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김연민
초등 교사. 어릴 적 학교와 교사를 미워했던 어린이.
교사가 되어 많은 어린이들을 성장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보니 인간적으로 성장하고 배움을 얻게 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이에게 받은 성장과 감정을 교사들이 함께 공유하길 바라며 ‘에듀콜라’와 ‘학교한줄’을 만들었다. 현재 두 공간에서 많은 교사와 학생, 보호자들이 공감하고 위로를 주고 받으며 더 큰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공저로 《착한공부법》과 《초등 학부모 상담》이 있고, 저서로는 《민주적 학급살이》가 있다.
교육미디어 에듀콜라 educolla.kr
인스타그램 학교한줄 @1jul_teacher
일러두기 | 오늘날의 어법과 맞춤법에 따르되, 대화체는 어린이들의 입말을 최대한 살렸습니다. |
학교한줄 독자 사연 우리를 자라게 할 또 다른 이야기 인스타그램 학교한줄(@1jul_teacher)에서 ‘나를 감동시키고, 자라게 한 학생들과의 일화’를 모집했습니다. 초등 교사뿐만 아니라 중고등 교사와 임용을 준비하는 수험생이 다양한 사연들을 보내주었습니다. 그중 11편을 선정해 본문에 수록했습니다. * 독자들의 실명과 아이디는 허락을 구해 기재했습니다. |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숲을 이루고 뿌리가 엮이길 바라며
나는 교사란 ‘학생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그래도 학생들과 있는 게 즐겁다’라는 믿음 사이의 계단을 하루 종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생전 처음 보는 학생들에게 거리낌 없이 “사랑한다”고 뻥을 쳐버린다. 앞으로 내 편이 되어달라는 무언의 구조 요청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최선을 다해 비록 뻥이지만 사랑의 공간에 삶을 하루씩 더해간다. 그렇게 채워진 공간은 또 1년이 되면 말끔히 비워내야 한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해줄 만큼 가득했던 체력과 열정이 점점 줄어가는 것에 회의가 들면서 1년마다 반복되는 삶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너 이렇게 30년간 더 할 수 있겠어?’
어느 날부터인가 ‘나에게 교사라는 직업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하고 텅 빈 교실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연극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고, 내가 더 이상 뻥도 칠 수 없을 만큼 지쳤을 때 내 밑바닥이 드러나기라도 한다면, 아이들은 나를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고 기억할지 걱정되었다. 남은 학교생활을 이어가려면 열정과 체력이 아닌 인간 자체로서의 성장이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저 하루를 때우고 마는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될 것 같았다. 그건 정말 싫었다.
나는 학교를 군도(群島)라고 생각한다. 학교라는 공동체는 얼핏 보면 한 덩어리 같지만,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 닫으면 완벽한 섬이 된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섬에 교사와 학생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하는 교사가 느끼는 외로움과 공포는 무인도에 고립된 사람이 겪는 것과 같다.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은 교실을 성장과 변화가 멈춘 갈라파고스제도로 만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흩어진 섬과 섬을 연결하면 된다. 교사들끼리 서로를 연결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교실 속 아픔과 외로움을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눈앞에 우리를 충분히 보듬고 격려해줄 눈망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가르치는 건 교사, 배우는 건 학생’이라는 이분법의 칸막이를 걷어내야 한다.
수업 시간,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진정한 성장이란 나 혼자 잘 크는 것이 아니다. 혼자 우뚝 솟은 나무는 부러지기 쉽다. 같이 숲을 이루고 뿌리가 엮일 때 단단하게 성장할 수 있다”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자신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고군분투한다.
‘나만 혼자인 줄, 나만 힘든 줄, 그래서 한 줄.’
SNS ‘학교한줄’은 이런 마음에서 만들었다. 교사는 교실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학생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다는 생각은 교직 경력이 쌓일수록 확신에 가까워졌다. 교사들은 살면서 쉽게 받지 못할 격려와 위로를 학생들로부터 듬뿍 받고 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면 의도 없는 순수한 웃음을 지어주고 ‘엄지’를 사정없이 내준다. 교실에서 행복하다며, 보호자와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나에게는 구겨진 손 편지를 건네기도 한다. 가끔은 어이없는 사고를 치며 웃지 못할 사건을 만들지만, 끝끝내 대견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치 아름다운 작품을 꽃피워낸 예술가가 된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교사로서 하루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성장의 선순환이다.
‘학교한줄’은 이러한 선순환을 증명하는 곳이기도 하다. 교사를 위한 공감과 격려의 연결 공간이지만, 많은 학생과 보호자가 이곳에서 교사와 학교를 이해하고 공감해주며 위로한다. 그리고 교사들은 다시 감동과 힘을 얻는다. 이 선순환을 경험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확신했다.
어린이와 가장 가까운 교사와 보호자는 그들의 성장을 돕는 중요한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어린이로부터 가장 큰 성장의 힘을 얻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이 어느 초등 교사의 교직 고군분투기보다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어린이들에게 한 번 더 눈길을 주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교사의 고통 혹은 육아의 고달픔으로 가려진 어린이와의 경험이 성장의 발판이었음을 깨닫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터무니없이 부족했던 신규 교사 시절의 나를 ‘견뎌준’ 첫 제자들과 여전히 최고라고 치켜세우며 격려해주는 지금 우리 반 학생들, 매일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고군분투하고 있는 교사들과 짝꿍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나는 정말 말썽꾸러기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모든 생활통지표에 ‘주의가 산만하며’ ‘친구와 자주 다툼’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교사들이 공식 문서인 생활기록부에 이렇게 썼다는 건 구제불능이라는 뜻이다. 두꺼운 도화지를 말아 친구들 머리를 실로폰(정확한 표기는 글로켄슈필이다)이라며 때리면서 소리 지르고 뛰어다니는 것은 기본, 여학생에게 고무줄을 쏴서 코피도 터뜨렸다. 서예 연습을 한다며 앞자리 흰옷 입은 친구의 등에 붓으로 낙서를 하기도 했다. 어떨 때는 심술이 나서, 또 어떨 때는 아무 이유 없이 심심해서 그렇게 했다. 수업이 재미없다고 느껴지면 그 순간 누군가를 놀리거나 괴롭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담임교사도 터져버렸다.
“네가 전학 갔으면 좋겠어!”
내가 잘못한 걸 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학급 친구들에게 참 미안하다. 초등학교 시절,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지만 교사의 이 한마디는 여덟 살이던 내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 마음에 콱 박혀 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정말로 전학을 갔다. 한창 받아쓰기와 구구단을 공부하느라 바쁠 2~3학년 때 우리 가족에게 큰 사건이 일어났다. 동생이 사고를 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출장으로 집을 자주 비웠고, 어머니는 동생을 간호하기 위해 대부분 병원에 머물렀다.
“집에 가기 싫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실컷 놀다 하나둘 저녁을 먹으러 떠나면 가장 마지막에 남는 아이는 나였다. 집 문을 여는 게 두려웠다. 현관에 들어서면 밀려오는 어둑함이 싫었다. 빈집의 적막함이 싫었다. 그래서 나는 더 늦게까지 노는 아이들 틈에 끼고 싶었다. 대부분 중학생이나 초등학교 5~6학년 형들이었다. 몸집이 작았던 나는 아파트 부녀회에서 지하실에 모아놓은 공병을 내다파는 데 이용되었다. 지하실 작은 창문으로 들어가 잠긴 문을 열어주면 형들이 병을 모아 슈퍼에 팔았다. 나중에는 나쁜 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상관없었다. 유일하게 나를 필요로 하고, 인정해주는 곳이었다.
머리가 커지자 오락실이 나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친구가 별로 없었기에 오락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나름 실력도 좋았다. 오락을 하는 동안 내 주위에 사람이 몰려들었는데, 그때 자부심을 느꼈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셔터가 반쯤 열린 오락실에 들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처음에는 내보내던 주인도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나를 보며 그러려니 했다. 당연히 지각을 밥 먹듯 했고, 심지어 11시가 다 되어 교실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담임은 꿀밤을 몇 대 때리고는 ‘벽코’를 하라고 했다. 교실 뒤편 구석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벽에 코를 박았다. 무릎을 꿇고 코를 박으려니 코, 허리, 무릎이 너무 아팠다. “이제 그만하고 자리로 돌아가”라는 소리를 너무나 듣고 싶은데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을 때 깨달았다.
‘내가 벌받고 있다는 걸 까먹었구나!’
화가 났다. 내가 왜 오락실에 가는지는 궁금하지 않나? 왜 나만 혼나야 되지? 나의 상황도 궁금해하지 않고 잘못만 지적하는 담임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후 다행히 동생이 완치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부모님은 방치되었던 나를 돌보았다.
시간이 흘러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꿈이나 자아실현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IMF 시기를 막 지났을 때였고, 가정 형편을 생각했을 때 ‘공무원’이 내가 취할 가장 훌륭한 선택지였기에 교사를 택했다. 학창 시절 내내 추억할 만한 좋은 기억 하나 없고, 찾아가고 싶은 스승도 없는, 한국의 교육과 교사라는 직업에 매우 부정적인 사람이 교사가 되고자 면접관들 앞에서 가식을 떨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들 앞에 서 있었다. 어릴 적 내가 경험했던 교사들처럼 기계적으로 수업하고 가르치면 되겠지 생각했다. 아이들과 치고받으며 지내는 날이 계속되었다. 어느 날 퇴근하는 길에 집에 가지 않고 혼자 스탠드에 앉아 있는 반 아이를 보았다.
“왜 집에 안 가고 이러고 있어? 위험하니까 얼른 집에 가.”
그 아이는 마지못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그냥 가기 싫어서요.”
그렇게 말하고 떠나는 아이의 눈동자에서 굉장히 익숙한 무엇인가를 보았다. 집에 오는 내내 그 아이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다음 날부터 좀 더 찬찬히 학생들을 관찰했다.
집의 어둑함이 싫어 학교를 배회하는 아이
외로운 마음에 친구들과 어울려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신호를 보내는 아이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에너지를 장난기로 발산하는 아이
온통 겁먹어 질려버리기 직전의 아이가 보였다.
모두 나였다. 학교와 교사에 상처받던 나의 파편이 모두 교실에 빼곡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가기 싫은’ ‘자존감을 문제 행동으로 회복하려는’ ‘자신의 문제를 경청해줄 사람을 찾는’ 수많은 내가 교사가 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대를 졸업하고 임용에 합격하면 저절로 교사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이들의 눈동자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눈이 떠졌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교사의 삶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막 교사 생활 3년 차가 되었을 무렵, 여전히 교육이나 교사, 교실, 학생 등에 대한 철학이나 개념이 없었다. 한마디로 아무 생각이 없었다. 교사, 교직을 그저 직업으로 바라봤다. 일반적으로 교사는 학생을 사랑하는 직업, 혹은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직업으로 생각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렇기에 나에게는 학생과의 관계에 ‘연극’이 필요했다.
즐거운 주말이 지나 다시 맞은 월요일. 나는 지금도 월요일 아침의 교실 공기를 정말 싫어한다. 아무도 혼나지 않았는데, 혼난 것 같은 축 처지고 무거운 공기. 게다가 비까지 오는 날이면 학생들도 나도, 없던 병에라도 걸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럴 때 나에게는 연극이 필요했다.
“여러분! 월요일입니다. 주말 잘 보냈나요?”
별 응답이 없다. “아니요”라는 대답이 여기저기 들린다. 이 침묵과 처진 분위기를 이겨내야 한다. 그래야 수업을 시작할 수 있다.
“선생님은 주말이 너무나 즐거웠어요! 왜 그랬을까요?”
이 질문에 학생들은 이런저런 대답을 할 테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러분을 만날 생각에 기분이 좋았어요.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여러분과 즐겁게 지내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 거예요. 월요일 힘내요!”같이 훈훈하게 마무리하며 분위기를 북돋으려 했다.
그런데 평소 나에게 관심도 보이지 않고, 툴툴대는 시크함이 매력이던 여학생이 힘없이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무슨 답을 할까? 내가 그동안 했던 노력, (비록 연극이지만) 학생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는 걸까?
“여자 친구랑 진도 나가서?”
내 핑크빛 상상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도대체 ‘진도를 나갔다’는 표현이 초등학교 5학년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며, 설마하니 내가 지금 주말에 여자 친구랑 진도 나간 이야기를 학생들 앞에서 자랑할 거라는 상상도 엄청난데, 그마저도 ‘진도를 나가셔서’가 아닌 반말로 저렇게 툭 던진다고? 여기에 ‘진도 나갔으면 얼마나 좋겠냐’ 같은 웃긴 상상까지 살짝 끼어들었다. 결국 “쌤은 여자 친구와도 수업한 거냐” “진도를 왜 여자 친구와 나가냐”는 다른 학생들의 철없는 수군거림이 시작되자, 서둘러 “자, 책 펴요”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가 진땀 흘리며 연극을 하는 것을 알게 된 몇몇 선배 교사들은 혀를 차며 말했다.
“학생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상처받는 건 너야.”
“그거 얼마 못 간다.”
나에게는 초등학교 시절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아마 1990년대에 학교에 다닌 어른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졸업 사진과 소풍 사진 몇 장만이 그때를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소품이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 아쉬웠다. 그래서 교사가 된 후 학생들 사진을 많이 찍었다. 프로필도 찍고 일상도 담았다. 1년이 지나면 모두 현상해 사진첩을 만들고, CD에도 담아 마지막 날 선물로 전해줬다. 학생 개별 사진도 많았기에 일일이 분류하려면 며칠씩 걸리는 일이었다.
어느 해, 학년 마지막 날. 역시 학생들에게 그동안 열심히 찍은 사진과 CD를 선물로 주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은 내게서 떠났다. 그런데 그날은 뭔가 달랐다. 그동안 꽉 차 있던 교실에 혼자만 덩그러니 남자 무척 허전하고 외로웠다. 한창 잘 세워가던 도미노를 누군가 건드려 무너뜨린 듯한 기분이었다. 생이별이었다. 내 감정은 아직 남아 있는데, 학생들은 곧 새 학년, 새 친구와 새 선생님을 만날 생각에 들뜰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감정을 달래볼 겸 교실을 정리했다. 이내 앞서 느낀 감정이 싸늘히 식었다. 몇몇 아이들의 책상 속에서 사진첩과 CD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진 몇 장은 구겨진 채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예전에 들었던 문장이 머리를 관통했다.
“학생들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 상처받는 건 너야.”
‘깜빡 두고 갔겠지. 버린 이유가 있겠지’ 하고 애써 다독여도 그날만큼은 보지 말았어야 할 장면이었다. 아이들이 원망스러웠다. 공허했던 마음이 뾰족해졌다. 그리고 이게 실연의 아픔과 무척 비슷한 감정이라는 걸 깨닫고는 깜짝 놀랐다. 그동안 다 연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나 얘네 사랑한 거야?
그날 이후 나는 교사의 감정은 분필 같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써봐야 닳아 없어지는 것은 분필이고, 남은 건 곧 지워질 글씨와 그림일 뿐이라고. 그러니 열심히 뭘 쓰고 남기려는 노력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선배들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모두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테니까. 그런데 교직 생활을 계속할수록 의문이 커져갔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아파하면서도 또 연애를 할까. 어쨌든 연애를 하는 동안은 행복한 거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 실천하는 것,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는 것이 예정된 이별의 상실감까지 모두 덮어주는 게 아닐까.
“만나서 반가워요! 선생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신가요?”
그래서 학생들과의 첫 만남에서 이렇게 뻥을 친다. 당연히 학생들은 당황해하며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그럼 “곧 그렇게 될 거예요”라고 말한다. 우리는 곧 서로 사랑하게 될 거라고 호언한다. “나는 분명 너희를 사랑하게 될 테니, 너희도 그렇게 만들 거야!”라는 스스로에게 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전히 교사의 감정은 분필 같다고 생각하지만, 닳아 없어지는 것을 걱정하기보다 그 덕분에 완성될 멋진 그림과 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왕 닳아 없어질 거 좀 더 멋진 글과 그림을 남기고 싶다. 결국 지워지더라도 그 과정을 지켜보는 나와 수많은 아이들이 있으니 말이다. 이별과 그 뒤에 찾아올 아픔이 예정된 학생과의 만남, 사랑하고 끝내 이별하겠지만 그 시간 동안 나는 분명 행복을 느끼고 성장할 것이라고 믿는다. 교직만큼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이 잘 어울리는 직업이 또 있을까.
한 직업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 직업 특유의 환경과 그 때문에 이루어지는 노동의 결과로 직업병을 얻는다. 직업병은 낱말 그대로 ‘질병’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직업의 특유한 성향을 인간이 내면화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격이나 말투나 자세 등이 바뀌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틀린 맞춤법을 보면 도저히 넘길 수 없다든가, 친구들 이야기에 학생과 상담하듯 자연스럽게 ‘오구오구’ 맞장구치는 것 등이 있다. 어떤 정보를 들으면 그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기어이 확인해보려 하거나, 그냥 말해줘도 아는 건데 쉽게 이해시킨답시고 장황하게 말하는 버릇 또한 그렇다.
사실 앞에 적은 내면화된 직업적 버릇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이런 버릇 때문에 가끔은 친구들에게 (심지어 같은 교사들에게도) 핀잔을 듣기도 한다.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교사 일을 하며 얻은 직업병 중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 딱 하나 있다.
퇴근길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오면 작은 공원이 있는데 정자 몇 개에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편하게 앉거나 누워 있었고, 아이들은 뛰거나 앉아 있었다. 조금 큰 아이들은 다 같이 모여 대화 한마디 없이 각자 자신의 스마트폰을 보며 무엇인가를 했다.
‘아유 가끔 허리 좀 펴지. 저러다 거북목 되는데’라고 생각하며, 여기저기 버려지듯 내팽개친 옷과 자전거 등이 눈에 띄자 ‘저거 저러다 더러워지는데. 잃어버릴 수도 있고. 깜빡 잊고 집에 가면 엄마한테 혼날 텐데…’ 하고 걱정했다. 학교에서 퇴근했다는 사실을 잊고 교실에서 하는 잔소리를 마음속으로 되뇐 것이다. 공원을 가로질러 출구에 이르렀을 때, 여덟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두 명이 화단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둘러놓은 철제 펜스 위에 올라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은 중심을 잡으려고 화단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붙잡고 있었다.
만약 학교였다면 “당장 내려오세욧!” 하고 말했겠지만, 여긴 학교가 아니었다. 엄연히 보호자가 있는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했다가는 오히려 불순한 의도를 지닌 어른으로 오해받기에 딱 좋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자꾸 눈에 어른거려 도저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두 아이 중 한 명만 균형을 잃어도 본능적으로 다른 아이를 붙잡을 테고, 그러면 둘 다 대책 없이 바닥에 나뒹굴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상상력도 직업병이다). 그래서 우선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저러다 내려오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고, 주변에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보호자가 말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 편히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누구도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고, 기어이 한 아이가 펜스를 발판 삼아 나무에 오르기 위해 깊이 파인 옹이에 발을 걸치려 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성인 남자 키보다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재빨리 다가가 말을 걸었다.
“친구들, 위험해 보이니 내려오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다행히 두 아이는 낯선 어른의 말을 존중했고, 모두 안전하게 펜스에 내려왔다.
“왜 그러세요?”
“서… (순간 ‘선생님이’ 나올 뻔했다) 아저씨가 보기에 나무까지 올라가는 건 위험해 보여서 그랬어요.”
그런데 이어진 아이의 한마디에 나의 내면화된 교사 본능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저희 여덟 살인데요?”
“여덟 살은 다치면 안 아파요? 여덟 살은 떨어지면 안 다쳐요? 학교에서 안전한 생활 배웠죠? 그 시간에 위험한 곳에 올라가면 안 된다고 배운 거 기억나죠? 그리고 여러분이 올라가면 저 나무가 아프다고 느끼지 않을까요?”
따끔한 질책과 학교에서 배웠을 내용의 복습, 그리고 감정이입을 통한 환경보호까지 누군가 써준 대본을 읽는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털어냈다. 웃긴 건 아이들의 대답이었다.
“선생님이세요?”
아, 직업병. 집에 돌아와 ‘그냥 내려오라고만 할걸’ 하고 후회했다. 나 여덟 살인데 네가 왜 참견이냐는 말에 흥분했다. 다른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교사라면 그런 반응을 웃어 넘길 수 없다고 여기는 것도 어쩌면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직업병만큼은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날은 두 아이에게 ‘이상한 아저씨가 참견한 날’이겠지만, 나에게는 어쩌면 생겼을지 모르는 위험에서 아이들을 지킨 날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고 믿는다.
많은 어른들이 혀를 차며 요즘 어린이와 청소년이 과잉보호 속에 자란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학교 밖에는 무관심 속에 방치된 아이들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과잉보호받는 것은 그들의 꿈이나 진로일 뿐, 부딪히는 가족 구성원과 소외된 교우 관계,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 방치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