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마지막 책이자 절정의 책에 대해 믿을 만한 안내서를 고대하는 신자와 목사와 학생은 토머스 슈라이너의 이 요한계시록 책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신학』은 성경에서 가장 어렵다고 알려진 책의 본문과 만나도록 독자를 준비시킨다. 이 만남은 일반적으로 성경의 근본적인 중심 주제에 더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 백성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에게 기꺼이 들을 뿐 아니라, 특히 고난 속에서 언젠가 하나님의 참된 임재 속에서 살게 될 날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계속 견지하는 한편,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지속적인 신실하심에 대해 기쁨을 누린다. ‘톨레 레게’(Tolle lege). 들고 읽으라.
-에크하르트 슈나벨
고든콘웰 신학교의 신약학 마리아 프렌치 록펠러 석좌교수,
『선교사 바울』 ( Paul the Missionary ) 의 저자
교회는 항상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필요로 했으나 지금은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이가 요한계시록을 혼란스럽고 심지어는 겁먹게 하는 책으로 여긴다. 신약 성경을 주의 깊게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친 학자 토머스 슈라이너에게 들어가라. 『요한계시록 신학』에서 슈라이너는 특출한 능력을 발휘해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명확하고 흥미롭고 매력적인 방식으로 개관함으로써 독자에게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슈라이너의 설명은 균형적이고 사려 깊다. 이 중요한 성경책의 핵심 메시지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몇 가지 사소한 사실에 대해 저자에게 동조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누구든 저자가 각기 다른 견해를 따스하고 공정하게 설명하는 것, 특히 요한계시록의 중심 진리를 제시하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의 큰 장점이고, 이 책을 오늘날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될 안내서로 만든다.
-S. M. 보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명예 신약 교수
토머스 슈라이너는 요한계시록을 명료하고 균형적으로 개관했다. 작은 공로가 아니다! 슈라이너는 요한계시록을 다룰 때 최고의 현대 학문에 의존하지만, 지나친 학문적 논쟁으로 독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슈라이너는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자에게 자애롭고, 다루는 본문이 까다로울 때는 그런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만큼 정직하다. 요한계시록을 이해하기 바라는 자는 슈라이너의 설명에서 큰 유익을 얻을 것이다.
-숀 맥도너
고든콘웰 신학교의 신약 교수, 『밧모섬에서의 하나님』 ( YHWH at Patmos ) 의 저자
The Joy of Hearing: A Theology of the Book of Revelation
Copyright ⓒ 2021 by Thomas R. Schreiner
Published by Crossway
a publishing ministry of Good News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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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Korean ebook Edition Copyright ⓒ 2022 by Revival and Reformation Press, Seoul, Repub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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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신학
- 들음의 기쁨 -
토머스 슈라이너 지음 | 김귀탁 옮김
시리즈서문
저자 서문
약어표
서론 묵시로 계시된 진리
1장 땅에 거하는 자들의 귀머거리 상태
2장 성도는 듣고 주의하라
3장 하나님이 보좌에서 다스리신다는 선언
4장 사자와 어린양의 복음
5장 성령의 증언
6장 복에 대한 약속과 새 창조
7장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림
맺음말
AB | Anchor Bible |
ACT | Ancient Christian Texts |
BBR | Bulletin for Biblical Research |
BECNT | Baker Exegetic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
EvQ | Evangelical Quarterly |
HNTC | Harper’s New Testament Commentaries |
HSM | Harvard Semitic Monographs |
JBL |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
JETS | Journal of 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
JSNTSup | Journal for the Study of the New Testament Supplement Series |
LCL | Loeb Classical Library |
NCB New | Century Bible |
NICNT |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
NICOT |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
NIGTC | New International Greek Testament Commentary |
NovT | Novum Testamentum |
NSBT |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
OTL | Old Testament Library |
PCNT | Paideia Commentaries on the New Testament |
PTMS | Princeton Theological Monograph Series |
SBLDS | Society of Biblical Literature Dissertation Series |
SBT |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
Sib. Or. | Sibylline Oracles |
SOTBT | Studies in Old Testament Biblical Theology |
VCSup | Supplements to Vigiliae Christianae |
WBC | Word Biblical Commentary |
WTJ |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
WUNT | Wissenschaftliche Untersuchungen zum Neuen Testament |
신약 성경 각 권의 큰 관념을 다룬 책은 매우 드물다. 독자는 성경 사전, 일부 주석, 신약 신학 책에서 간략히 이런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겠으나, 이런 책은 다른 정보로 가득 차 있고 신약 성경 각 책 자체의 신학을 밝히는 일에 전념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신학의 다양한 주제에 집중하는 전문 작업은 종종 좁은 초점을 갖고 있고, 이를테면 마태복음이나 히브리서의 가르침의 어떤 국면을 그 책 나머지 부분의 신학과 분리시켜 다룬다.
신약 성경신학 시리즈는 성경 연구자에게 신약 성경 각 책이나 책들의 특수한 가르침을 적당히 책으로 읽을 수 있는 정도의 분량으로 다룬 작품을 제공함으로써 이 간격을 메우려 애쓴다. 이 시리즈는 성경신학의 관점에 따라 본문에 접근한다. 이 시리즈는 본문의 역사적 및 문학적 측면에 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만, 주요 초점은 성경의 포괄적 이야기와 그리스도 중심 초점을 시야에서 놓지 않고 하나님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신약 성경 각 책 자체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것에 있다. 이런 성경신학은 성경적인 강해 설교에 근본적으로 중요하고, 주경신학, 조직신학, 기독교 윤리에 대한 정보도 제공한다.
20권의 이 시리즈는 복음주의 관점에 따라 신학 주제들을 포괄적이고 학문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고찰한다. 이 시리즈는 신학생, 설교자, 관심 있는 평신도에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목사는 강해 설교 시리즈를 준비할 때 유익한 주석을 건전하게 제공하는 책은 찾을 수 있겠으나, 신약 성경 각 책의 종합적 가르침을 충족시켜 줄 만한 책은 거의 찾지 못할 것이다. 이 시리즈는 설교와 성경 공부 준비에 유용할 뿐 아니라, 대학과 신학교에서 주석 수업 교재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리즈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헌신을 끌어내는 데 공헌하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토머스 슈라이너의 요한계시록 작품 『요한계시록 신학』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난해한 책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절박한 임무를 기꺼이 감당한다. 요한계시록은 특히 역사적 배경을 판단하고 묵시적 심상을 파악하는 데 있어 굉장히 큰 해석적 도전을 던져 준다. 슈라이너의 이 책은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성경 예언의 절정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도록 독자를 이끄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잔혹한 폭력과 냉혹한 충돌이 난무하는 우리 시대에 요한계시록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한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실상을 드러내고 초월적 실재를 흘끗 들여다본다. 슈라이너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을 듣는 기쁨은 예수의 부르심을 주의하고, 성령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이 자신의 보좌에서 다스리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으로 구성된다.
토머스 슈라이너, 브라이언 로스너
2020년 8월에 무어 대학 강좌 초청을 받았을 때, 요한계시록의 신학에 대한 이 작은 책을 저술하기로 결심했다. 지금은 베이커 주석의 요한계시록 주석을 쓰고 있다. 또 크로스웨이 출판사 ( 2018년 ) 가 출간한 ESV 강해 주석의 짧은 요한계시록 주석도 썼다. 2019년에 고든콘웰 신학교에서 열린 복음주의 신학회의 북동부 지역 모임에서 본서의 내용 일부를 시험삼아 발표했다. 그때 회원들에게 받은 피드백과 그 기간에 자기 집에 묵게 해 준 에크하르트와 바바라 슈나벨 부부가 보여 준 관대한 후의에 감사를 드린다. 또한 2019년 8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온타리오에 있는 게이트웨이 신학교에서 이 강의를 하게 되었고, 거기서도 참석자와의 교류와 반응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특별히 게이트웨이 신학교에 나를 초대해 준 존 테일러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그를 더 잘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무어 대학에서는 결국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비드-19의 방해를 받았고, 따라서 내 여행도 취소되었다. 나는 이전에 무어 대학에 있었고, 그들과 다시 함께 할 수 없게 된 사실에 실망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우리는 지금 죄 많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럼에도 하나님이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세계적인 파괴력에 대해 생각하면 무어 대학에서 강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실망은 사소한 아쉬움에 불과하다. 어쨌든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경이로운 환상, 사자와 어린양로서의 예수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오는 확신을 갖고 요한계시록의 신학을 숙고한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일까! 우리 대적은 무자비하고 증오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보다 훨씬 크시다. 우리는 인내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타협을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이 악에 굴복하는 자를 심판하고, 가장 큰 기쁨을 갖고 자기를 계속 신뢰하는 자에게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 계 22:4 ). 내가 지도하는 박사 과정의 학생 가운데 하나로, 내 대신 참고 자료를 검토하고 내가 요청한 자료를 보내 준 코이 스틸 4세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작업할 때 시간을 많이 절약했다! 또한 크로스웨이 출판사의 저스틴 테일러와 데인 오틀런드에게도 매우 감사하다. 나는 그들이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으나 이 책을 출판하고 싶어 했고, 그것이 내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신약 성경 전체에 대해 비슷한 책을 시리즈로 출판할 것을 제안했고, 나는 브라이언 로스너와 함께 이 시리즈의 편집자로 참여하는 영예를 얻었다. 마지막으로 세련된 편집과 유익한 제안으로 도움을 준 데이비드 바싱거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이로 말미암아 이 책은 더 좋은 책이 되었다.
2020년 4월 1일
토머스 슈라이너
요한계시록은 독자를 매료시키면서 동시에 쫓아낸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상상을 사로잡는 묵시적 환상으로 기이한 새 세상을 소개하므로 독자를 매료시킨다. 우리는 모두 ‘삶의 어떤 차원은 우리를 넘어선다는 것 곧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비밀들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도록 초대함으로써 이런 세상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세상이 어떻게 끝날지 궁금하게 여긴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계시하고, 장차 임할 새 세상의 일원이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말해 준다. 동시에 요한계시록은 내용 전체의 의미가 의아하기 때문에,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절망하기 때문에 우리를 쫓아낸다. 마르틴 루터는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를 분명히 가르치거나 계시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1)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G. K. 체스터턴은 다음과 같이 유머러스하게 예증한다. “복음 전도자 요한은 자신의 환상에서 희한한 괴물을 많이 보았지만, 자신의 책의 주석자들만큼 사나운 괴물은 보지 못했다.”2) 아마 우리도 요한계시록을 사변적으로 이상하게 해석하면 요한계시록에서 쫓겨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일부 내용은 미래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일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세부적인 지도를 제공한다.
여기서 내 주장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 사이에 큰 충돌이 있고, 기독교 신앙은 1세기 당시와 똑같이 공격을 받고 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통해 아주 악한 시대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것,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저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것, 선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득세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악이 횡행하고 기독교 신앙이 공격을 받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악이 최종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희망과 확신을 필요로 하고, 요한계시록은 새 세상이 오고 있다는 것, 새 창조가 임하리라는 것,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은 공정하고 거룩하고 의로우시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역하는 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의 중심 또는 역사의 토대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악이 패배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일 때문이다. 악에 대한 승리는 심판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유대 지파의 사자의 고난을 통해 곧 죽임 당하신 어린양을 통해 이루어졌다. 신자는 바벨론에서, 다시 말해 세상 정부가 굶주린 야수같이 교회를 찢어 놓는 세계에서 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요한은 우리는 그리스도 가까이에 있어야 하고, 악과 타협해서는 안 되며, 끝까지 견디고, 최후의 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 표가 아니고 예수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요한은 우리에게 신실하고 열매 맺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결국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므로 우리는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된다.
요한계시록의 신학을 탐구하기 전에 요한계시록의 역사적 배경과 요한계시록에서 확인하는 문학 장르에 대해 간략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옛날 책 ( 현대의 책도 마찬가지다! ) 을 읽을 때 책의 저술에 수반된 상황을 아는 것이 유익하고, 그래야 책을 그 역사적 배경 속에 둘 수 있다. 아울러 작품의 장르를 파악할 때도 도움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이야기, 시, 서신 또는 다른 어떤 장르인가? 시나 속담을 서신처럼 읽으면 내용을 잘못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를 살펴보기 전에 상황을 설명할 필요가 있고, 그런 다음 이후 장들에서 요한계시록의 신학을 설명해야 한다.
역사적 배경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모호한 역사적 배경에 부딪히게 된다.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 자체 속에는, 우리가 네로 ( 재위 AD 54-68년 ) 나 도미티아누스 ( 재위 AD 81-96년 ) 나 트라야누스 ( 재위 AD 98-117년 ) 나 또는 다른 어떤 황제를 생각하든 간에, 특정 황제 아래에서의 삶을 명확하게 암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지 않다. 이런 모호한 상황은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어느 특정 시기나 특정 황제의 활동에 엄밀히 결부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분명히 요한계시록은 한 특정 시기에 기록되어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럴지라도 특정 연대를 단정할 만한 명확한 증거는 없다. 그렇다고 특정 연대를 단정하는 시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후기 연대설을 곧 찬성할 것이다. 그리고 후기 연대를 적용해 여기저기서 제공된 해석들을 기꺼이 확인해 볼 것이다. 여기서 요점은 특정 연대를 요구하는 해석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 상황이 불명확한 경우에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해석학적 결론이다. 특정 역사적 배경을 요구하는 해석은 어쨌든 검증이 불가능한 요한계시록을 이해할 때 억지를 강요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요한계시록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특수한 역사적 재구성에 끼워 맞추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연대를 선택한다면 도미티아누스 ( 재위 AD 81-96년 ) 통치 기간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이레네오는 2세기 말에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해 어떤 적극적 진술을 제시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적그리스도의 이름을 명확히 제시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면 역시 그 계시를 본 그가 말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이 아니라 거의 우리 세대인 도미티아누스의 통치가 끝날 즈음에 보였다.3)
이레네오의 말의 의미는 논란이 있다. 이레네오의 말은 도미티아누스 시대를 명백히 지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은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였을 때,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썼음을 암시한다.4) 요한계시록이 AD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되면 “보였다”는 동사의 주어가 “그” ( 즉 요한 ) 였을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면 이레네오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때를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인 때를 기록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요한을 동사의 주어로 보는 것은 너무 어색하고,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계시가 주어라면 구문이 더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여기서 인용된 번역은 “그것”을 주어로 보충하면 이 해석을 밑받침한다. 따라서 최초의 외적 증거는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에 기록되었다는 연대설을 지지한다.
어떤 경우에는 전승 자체가 명확하지 않기는 해도 초기 전승에서 우리가 얻어 내는 나머지 증거는 후기 연대를 지지하는 것 같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5) 여기서 말하는 폭군은 아마 네로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클레멘스는 초기 연대를 지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머지 전승은 우리에게 다른 방향을 지시하므로, 클레멘스가 염두에 둔 폭군이 도미티아누스인 것도 가능해 보인다. 이런 결론을 지지하며 유세비우스는 당시의 황제를 도미티아누스로 간주하고,6) 이것은 이레네오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과 일치한다. 빅토리누스도 요한계시록을 도미티아누스 통치 기간까지 추적한다.
요한은 이 계시를 보았을 때 도미티아누스 황제에게 광산으로 유배당해 밧모섬에 갇혀 있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쓴 것 같다. 이미 노인이 된 요한은 자신의 고난이 끝나면 지복 속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가 죽임을 당하자 그의 모든 계획은 무효가 되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광산에서 풀려나 이후로 주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널리 전했다.7)
히에로니무스 8) 전승은 요한계시록의 후기 연대설을 만장일치로 단정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물론 이레네오가 잘못 생각했고, 이후 자료는 이레네오에게 의존했으며, 요한계시록이 언제 기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직접적 지식이 없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하다.9) 어쨌든 기독교 역사 초기 저술가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고, 어떤 경우에 그들은 분명히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의 구체적인 기록 연대를 제시할 수 없다는 문제에 다시 직면한다. 전승이 잘못이라면 요한계시록은 AD 60년과 100년 사이 어느 한 시점에 기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에 대해 이레네오가 정확하다는 판단에 마음이 쏠린다. 어쨌든 이레네오는 폴리카르포스를 알았고, 폴리카르포스는 요한을 알았으며, 따라서 전승은 명확한 계승 노선을 갖고 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확실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요약하면 내적 증거는 요한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고, 외적 증거는 믿을 만하다고 가정하면,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였을 때 요한계시록이 기록되었음을 암시한다.
장르
학자들은 요한계시록의 장르에 대해 종종 논쟁을 벌였고, 묵시적 장르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동시에 학자들은 요한계시록 2-3장의 일곱 편의 편지와 요한계시록의 예언으로서의 성격도 주목했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서신, 예언, 묵시 장르가 결합되어 있다. 보컴은 올바르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상당한 주의와 기교로 작성된 문학 작품이다. 우리는 요한이 특별한 환상을 경험한 것을 추호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환상 경험을 재생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계시의 의미를 전달할 의도를 갖고 긴 반성 과정을 거쳐 철저한 문학적 창작을 통해 저술함으로써 자신의 환상 경험을 변형시켰다.10)
요한계시록의 서신으로서의 성격은 요한이 독자의 상황과 환경을 제시하는 것으로 암시되고,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일곱 교회의 역사적 위치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일곱 편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요한계시록은 역사의 끝에 대한 일반 논문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1세기 당시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을 위해 기록된 것임을 상기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의 서신 장르는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소위 내가 “신문 종말론” ( newspaper eschatology ) 으로 부르는 것에 몰두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요한계시록은 특수한 사회적 지위에 있던 독자를 위해 기록되었고, 추측하건대 그들은 최소한 대체로, 요한계시록이 자기들을 위해 기록된 것으로 이해했다. 이런 사실이 담고 있는 해석학적 의미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이런 사실이 현대 독자가 원 독자보다 요한계시록을 더 잘 해석할 것이라는 대중적 관념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적 해석을 제안하는 자는 신문 종말론을 따르고 현재 사건들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을 읽는다. 사실 이런 일에 주의를 기울이는 자는 다 이런 해석학적 접근법은 사건의 발생에 따라 해석도 바뀌므로 자의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은, 현재 사건들에 따라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접근법을 취했다 해도, 요한계시록에 대한 해석이 시대에 따라 변하므로 거의 명확하지 못하다. 요한계시록을 역사적 배경 속에 두고 최초 독자가 살았던 상황과 세계에 비추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이 해석학적으로 더 지혜롭다.
아울러 일곱 교회에 대한 언급도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고, 이것은 요한계시록이 모든 교회를 위해서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11)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의 메시지는 역사 대대로 모든 교회에 적용된다. 그러나 독자로서 우리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역사적 상황에 올바르게 초점을 맞추지만 동시에 요한계시록이 시대 전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해 포괄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요한계시록 첫 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은 “예언”이라는 말을 듣는다 ( 계 1:3 ). 요한계시록은 예언을 빈번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 22:7, 10, 18, 19; 참고. 22:6, 9 ). 따라서 요한계시록이 예언이라는 주장은 요한계시록 첫 부분과 끝 부분에 집중되어 있고, 이 인클루지오 ( 양괄 대칭 구조 ) 는 독자에게 요한계시록의 예언적 성격이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은 교회에서 함께 모였을 때 큰 소리로 읽히고 들려져야 했다 ( 1:3 ). 요한계시록을 구두로 낭독하는 것은 교회 예배의 한 구성 요소였고, 이것은 이 예언의 말씀이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간주되었음을 암시한다. 확실히 요한은 자신이 기록한 것의 신적 권위를 가능한 한 가장 강력한 말로 강조한다. 말하자면 요한은 누구든지 계시되는 것에 더하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겪을 것이고, 누구든지 이 계시에서 제하면 생명나무에 참여하지 못하고 거룩한 성에서 배제될 것이라고 말한다 ( 22:18-19 ). 여기서 요한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주어진 명령을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말했던 것을 반영한다. 이 반영은 요한이 자신의 말이 토라의 말만큼 권위가 있다고 믿었음을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에 담긴 예언의 내용은 책 전체를 읽음으로써 식별되지만, 요한은 우리에게 예언으로서 요한계시록은 “곧 일어나야 할 것을 드러낸다” 12)
요한계시록 어디에서도 요한은 자신이 묵시 장르의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의 첫 단어가 ‘아포칼륍시스’ ( “계시/묵시” ) 이고, 이것은 아마 우리에게 요한계시록의 성격에 대해 뭔가 말해 주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성격은 사실상 보편적으로 누구나 인정한다. 아델라 야브로 콜린스 ( Adela Yarbro Collins ) 는 존 콜린스 ( John Collins ), 데이비드 헬홈 ( David Hellholm ), 데이비드 오니 ( David Aune ) 의 정의를 참조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안했다.
묵시는 전형적인 어떤 특징을 갖고 있지만 여기서는 실용적이고 실천적 요소가 특별히 강조되어야 한다.14) 데이비드 오니는 묵시적 세계관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묵시적 세계관은 타락한 기존 우주적 질서를 파괴하고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우주를 회복하거나 재창조함으로써, 하나님 백성은 구원하고 하나님 백성의 원수는 처벌하는 결정적 방식으로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긴급히 개입하실 것을 바라는 기대에 중점을 둔다.”15) 보컴은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다른 묵시 작품에서 보는 것보다 시각적 심상의 분량이 많고, 또 다른 묵시 작품에서 매우 흔하게 보는 계시의 전달자와 계시를 받는 자 사이의 긴 대화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묵시 작품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16) 독자로서 우리는 이런 대화가 요한계시록에 나오기를 바랄 수 있다. 추측하건대 이런 대화가 나오면 우리를 괴롭히는 일부 해석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묵시가 성경에서 요한계시록으로 국한되지 않음을 주목해야 한다. 구약 성경 가운데 이사야서, 에스겔서, 스가랴서에도 묵시가 있음을 확인한다. 요한은 마태복음 24-25장 ( 참고. 막 13장; 눅 21장 ) 에 나오는 예수의 종말론적 강론도 알고 있었다. 또 제2성전 시대 문헌에도 묵시가 있다 ( 예. 에녹1서, 에스라4서, 바룩2서 ).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독자는, 그들이 이런 다른 문헌들에 익숙했다고 추정하면, 요한계시록을 완전히 생소하거나 근본적으로 새로운 저술 방식을 가진 책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우리가 역사의 끝과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악의 세력에 대한 주님의 승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이야기 속에 전해지는 계시를 담고 있다. 야브로 콜린스의 말을 빌리면, “타계적 존재”, 즉 천사가 “인간 수용자”, 즉 요한에게 계시를 전달했다. 우리는 초월적 실재 곧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하늘의 관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최종 결과를 예견한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는 일차원적이다. 요한은 분명히 자신의 환상에서 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석하고, 그럼으로써 신자가 악의 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과 소망으로 견인하도록 하늘의 관점에 따라 선악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 준다. 브라이언 탭은 묵시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17) 여기서 요한계시록에서 독자는 세상에서 그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 마지막 날까지 견디도록 권고받는다는 말을 덧붙이겠다.
묵시는 전형적인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이와 관련해 도움이 되는 자료가 레온 모리스 18) 아래 목록은 몇 가지 묵시의 특징을 제시한다.
역사적 이원론
환상
익명 사용(요한계시록은 예외)
상징
수비학
천사론
마귀론
재앙의 예고
요한계시록이 이 목록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보면 요한계시록과 아주 잘 맞는다는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탄이 강력한 능력을 동등하게 가졌다는 존재론적 이원론을 갖고 있지 않다. 대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우주적 충돌이 있다는 역사적 이원론을 갖고 있다. 우리는 또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이 요한이 받은 환상에서 연원하고, 이것이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것도 인정한다. 에녹1서나 에스라4서와 같은 많은 묵시 문헌이 분명히 익명을 사용하지만, 요한계시록은 사실상 모든 학자가 인정하는 것처럼 요한을 저자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완전히 예외다. 학자들은 요한의 신원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요한계시록이 익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묵시 문헌의 예외로 나타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한다.
요한계시록이 상징을 사용하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고, 모든 사례를 열거하더라도 지쳐서는 안 된다. 번 포이트레스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다음 네 가지 차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19) 우리의 목적상 다음과 같이 범주를 둘로 제한해 고찰할 수 있겠다. ‘기록된 환상들과 이 환상들의 지시 대상 및 의미.’ 예를 들어 보자. 요한은 예수를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인자로 보고 ( 계 1:16 ), 여기서 검은 예수의 말씀의 능력과 효력을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백성의 원수들도 문자적인 짐승이 아니다 ( 계 13장 ). 오히려 짐승에 대한 언급은 로마와 제국 제사장을 통해 일어난 황폐화와 학정을 표상한다. 사탄도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진 문자적인 용이 아니고 ( 12:3 ), 용에 대한 신화적 언어는 마귀가 끔찍하게 강하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같은 맥락을 따라 “하나님의 일곱 영”이 있고 ( 3:1 ), 이 말은 거의 확실히 성령을 가리키며 7이라는 숫자는 성령의 완전하심과 충분하심을 상징한다 ( 1:4 ).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나온 십사만 사천 ( 144,000 ) 이라는 숫자도 비유적으로 하나님 백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숫자가 12×12×1,000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장차 임할 새 예루살렘의 성곽은 백사십사 ( 144 ) 규빗이고, 이것 역시 12×12로 구성되어 하나님 백성의 안전함과 무사함을 상징한다 ( 21:17 ). 또한 새 예루살렘이 만 이천 ( 12,000 ) 스다디온인 것도 분명히 비유적 표현이고, 그것은 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전체 지역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 21:16 ).
천사도 요한계시록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는다. 우리는 이미 천사가 요한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한 것을 확인했다 ( 1:1; 22:8, 9 ). 아울러 마귀와 귀신들도 요한계시록에서 종종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화 ( 禍 ) 에 대한 예고가 인 심판 ( 6:1–17; 8:1–5 ), 나팔 심판 ( 8:6–9:21; 11:15–19 ), 대접 심판 ( 16:1–21 ) 에서 확인된다. 땅에 내려질 심판은 이런 본문들로 국한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으로 간주되지만 또한 묵시이기도 하므로 조지 래드는 얼마 전에, 그의 논문의 초점이 요한계시록에 있지 않았지만, 예언과 묵시 사이에 어느 하나를 결정할 필요가 없다고 올바르게 주장했다.20) 요한계시록은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서신이자 예언이자 묵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성격에 대해 설명하겠다. 요한은 왜 묵시 장르를 사용했을까? 묵시는 상징적 묘사와 무시무시한 심상으로 상상에 의존한다고 종종 지적되었다. 인상적인 비유와 묘사는 새로운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볼 때처럼 독자의 지성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요한은 독자에게 새로운 차원 곧 시공간 우주 속에 있는 자는 다가갈 수 없는 실재의 차원을 소개한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하늘과 땅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독자에게 선언하는 그의 묵시적 ‘메타 서사’ 21)
다르게 말하면 요한은 사건들의 참된 본질을 계시하고 있다. 인간의 눈에 로마 제국은 초강대국이고, 요한은 땅의 거친 현실을 문제삼지 않고 가장 중요한 실재를 계시한다. 우리는 로마와 로마의 세계 통치에 대해 경험적으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요한은 신적 관점을 보여 주고, 따라서 우리에게 로마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파괴적이고 우상 숭배적인 짐승이고, 로마의 권력은 사탄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계 13:1-18 ). 마찬가지로 로마의 도시도 부유하고 화려하고 활기차지만 하늘의 관점으로 현실을 바라볼 때, 묵시적 현실을 바라볼 때, 로마는 실제로 음녀이고, 로마와 동침하는 모든 자가 심판받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묵시 장르는 독자에게 일어날 일의 참된 실상, 천상적이고 초월적인 관점에 문을 열어 놓는다.
결론
나는 요한계시록이 도미티아누스가 권좌에 있고 소아시아 지역 교회들이 그들이 살던 사회에서 로마 제국의 박해를 겪고 있던 때인 1세기 말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했다. 요한계시록은 여러 장르가 결합되어 있고, 따라서 서신의 특징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예언적 묵시의 성격도 갖고 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상징을 충분히 보기 때문에 묵시 장르가 특히 중요하다. 묵시 장르를 무시하면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잘못 파악하기 쉽다. 요한계시록의 묵시적 성격은 우리에게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우주적 충돌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신자는 하나님 편에 서고 그들의 운명을 악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신실한 자에게는 그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