력과 헌신이라는 단어가 어쩐지 낡아 보이는 시대이지만, 다른 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책의 제목이 정해졌다. ‘토스는 유별나다’는 어떤 시선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공적인 창업 지침서라거나 핀테크 경영서가 될 수는 없었다. 주인공이 극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아름다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동화일 수도 없었다. 토스팀은 오늘도 어김없이 실패하고 있다. 꿈을 이룬 듯 보일 때마저도 더 큰 꿈을 꾸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토스팀의 여정을 돌아보려고 하니, 사람들 이야기만 남았다. 인생의 어느 시기, 남다른 목표를 향해 있는 힘껏 경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이 이야기가 저마다의 목표를 향하여 유난한 도전을 치러내고 있는 이들과 만나 공명하기를 소망한다.
2022년 가을, 정경화
당신이 진정으로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Steve Jobs
2005 Stanford Commencement Address
비바리퍼블리카가 간편송금 서비스 ‘토스’를 정식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은 2015년 2월이지만, 회사의 시작은 2013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치과의사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아들로, 평탄한 삶이 보장된 것 같았던 이승건이 ‘다른 길’의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은 그보다 더 전이다. 외딴 섬에서 허겁지겁 책을 읽어치우던 공중보건의 시절이었는지, 처음으로 아이폰을 만나 스티브 잡스의 인생에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었는지 정확지는 않다. ‘이승건이 언제 창업가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특정한 하루로 답하기는 어렵다. ‘잘 안 되면 그걸로 그만이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발을 들어 다른 세계에 내디딘 것은 2011년 봄이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나머지 한쪽 발은 의사의 길 위에 있었다.
여정의 시작
“벌써 서른이잖아. 더 방황하지 말고 개원해야지. …… 아냐, 조금 더 미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고 싶어.”
이마트 안을 어슬렁거리던 이승건이 중얼거렸다. 얼마 전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그는 개원할 자리를 물색하고 있었다. 서울서 1시간 반쯤 떨어진 동네 이마트에 괜찮은 자리가 났다는 연락을 받고 찾아온 참이었다. 유동인구 많은 대형마트 안에 병원을 여는 게 좋다고들 했다. 근처에 아파트 단지도 크고 지하철역으로도 이어져 있어 과연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승건의 표정은 마뜩잖았다.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마트 안을 오가는 사람들 모습을 미동도 않고 지켜봤지만, 그의 마음은 엉뚱한 방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전공의 시절이 떠올랐다. 이승건은 돈 걱정 없이 살고 싶어 치과대학에 갔고, 실제로 치과의사 월급은 그에게 충분히 많았다. 그는 내내 부모님에게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앞뒤 꽉 막힌 모범생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남들 보기에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 노는 ‘엄친아’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 삶에 자족했다.
어느 날 자기 병원을 차린 7년 선배가 밥을 사주겠다고 의국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우리도 나중에 저런 차 탈 수 있겠지?” 벤츠 세단을 몰고 온 선배를 보며 의국 사람들은 ‘드림카’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쩐지 그 말에 더럭 겁이 났다. 꿈의 크기가 겨우 비싼 외제차 정도인 사람에 머물게 될까 봐 두려웠다. 가능한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꿈을 꾸고 싶었다.
이승건은 전공의 과정을 그만두고 푸르메재단의 장애인 병원에서 일했다. 충만한 시간이었다. 이가 어떻게 아픈지 제대로 설명조차 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치료를 받고서 고통이 사라진 표정으로 환히 웃어 보일 때 이승건은 ‘치과에서 계속 일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삶을 더 낫게 변화시킨다는 자부심이 그를 부지런히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그러고 나서 3년 동안 공중보건의로 복무했다. 첫해는 목포에서 배로 2시간, 그마저 파도 높은 날엔 오도가도 못하는 작은 섬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서 지냈다. 2년 차부터는 충북 청원군의 작은 보건소에서 일했다. 별달리 놀거리가 없는 동네였고, 이승건은 밤마다 책에 파묻혀 지냈다. 특히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에 매료되었다.
이승건은 몰락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으며 꿈을 키웠던 나폴레옹의 삶에 자신을 투영했다. 나폴레옹은 기존의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인물이었다. 프랑스군이 빠르게 진격하면서도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통조림을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고, 시가전에서 대포를 쏘아 진압하는 파괴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나폴레옹은 또한 공화주의자였다. 황제에 오른 뒤에도 자신을 공화주의자라 칭하며 공화주의를 지켜야 하는 이유를 장문으로 남겼다. 이승건 역시 공공선을 추구하는 로마 공화정을 깊이 흠모했다.
«진보와 빈곤»을 쓴 헨리 조지로부터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탐구하는 자세를 배웠다. 고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헨리 조지는 대도시 뉴욕에 마천루가 늘어서는 와중에 거지가 늘어나는 이유, 그리고 그들을 가난으로부터 구제할 방법을 평생 찾아 헤맸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등장하는 제왕들은 누구도 사익을 좇지 않았다. 누가 더 현명한 방식으로 더욱 거대한 변혁을 일으키느냐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책장을 넘길수록 꿈이 부풀었다. 저들처럼 더 많은 이들의 삶에 한꺼번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 세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대한 변화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의사로서 한 명 한 명의 삶을 바꾸는 일은 보람 있지만 더뎌 보였다. 생은 짧았다.
소집해제 이후 이승건은 관성처럼 제자리로 돌아갔다. 새로운 일에 뛰어들기에는 아무래도 멀리 온 것 같았다. 의사 말고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말은 부모님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어떤 다른 일?’이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장사가 잘될 것 같은 병원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며 이승건은 그저 풍운의 꿈을 꾸던 몇 달 전의 자신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이대로 병원을 열면 후회할 것 같다는 감(感)과, 좋은 자리가 났을 때 개원하지 않으면 낭패를 볼 거라는 셈이 부딪쳤다.
갈팡질팡하던 이승건을 붙잡은 것은 ‘아이폰’이었다. 2010년, 한국에 아이폰 열풍이 불었다. 이승건은 아이폰을 처음 보고 만졌던 그날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널찍한 화면을 손가락 터치만으로 조작할 수 있다니. 인터넷 검색은 컴퓨터에서처럼 빠르고 편리했고, 구글 맵은 목적지로 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순식간에 알려줬다.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
이승건의 머릿속이 스티브 잡스라는 사람으로 가득찼다. 집에 돌아가자마자 검색했다. 잡스가 세상에 아이폰을 공개하며 직접 시연했던 역사적인 영상을 찾아봤다. 수많은 이들의 삶을 곧장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혁신임이 분명했다. 누구도 그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야말로 비가역적인 변화였다. 이승건은 아이폰을 샀고, 종일 온갖 앱을 다운로드해 써봤다. 개원 준비보다 아이폰을 만지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썼다. 무엇보다 그를 잡아끈 것은 잡스가 남긴 그 유명한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1이었다. 암 투병 중이던 잡스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곧 죽을 것임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서 큰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모든 외부의 기대들, 자부심, 좌절과 실패의 두려움, 그런 것들은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을 남기게 됩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에 맞춰 사는 함정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를 가리는 소음이 되도록 놔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 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은 이미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는 모두 부차적인 것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한 것은 이승건도 마찬가지였다. 공보의 시절 그는 주말마다 배 타고 KTX 타고 서울까지 가서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열의를 보였는데, 어느 연말 독서모임 송년회에서 문득 공포를 느꼈다. 1년 전에도 같은 사람들과 같은 모임을 한 기억이 생생한데 벌써 한 해가 지났다니. 갑자기 시간의 속도가 체감되었다. 이렇게 시간이 흐른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할아버지가 돼 죽음을 맞을 수도 있겠구나. ‘마음과 직관을 따르라’는 잡스의 말은 이승건에게 깊이 가닿았다.
마침내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아이폰이 바꿔놓는 세상의 변화를 실감하면서, 그 거대한 흐름에 올라타야 한다는 확신도 있었다.
‘앱 하나만 만들어보는 거야. 개원은 반년만 미루자. 어차피 좋은 자리도 아니었어.’
물론 마음속에는 안전핀 하나가 있었다. ‘언제든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잖아.’
이태양을 만나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튀어나오던 때였다. 이승건은 온라인에서 열심히 맺는 사회 관계망이 오프라인으로도 이어지는지 궁금했다. 진정한 의미의 관계는 상대와 현실에서 만날 때 쌓이는 것 아닐까? 이승건은 여타 SNS 서비스와 다르게 사용자 간의 실제 만남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소셜 앱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피상적인 네트워크를 쌓는 것보다 친구, 가족 등 주변 사람들과 실제로 만나 보내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개발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외주 개발자들은 시키는 작업만 했고, 새로운 기능을 요청하면 이런저런 이유를 들며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다 스물여섯 살 이태양을 만난 건 2011년 늦은 가을이었다.
이태양은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고, 네이버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입사가 결정된 상태였다. 네이버는 그때도 개발자들에게 선망의 직장이었다. 회사에서 환영 카드와 꽃다발을 대전에 있는 이태양의 집으로 보냈고, 부모님도 기뻐했다. 그는 입사일까지 남은 두 달 동안 개발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을 벌 심산이었다. 학교 선배를 통해 ‘울라블라’라는 소셜 앱을 만들고 있다는 이승건을 소개받은 것이 그 무렵이었다.
이승건과 이태양은 처음부터 쿵짝이 잘 맞았다. 이태양은 세상이 정해놓은 관습과 원칙에 늘 ‘왜?’를 묻는 사람이었다. 의문이 풀리지 않으면 바닥까지 파내려갔고, 온몸으로 이해한 바를 바탕으로 나름의 원칙을 정립해가는 사람이었다. ‘태양이 하나 더 있으면 더 밝지 않겠냐’며 자신을 ‘삼태양’이라 부르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이승건이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안 된다’고 잘라 말하기보다 되게 만들자고 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단숨에 가까워졌다. 온갖 잡다한 주제로 수다를 떠느라 밤늦게까지 공유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는 날이 수두룩했다. 이태양이 대전 집에 돌아갈 차편을 놓치면 둘은 이승건의 부모님 집으로 퇴근했다. 이튿날이면 이승건의 어머니가 차려주는 아침 밥을 먹고 다시 사무실로 출근했다. 하루 24시간을 붙어 지냈다.
어느 밤에는 «초한지»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항우는 역량과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천하가 벌벌 떠는 캐릭터다. 유방은 상대적으로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주변에 한신처럼 좋은 사람들이 모였다. 한신은 스스로 왕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지략이 뛰어나고 세간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지만, 끝까지 유방을 배신하지 않았다. 결국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한고조에 올랐다.
그 밤, 이태양은 한나라 개국공신 한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의 한고조는 물론 이승건이었다. 세상의 문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정의하고 풀어가려는 이승건을 돕고 싶었다. 그가 뜻을 이루는 데 쓰일 좋은 무기가 되고 싶었다.
언제부턴가 이태양은 이승건을 ‘대장’이라 불렀다. 처음 약속했던 아르바이트 기간 두 달이 끝나갈 무렵, 이태양은 네이버 입사 포기를 선언했다.
“내 길을 찾은 것 같아, 대장. 나는 대장이랑 창업의 길을 갈래.”
이름처럼 무한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이태양을 이승건은 와락 껴안았다.
1년이 흘렀다. 두 사람은 내내 헛발질했다. 무수한 팀원들이 왔다가 곧 떠났다. 외주나 아르바이트로 일을 맡은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은 팀에 정을 붙이지도 제품에 정성을 쏟지도 않았다. 이승건은 여전히 서로 다른 세계에 한발씩 걸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페이닥터로 치과에 일하러 갔다. 앱을 만드는 데 온전히 에너지를 쏟을 수 없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최소한의 회사 운영을 위해 인건비와 공유 사무실 임차비 정도는 어떻게든 계속 벌어와야 했다. 모아둔 돈에는 한계가 있었다. ‘앱이 대박 나면, 그때 의사를 그만두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한 켠에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깨금발로 모험을 계속할 수는 없는 법이다.
“대장, 인생 걸 거 아니면 지금 솔직히 얘기해줘. 언젠가 치과의사로 돌아가 버릴 거라면, 나는 지금 여기서 그만두는 게 낫겠어.”
이태양이 말을 꺼냈다. 그는 이승건의 상황을 이해했지만 혼자 사무실을 지키는 시간이 견디기 힘들었다. 친구들이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건너 들을 때면, 어쩐지 자신의 미래만 안갯속에 갇힌 것처럼 뿌얘 보였다.
“나는 다 버리고 뛰어들었는데, 대장은 여차하면 의사로 돌아가 버리는 것 아냐?”
이태양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물어본 것”이라 했지만, 이승건은 그가 용기 내어 진심을 털어놓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아차’ 싶었다. 두 발 모두 선을 넘어야 한다는 것을 이승건 역시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걸고 헌신해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는데, 일주일에 이틀은 의사로 일하면서 창업가로도 성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더욱이 ‘도망갈 길을 열어둔 채’라는 점이 전혀 멋지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태양에게서 받는 에너지를 잃고 싶지 않았다. 이태양에게 작별을 고하고 치과의사로 돌아갈 거냐, 이태양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거냐.
‘더이상 선택을 미루지 말자.’
2013년 4월 21일 이승건은 비바리퍼블리카라는 이름으로 법인을 설립한다. 정확히 기억하는 이는 없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이승건은 창업의 세계에 두 발 굳건히 딛고 선 것으로 보인다. 이승건은 파트타임 치과 근무를 그만뒀다. 또 다른 개발자 박광수, 김민주가 팀에 합류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세상 누구도
원하지 않는
‘앱 하나만 만들어보자.’
가벼운 마음으로 일을 벌인 이승건은 꼬박 3년에 걸쳐 결코 끝이 없을 것 같은 실패의 시간을 보냈다. 토스는 비바리퍼블리카의 아홉 번째 제품이었고, 그 앞 여덟 번의 시도가 실패였다. 매번 살고자 몸부림쳤으나 그러지 못했다. 두세 번쯤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하다 가라앉았고, 나머지는 빛도 보지 못했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이승건은 지금도 실패를 질겅질겅 곱씹는다.
첫 번째 실패는 울라블라였다.
울라블라는 오프라인 만남을 기록하고 친구들과 공유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였다. 사용자 두 사람의 휴대폰이 가까이 있어야 만났다는 걸 인증해줬는데, 이를 위해 휴대폰 간 근거리 무선통신 기술을 직접 개발하기도 했다. 안드로이드끼리, 아이폰끼리는 통신이 잘되는데 안드로이드와 아이폰 간의 통신은 종종 버벅거려 이를 해결하느라 숱한 밤을 새웠다. 누군가 베낄까 봐 기술 특허까지 냈다. 지금도 주식회사 비바리퍼블리카의 특허 목록에 남아 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디자인이 별로인가 싶어 다시 만드는 데 9개월을 썼죠. 반드시 성공할 거라 믿었기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만드는 동안 누가 따라 할까 봐 조급해집니다. 그래서 특허를 냅니다. 특허를 획득하는 데 걸린 시간만 1년이에요.”
울라블라는 1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그럭저럭 괜찮은’ 유저 인터페이스를 갖췄다.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에서 앱 디자인이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고 싱가포르까지 날아가 상을 받기도 했다. 수상 소식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앱을 써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다운로드 수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려지기만 하면 대박 날 거야’라는 희망은 버리기 어려웠다. 각종 스타트업 경진대회에 나가고 사람들을 만나 앱을 알렸다. 돈을 써서 온라인 광고도 했다. 만남을 울라블라 앱에만 기록하지 않고 막 흥행하기 시작한 인스타그램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라 생각해 연동 기능을 개발해 넣었다. 사진 보정 필터도 만들어 넣었다. 아무도 쓰지 않는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앱이었다.
초조해진 이승건과 이태양은 울라블라가 세상에 퍼뜨리고자 했던 가치와는 동떨어진 일들을 벌였다. 실패를 똑바로 마주볼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오프라인 만남을 앱에 기록하고 싶을 것’이라는 첫 번째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중간에 포기하고, 생각을 바꾸고, 방향 전환하는 걸 죄악시했다. 울라블라가 잘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100가지는 읊을 수 있었다. 이태양은 “우리가 풀고 싶은 문제에 몰두한 나머지, 사람들의 공감을 전혀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고 말했다.
“세상이 받아들이는 문제의 크기보다, 우리가 느끼는 문제의 크기가 너무 컸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서비스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는 거죠. 제품은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쓰는 사람은 전혀 늘지 않았어요.”
울라블라의 실패를 인정하고 서비스를 접기까지 1년 4개월이 걸렸다. 자본금 5000만 원짜리 비바리퍼블리카는 인건비를 포함해 이 앱에 2억 2000만 원을 썼다. 개발 과정에서 팀원이 8명까지 늘어났지만 이태양 외에 모두 떠났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 마음껏 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실패했지만 좋은 기억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힘들 때 의지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 침묵 속에 짐을 쌌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실패라는 결과는 고통스러워서, 서로 아이디어를 나누고 희망에 부풀어 일했던 기억마저 지워버렸다.
박광수, 김민주 등이 합류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보트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었다. 다보트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 의견을 올리고 투표할 수 있는 모바일 앱이었다. 구조는 단순했지만, 다보트의 꿈은 컸다. 이승건은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효율적으로 결론을 도출해, 정부의 정책적 의사결정에 시민의 뜻이 반영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광장이 수행하던 공론장의 역할을 온라인으로 옮겨와 더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도구를 제공하고 싶었다.
2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다른 버전의 앱을 만들었다. 2013년에는 수개월간 카카오톡과 연동 작업을 거쳐 ‘다보트 포 카카오’를 론칭했다. 당시 카카오는 모바일에서 쓰임새가 있을 법한 외부 앱들을 카카오톡과 연결해 모바일 생태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손만 뻗으면 성공이 잡힐 듯했다.
하지만 카카오톡의 거대한 사용자 규모도 다보트의 의미 있는 성장을 돕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카카오톡이 자체적인 투표 기능을 만들어 붙이면서 이승건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카카오 담당자는 전화로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회사가 크잖아요.”
화가 났지만, 별달리 항의하지는 못했다.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여겼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사실 카카오 때문에 포기한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바일 투표 서비스에 관심이 없었다. ‘누구나 매일 사회 현안에 의견을 내고 문제제기할 수 있는 세상’은 이승건 혼자만 원하는 세상이었다. 카카오가 자체적으로 만든 투표 기능조차 곧 사장됐다.
거듭된 실패를 냉정하게 회고해야 한다고 제안한 사람은 박광수였다고 이승건은 말했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직설적이고 날카로운 토스팀 문화의 8할은 박광수의 기여라고 입을 모은다. 박광수에게도 이 책을 쓰기 위한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고사했다. 남은 사진 속에서 짧은 머리를 삐죽이 세우고 있는 그는 대기업에 다니다 비바리퍼블리카에 합류해 iOS 개발을 맡았다. 바깥에서 패인을 찾으려 했던 이승건에게 박광수는 더이상 ‘변명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승건은 속이 상했지만 가만히 듣는 수밖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세상 사람 누구도 원하지 않는 제품을 1년 넘게 끌고 온 것이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실패의 단계를 하나씩 되짚어가며 이승건은 창업의 본질을 고민했다. 모범생답게 그는 책에서 답을 찾았다. 19세기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러스킨은 인간의 직업이 언제 숭고해지는가를 논했다. 군인은 국가를 수호할 때, 의사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킬 때, 법률가는 정의를 집행할 때 숭고하며 사회의 존경을 받는다. 그리고 상인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공급할 때 그렇다.
“상인은 자기가 파는 물건의 품질과 그것을 생산하는 수단을 철저히 이해하고, 물건을 완벽한 상태로 생산하거나 획득하여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가장 싼 가격으로 분배할 수 있도록 모든 지혜와 정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 존 러스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2
이승건이 창업한 이유와 목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만들고 싶은 제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승건은 치과의사 출신이라는 이력 때문에 창업가 관련 인터뷰에 종종 초대됐는데, 그럴 때마다 “아직 매출은 없다”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하지만 현대의 기업인은 과거의 상인이고, 상인이 존재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세상이 필요로 하는 풍요를 공급하는 데 있다. 창업한다는 것은 곧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수요를 잘 수집한 뒤 물건과 서비스를 만들어 돈 받고 파는 장사꾼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승건은 거꾸로 ‘내가 당신들의 삶을 이렇게 바꿔주겠다’며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연이은 실패의 이유가 비로소 명백해졌다. 동시에 이승건은 혼란에 빠졌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창업했는데, 알고 보니 하고 싶은 일을 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럼 뭐하러 이 일을 계속해야 하지?’
그때 이승건의 눈앞에 떠오른 것은 옆자리 동료의 아이 얼굴이었다.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의사 그만두고 인생의 몇 년을 보낸 건 스스로 책임질 일이죠. 하지만 내 옆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슨 죄예요. 그 가족들의 인생은? 내가 여기서 포기한다면 우리 함께 멋진 일을 이루어낼 거라고 믿고 온 사람들에게 정말 못된 짓을 하는 거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닥치고 제대로 하자.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의 자아는 지워버리고, 이제부터는 성공하는 거 찾을래. 어깨 힘 빼자.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걸 만들어주는 장사꾼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이렇게 모였고 슬프게 끝내고 싶지 않으니까.”
토스가 서비스를 만드는 제1원칙인 ‘고객중심주의’에 대한 집착은 이때의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고객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말은 그저 누구나 하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성공에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실패를 견디며 깊숙이 이해한 끝에 나온 것이었다. 이후 토스의 모든 제품 원칙과 조직문화의 근간에 승리에 대한 갈망이 자리잡았다.
고스트 프로토콜
“중고 컴퓨터랑 모니터 염가에 살 수 있는데 같이 갈래?”
친구 따라 찾아간 낯선 사무실에서는 한기가 새어나왔다. 40명 정도를 수용할 공간이 텅 비어 있었다.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망한 스타트업이었다. 이승건도 불과 몇 달 전에 유명한 벤처캐피털에서 이 회사에 투자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책상 위엔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가 늘어서 있었다. 아직 이름표도 떼지 않은 채였다. 입구에는 덩치 좋은 아저씨가 의자를 놓고 앉아 건들거렸다. 남은 중고 기기와 집기를 팔아넘기는 현장이었다. 친구는 20만 원에 내놓은 컴퓨터를 15만 원에 사네, 10만 원에 사네 하며 흥정을 벌였다. 얼마 전까지 수십 명의 에너지로 생동감 넘쳤을 사무실이 어수선하고 적막했다.
“공포가 저를 덮쳤어요. 이런 거구나, 망한다는 게. 정말 싸늘했어요. 투자받았다고 끝이 아니고, 고객으로부터 계속 선택받지 못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그 스타트업 대표가 외부 강연도 하고 기사도 많이 났지만, 고객이 사용하지 않는 서비스는 결국 문을 닫는구나. 그리고 망하면 이렇게 싸늘하구나. 그걸 뼈에 새겼어요.”
이승건은 중고 모니터를 하나 사들고 돌아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고 써 붙였다. ‘가시 돋친 나무 위에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먹는다’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 원수지간이었던 오와 월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사자성어다. 오나라의 왕 합려가 월나라 구천과 싸우다 죽자, 아들 부차는 가시 많은 땔나무 위에 누워 자며 복수심을 되새겼다. 마침내 회계산에서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인 구천을 생포한다. 이번엔 부차에 항복한 구천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쓸개를 곁에 두고 밥을 먹을 때마다 맛보며 치욕의 순간을 떠올렸다. 이 야야기의 최후 승자는 구천이다. 20여 년 뒤 구천은 군사를 일으켜 오나라 도읍을 차지했고, 부차는 죽었다.
“끝까지, 될 때까지 해내는 사람이 승자라는 의미로 적었어요. 그날 그 스타트업의 싸늘한 공기를 잊고 싶지 않았어요. 그 싸늘함이 언제든 내게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었어요. 살아남고 싶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 적당히 열심히, 어느 정도 하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그런 의지를 가다듬었죠.”
문제 발견
비바리퍼블리카는 울라블라와 다보트를 완전히 포기한 뒤 ‘고스트 프로토콜’을 발동했다. 팀원들이 서울 각지로 흩어져 새로운 아이템을 찾아보기로 한 것인데, 비밀 조직이 공중 분해된 채로 시작하는 영화 ‹미션 임파서블› 네 번째 시리즈 제목에서 이름을 따왔다.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통장은 바닥난 데다, 모여서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팀의 존재이유도, 만들어볼 아이템도 없었으니 팀을 해체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승건과 이태양, 박광수, 김민주 네 사람은 이성을 거스르고 함께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동안 팀워크와 신뢰가 단단해진 까닭이었다. 이제는 준비되었다는 직감이 이들을 붙들었다. ‘우리 팀이라면 언젠가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멋진 서비스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외주 개발 건을 따와서 팀의 수명을 가까스로 연장해나갔다. 일주일 중 한두 번은 사무실로 출근하고, 나머지 시간은 외부에서 자유롭게 보냈다. 이승건은 종종 인사동을 찾았다. 싸이월드 기획자가 인사동 카페에 앉아 3000만 명이 사용한 ‘미니룸’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다음부터였다. 쌈지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을 관찰하다 보면 정말 이들이 필요로 하는 아이템을 발견할 수 있을까. ‘다음 주에는 팀원들이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불안했지만, 그래도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넷이서 한 달 넘게 수집한 아이디어를 늘어놓으니 분야를 막론하고 100개쯤 됐다. 식당 메뉴 평점 매기는 서비스, 아마추어 가수들이 노래 부르는 영상을 찍어 올리는 사이트, 삶의 스토리를 담은 부동산 정보 등 대부분의 아이디어는 예선에서 탈락했다. 본선을 통과한 5개 아이디어 중 3가지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해 프로토타입까지 만들었다. 영수증을 사진 찍어 보관할 수 있는 앱, 문화센터와 백화점이 여는 온갖 강습 강좌를 확인하고 신청할 수 있는 포털 사이트, 기획안과 디자인 리소스를 제공하고 작업 진척도를 체크할 수 있는 업무용 툴 등이었는데, 초기 반응이 영 아니다 싶어서 바로 접었다.
몇 달 뒤 ‘토스’라고 이름 붙여 세상에 선보이게 될 아이디어도 이때 나왔다. 2013년 10월 21일 ‘송금과 결제를 frictionless하게(마찰 없이)’라는 문서가 작성되었다. 그러니까 이승건과 비바리퍼블리카는 처음부터 ‘핀테크 스타트업’이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보트도 울라블라도 금융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대중이 좋아할 것 같은 아이템을 주욱 나열해보니 간편송금과 결제도 있었을 뿐이다. 심지어 이 문서에는 가차 없이 ‘폐기 대상’이라는 라벨이 붙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금융활동이 송금과 결제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는데도 송금과 결제에서는 도무지 변혁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승건은 3명뿐인 팀원들에게 월급을 보낼 때마다 인터넷뱅킹 사이트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이태양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1만 원도 안 되는 사무실 집기를 사려고 결제하면서 괴로워했다. 액티브X를 포함한 각종 보안 프로그램 설치, 휴대폰 본인인증, 공인인증서 발급과 재발급 과정을 모두 거치고 나면 오류, 또 오류였다.
송금과 결제의 불편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대박’이라는 생각에는 팀원들도 동의했다. 미국에서도 이미 페이팔, 스퀘어캐시 등이 승승장구하고 있지 않은가. 페이스북에 ‘송금을 간편하게, 10초 만에 송금하는 서비스’라고 적어 올리고 무턱대고 광고를 돌렸다. 이틀 동안 1만 원 정도 태우자 광고는 6000명에게 노출됐고, 35명이 ‘좋아요’를 눌렀다. 24명은 광고를 클릭해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반응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였다.
이전에는 1년 넘게 2억 원을 써서 8명이 ‘울라블라는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이번에는 단 이틀 만에 1만 원으로 ‘사람들은 간편한 송금 서비스를 원한다’는 가설을 검증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중요한 건 가설 검증에 드는 시간과 비용을 엄청나게 줄였다는 사실이었다. 이승건은 “이쯤 되자 ‘이번에도 어차피 실패할 거니까’ 하고 더 빨리 실패할 수 있는 용기와 실행력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했다.
그럼에도 간편송금 서비스의 프로토타입조차 만들어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리가 감히 어떻게?’라는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할 정도면, 은행도 알고 있겠지.’
‘은행도 아닌 우리가 어떻게 다른 사람 돈을 보내고 받을 수 있겠어.’
‘은행 앱의 인터페이스만 편리하게 바뀌면 문제가 사라지잖아.’
은행이 아닌 제삼자가 A와 B 사이에서 송금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은, 돈을 보내려는 A의 통장에서 돈을 빼내 B의 통장으로 입금하는 것을 의미한다. 계좌번호만 안다면 B에게 돈을 보내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비바리퍼블리카가 A의 통장에서 출금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들 머릿속 한구석에 문제를 잠시 접어 넣어둔 채 시간이 흘렀다.
해결책 발견
어느덧 연말이 다가왔다. 강남역 사거리에 구세군이 나와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모았다. 길을 걷던 이승건은 달랑달랑하는 종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빨간색 모금함 위에 정기 기부 신청서가 쌓여 있었다. 기부단체에서는 한번 신청을 받으면 번번이 회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도 통장에서 일정 금액을 인출해간다. 이승건은 몇 년 전에 장애인치과병원에서 일하며 연을 맺은 푸르메재단에 후원을 이어가고 있었다. 워낙 쪼들리던 시절이어서 매달 3만 원씩 빠져나가는 통장을 보며 ‘해지해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기도 했다.
‘푸르메재단은 무슨 권한으로 내 통장에서 돈을 출금하는 거지?’
이승건의 머릿속을 스친 이 물음표가 시작이었다. 금융기관도 아닌 이 작은 비영리기관이 개인의 통장에 접근해서 매달 돈을 출금하는 원리만 알면 된다. 심지어 공인인증서도 액티브X도 필요 없다. 이승건의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팽팽 돌았다. 그 길로 선릉역 오피스텔로 돌아가 푸르메재단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 몇 년째 기부금을 내고 있는데요. 제 통장에서 어떻게 돈을 빼가시는 거예요?”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후원자님께서 후원을 신청하시면 자동이체가 진행되어서….”
“제가 은행에 자동이체를 신청한 건가요? 그런 기억은 없는데요.”
“아니요, 저희가 후원자님의 동의를 받아서 CMS 자동이체를 이용하고 있어요.”
CMS, ‘Cash Management Service’의 줄임말이다. 찾아보니 비영리단체 기부금뿐 아니라 우윳값이나 신문 대금을 낼 때도 이용하는 서비스였다. 사업자가 CMS를 이용하면 지정일에 고객의 계좌에서 자동 출금해 지정된 계좌로 수납하게 돼 있었다. 고객과 업체 모두 납부일이나 납부방법을 매번 신경쓰지 않아도 돼 편리했다. 금융결제원이 전국 은행과 연결된 CMS망을 가지고 있고, KSNet 등 몇몇 밴(VAN) 회사가 이 망을 이용해 서비스를 제공했다. 누구라도 회비만 내면 이용할 수 있었다. 팀원들이 모여 지체 없이 KSNet에 CMS를 신청하고 출금 기능을 간단히 구현해봤다. 이승건의 개인 계좌에서 비바리퍼블리카 법인 계좌로 순식간에 돈이 빠져나갔다.
드디어 해결책을 찾은 듯했다.
출금 기능이 동작하는 것을 확인한 뒤, 티저 홈페이지부터 만들었다. 앱 개발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 하도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앱 제작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나서 망하는 게 아까웠다.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고 난 다음에 서비스를 만들어도 늦지 않다는 게 3년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이승건이 배경사진을 고르고 문구를 써서 홈페이지를 완성했다. 누군가가 “의미 전달은 명확한데, 디자인에 다시는 손대지 말라”며 이승건을 놀렸다.
Toss 간편하고 안전한 계좌 이체 서비스
휴대폰 번호를 입력하시면 다운로드 링크를 문자로 보내드립니다.
전화번호는 문자 메시지를 전송하는 데에만 사용한 후 파기하며 저장하지 않습니다.
이때 서비스명을 ‘토스’로 정했다. 홈페이지를 만들려면 도메인 주소를 먼저 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태양이 여러 후보를 생각해냈다. 토스와 쌍을 이루는 ‘스파이크’는 ‘너의 계좌에 냅다 꽂아줄게’라는 뜻, ‘블링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송금이 완료된다는 뜻이었다. 금융 서비스는 신뢰가 중요하니 ‘트러스트’, 돈이 간다는 의미로 ‘머니, 고!’도 있었다.
“캐주얼하고 산뜻한 송금 서비스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스파이크나 트러스트는 너무 묵직했고요. 안정적이면서도 쉽다는 느낌을 살리는 게 ‘토스’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승건 님은 그다지 내켜 하지 않았어요. 그때도 승건 님 의견이 크게 중요한 분위기는 아니어서 팀원들이 투표로 결정했죠.”
토스팀은 홈페이지를 열고, 트위터에 링크를 올렸다. 4시간 만에 1000번 넘게 리트윗됐다. 이후 사흘간 서비스를 써보겠다며 전화번호를 입력한 사람은 2000명에 가까웠다. 3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숫자였다. 짜릿했다. ‘이게 성장이구나. 소비자들이 원하는 게 맞았구나. 드디어 찾았구나.’
빨리 제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탔다.
셧다운
“2014년 초, 겨울이었던 기억이 나요. 비바리퍼블리카라는 회사보다 토스 제품을 먼저 소개받았어요. 당시에는 클로즈드 베타 서비스였어요. 클로즈드(closed)라 하면 창업팀 주변 사람들과 일부 신청자들만 사용해보는 거예요.
커피숍에서 지인을 만났는데 토스를 한번 써보라고 하더라고요. 돈을 보낼 수 있는 앱이다. 공인인증서도 필요 없고, 전화번호만으로도 보낼 수 있다고. 그날이 수요일이었어요. 제 친구 번호를 입력해서 보내고 전화를 했죠. ‘만 원 보냈는데, 받았나?’ ‘아니? 무슨 만 원?’ 그래서 토스를 알려준 지인한테 뭐라 했어요. ‘그짓말 마라. 우리나라에서 이런 게 될 리가 있나? 물론 되면 좋겠지만.’
그러고 헤어졌는데, 저녁에 친구한테 전화가 온 거예요. ‘만 원 들어왔어’ 하더라고. 돈이 가긴 가네. 거짓말은 아닌갑다 싶어 내 통장을 확인해보니 내 돈은 그대로예요. 그런데 금요일이 되니까 만 원이 탁 빠져나갔어요. 수요일에 보낸 게 이틀 뒤에. 그걸 보고 이 회사를 좀 만나봐야겠다 싶더라고.”
2022년 초에 만난 양주영은 경상도 사투리 억양으로 쉼 없이 말을 이었다. 초창기 엠파스와 네이버를 다닌, IT 분야 경력이 긴 인물이었다. 이후 카이스트 선후배들과 ‘틱톡’이라는 메신저 서비스를 운영하다 대기업에 매각했을 즈음 토스를 알게 됐다.
이승건을 만나보니 키가 훤칠하고 말이 청산유수였다. 미스터리한 송금 프로세스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었다. 수요일에 돈을 보냈는데 정작 돈은 금요일에 빠져나가고, 수신인에게는 몇 시간이나 지나서 전달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제품을 완벽히 만들기 전에 사람들의 반응을 보려고 불완전한 상태로 테스트부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토스팀이 발견한 CMS망은 원래 ‘다달이’ 일정액을 송금하기 위한 자동이체 시스템으로 구축된 터라 사용자가 송금을 요청할 때마다 계좌에서 출금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리 주기가 짧아도 일주일에 한 번이었다. 그래서 비바리퍼블리카는 한 주 동안 송금 기록을 모았다가 금요일에 사용자 통장에서 출금했다. 송금은 8시간마다 이승건이 인터넷뱅킹으로 일일이 돈을 보내 해결하고 있었다. 인터넷뱅킹이 중단되면 근처 은행으로 냅다 뛰었다. 그러느라 시차가 발생한 거였다. 토스는 며칠쯤 기다려 출금해도 큰 상관이 없지만, 돈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몇 시간씩 입금이 지연되는 것은 꽤 중요한 문제다. 하루 송금 건수가 계속 늘어나면 이렇게 운영하는 것도 불가능할 터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사용자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주영은 실시간 입금만 가능하다면 오픈 베타 서비스를 시작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아마 안 되지 싶은데, 되기만 하면 굉장히 혁신적인 서비스다. 안 된다는 건 금융 쪽 규제라든지, 보안이라든지 하는 이슈가 앞으로 많을 것 같다. 그래도 송금이 실시간으로 되기만 하면 굉장히 편할 거거든요. 제가 오만 모임에서 총무하는 스타일이라 돈을 쉽게 보내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요. 그래서 혹시 이게 실패하더라도, 내가 이 팀에서 몇 년 정도 보내봐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승건 또한 벤처업계에서 성공을 경험해본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때는 개발자들만 있었기 때문에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해 몇 명을 소개받았는데, 주영 님은 저와 아주 다른 사람이어서 좋았어요.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을 배우고 싶었고요.”
양주영은 4월 1일부터 선릉역 근처 대우아이빌명문가라는 오피스텔 6층으로 출근했다. 초인종을 눌러 들어갔더니 이승건과 이태양, 박광수, 김민주가 좁고 꾀죄죄한 사무실을 부지런히 쓸고 닦고 있었다.
“그 마음들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때는 아무 티를 안 냈지만 감동을 했어. 이 사람들이랑 정말 열심히 해봐야겠다.”
8평 남짓한 사무실에 이제 다섯 사람이 등을 맞대고 앉았다.
스타트업 성공의 전형
입금 지연 문제는 한 달 만에 해결되었다. SC제일은행이 토스에 입금 이체 펌뱅킹(firm banking)망을 열어준 덕분이었다.
펌뱅킹은 금융기관과 기업의 서버를 전용 회선으로 연결해, 기업이 더 편리하게 자금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금융 서비스다. 일반 기업들은 펌뱅킹을 통해 구매, 생산, 판매, 재무 등 내부 지급 결제 프로세스를 자동화한다. 담당자가 은행을 방문하거나 인터넷뱅킹에 접속하지 않고도 기업 계좌에서 출금과 입금 이체가 이뤄진다. 전용선을 사용하기 때문에 거래 안정성이 높고 거래건수에도 제한이 없다. 거래 과정에 인증서나 OTP 등도 요구하지 않는다. 토스는 이 펌뱅킹을 이용해 송금 신청이 들어오면 즉시 수신인의 계좌로 입금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자동화했다.
SC제일은행으로서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준 것이었다. 물론 은행은 토스로부터 거래 건당 펌뱅킹 이용 수수료를 받지만,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빚만 있는 스타트업에 펌뱅킹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굳이 지지 않아도 될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양주영은 “토스는 감사한 분들로부터 천운에 가까운 도움을 적재적소에 받았다. 아직 아무것도 없는 토스팀을 이뻐라 한 분들이 계셨다”고 말했다. 이때부터 두 달간 토스 앱 화면 하단에 ‘contracted with SC’라는 문구가 박혔다.
2014년 3월 개시한 간편송금 오픈 베타 서비스는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크기 시작했다. 가입자가 매주 8%씩 늘었다. 송금 건수와 금액은 더 가파른 기울기를 보였다. 한 번만 쓰고 마는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토스를 이용한다는 의미였다. 이번 주에 토스를 쓴 사람이 그다음 주에 다시 이용하는 비중이 40%를 넘었다.
여력이 없어 홍보 활동을 벌이지 않았음에도 서비스는 소비자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며 성장했다. ‘쉽고 빠르다’, ‘한번 토스를 쓰면 은행 앱으로 못 돌아간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은행의 모바일 뱅킹이 첫 화면부터 송금까지 8~9단계를 거쳐야 하는 반면 토스 간편송금은 보내려는 액수를 입력하고, 받는 사람의 계좌번호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송금하기’ 버튼을 누르는 3단계면 완료였다. 가입 절차 또한 간단했다. 사용자들은 오류가 나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곧바로 회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