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미
소설가, 영화평론가.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교수와 교양교육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과 대학교양교육연구소협의회장을 맡고 있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회장 및 한국사고와표현학회장을 역임했으며, 칸, 베를린, 부산국제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심사위원과 춘사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문학사상』 소설 부문으로 등단, 단편소설 「강이 없는 들녘」으로 96통일문학공모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구보 씨의 더블린 산책』(26회 숙명문학상 수상작), 『필름 리터러시』, 『영화와 글쓰기』, 『다원화 시대의 영화 읽기』 등이 있으며, 『세계일보』에 「황영미의 영화 산책」을 연재 중이다.
김시무
영화평론가, 부산대학교 영화연구소 연구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영화학회장을 역임했고, 부산국제영화제 전문위원, 청룡영화상 심사위원, 대한민국 영화대상 심사위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영화비평가연맹 한국본부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영화예술의 옹호』, 『Korean Film Directors: Lee Jang-ho』, 『홍상수의 인간희극』, 『스타 페르소나』, 『영국의 영화감독』 등이 있다.
책머리에
봉준호 감독은 일곱 번째 장편영화 〈기생충〉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한 주요 부문 4관왕이 됨으로써 한국영화사뿐만 아니라 세계영화사를 새로 썼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됐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기생충〉까지 영화를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어떻게 이러한 결과가 가능했는지 끊임없이 탐구했다. 봉준호 감독은 〈플란다스의 개〉를 시작으로 20년 동안 치열하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왔다. 〈기생충〉에 대한 논문만도 1년 반 만에 스무 편이 넘는 지금, 봉준호 영화의 특징과 다양한 측면을 두 평론가가 각기 다른 시각으로 접근한 이 단행본은 독특한 지점을 갖는다.
이 책에서는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를 비롯하여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토대로 감독의 세계관과 그 뿌리를 살펴보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에 쓴 감독론과 개별 작품들에 대한 리뷰를 모아 제출한 원고가 ‘2020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사업에 선정됐고, 이후 상호 간 협의를 거쳐 장문의 분석 글을 함께 작성하는 방식으로 본문을 완성했다.
본고를 책으로 출판해주겠다고 선뜻 나선 솔출판사의 임우기 대표님께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난삽한 원고들을 깔끔하게 정리해준 편집팀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바쁜 일정에도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신 봉준호 감독에게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2020년 11월
황영미, 김시무
장르에 대한 열정, 부조리에 대한 인식을 엿보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으로 한국영화 100년사에 당분간 넘어서기 어려운 기록으로 남을 뛰어난 업적을 세웠다. 봉준호 감독의 어떤 점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주요 부문 4관왕 수상이라는 대기록뿐 아니라 천만 관객을 동원한 대중성까지 가진 결과를 배태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상 수상 이후에도 새로운 시나리오 집필 작업에 몰입하기 위해 인터뷰는 물론 국내 여러 영화 시상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필자 황영미, 김시무 영화평론가의 이 책 『봉준호를 읽다』 단행본을 위해 짬을 내어 화상으로 인터뷰를 나누었다.
열정만으로 영화 동아리에 참여했던 시절 이야기부터 영화 제작 시 뒷이야기와 〈플란다스의 개〉부터 〈기생충〉까지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으로, 허심탄회하게 진솔한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이번 인터뷰는 봉준호 감독이 20여 년 동안 왜, 어떻게 영화만을 보고 달려왔는지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
최초의 충동을 밀고 나간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화제에서 잇달아 최고의 작품상을 수상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감독이 되셨는데요. 앞으로 영화를 시작하는 후배들이 명실공히 롤 모델로 삼고 싶은 감독이 되셨어요.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는 후배들을 위해서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나, 주제나 스타일 같은 것, 그리고 또 영화 찍을 때 ‘나는 이것에 대해서는 뭐 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요즘도 시나리오 쓰며 새로운 스토리텔링이라는 상황에 직면하다 보니까 쉽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처음 시작하는 분들이 고생할 각오를 하셨으면 좋겠고, 결코 쉽게 써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하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쉽게 써졌을 때, 의심해봐야 합니다. ‘어! 왜 이렇게 잘 써지지? 어제 쓴 것은 정말 내가 생각해도 잘 썼어.’ 이런 생각이 들 때 오히려 의심해봐야 된다는 것이죠.
제가 다른 사람의 시나리오를 읽고 모니터를 해야 될 때가 많아요. 특히 조감독이나 연출부를 했던 친구들이 모니터를 부탁할 경우를 보면, 아주 거칠게 ‘집중력’이라 그러잖아요. 여러 가지 사건이라든가 상황, 인물, 감정이나 뉘앙스 이런 것들이 많은데, 항상 잘 쓰인 시나리오 또는 찬사를 보내고 싶은 시나리오들은 어떤 형태로든 집중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죠. 러닝타임이 1시간 반이든 2시간이 넘든 한 번도 놓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이죠. 집중력이란 것은 매우 포괄적이고 폭넓게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긴 한데, 어쨌든 뭉뚱그려 말하자면, 첫 페이지부터 끝 페이지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는 시나리오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을 항상 생각할 필요가 있어요. 이 시나리오는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가? 그것을 잃지 않았을 때 나중에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스크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자기 핸드폰을 꺼내 들지 않고요. 히치콕이 평생 하려고 했던 것도 그런 것이라고 하더라고요. 관객들과 자기가 2시간을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2시간 동안 관객을 붙들어 매고 멱살을 잡고 가듯이 갈 것인가? 저도 그런 부분에 좀 강박이 있어서 그런지 집중력이란 단어 하나만은 일단 얘기하고 싶군요.
영화 촬영에 임하실 때의 자세 같은 것을 듣고 싶습니다.
영화를 찍을 때는 솔직히 말하면, 무사히 완성하고 싶다, 그 생각밖에 없어요. 여러 가지 물리적인 어려움이 많기도 하고 실제로 영화를 찍을 때 육체노동이 상당히 많잖아요. 혼자 책상에서 구상하고 할 때는 혼자서 막 영화의 역사를 아우르면서 달콤한 생각에 젖어들지만 막상 현장에 나가면, 수백 명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나가게 되면 정신이 없죠. 무사히 마지막 날까지 잘 찍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폭풍우가 부는 악천후에 배를 몰고 나가는 선장 같은 느낌이고, 무사히 항구에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없고 잘게 쪼개 보면, 하루하루 오늘 찍고 싶은 숏을 잘 찍고 싶다, 라는 그런 원초적인 생각밖에 없는데요. 사실 그처럼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오히려 제일 처음에 이 스토리나 아이디어를 떠올렸을 때 자신을 흥분시켰던 게 뭔지, 그 충동이란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창작자의 입장에서 최초 충동 같은 게 있는데, 그것을 사실 많이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죠. 한 편의 영화를 찍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1년, 2년, 4년이란 긴 작업을 하다 보면 자기를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던 그 최초 충동을 잊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것 같아요. 이제 영화를 처음 시도하는 후배들에게는 아마 그 부분이 가장 절실하게 다가올 것 같은데요.
냄새에 대하여
감독님께서 집중력을 말씀하셨는데, 돌이켜 보면 영화 〈기생충〉은 냄새라는 화두에 집중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어요. 이 영화에는 여러 가지 장점들이 많지만, 특히 냄새라는 모티브에 집중하시게 된 계기를 말씀해주세요.
말씀하신 대로 특히 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고 압박하는 어떤 키워드가 냄새인 것 같아요. 영화 전반부에는 냄새가 거의 안 나오거든요. 부잣집 다송이 꼬마 녀석이 송강호 씨, 기택과 그의 와이프, 충숙의 냄새를 맡으면서 냄새에 대한 부분이 촉발되는데, 다송이가 박소담 씨, 즉 제시카 선생님한테도 비슷한 냄새가 난다고 지적을 하게 되죠. 신이 바뀌면 온 가족이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이게 반지하 냄새다, 하는 자조 섞인 말을 하면서부터 출발이 되는 것이죠. 영화의 정확히 전 후반 중간쯤 되는 지점인데, 이후부터 점점 냄새에 대한 반복적인 강박에 빠져들게 되고, 급기야 클라이맥스에서 기택이 갑자기 칼을 손에 쥐고 우발적인 살인을 하게 될 때도 보면, 이제 그 트리거가 이선균 씨, 즉 동익이 되는 것이죠. 그가 이렇게 손을 코로 가져가면서 인상을 쓰는데, 그 순간에 일이 벌어진 것이죠. 사실 이게 기택 자신에게 한 인간적인 모멸도 아닌 것이고, 지하실 남자 근세가 기택의 절친인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코를 막는 모습이 사실 어떻게 보면, 계급적인 분노 같은 것이잖아요. 좀 거창하게 치장을 하자면요. 거기서 본능적인 어떤 것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폭발하게 되는 건데, 이 냄새라는 것도 사실은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의 코드였던 것 같아요.
사실 공간도 어쩔 수 없이 부잣집과 반지하처럼 계층이나 계급에 대한 분리, 그 배열을 갖고 시작한 것이잖아요. 예를 들면 사운드 디자인 할 때조차도 청각적으로, 돌비 애트모스DolbyAtmos 녹음을 하면서 소음도 사실 계층 격차가 있다는 것이죠. 반지하 동네는 항상 와글와글한 노이즈들을 많이 배출했고, 사실 삼청동 부자 주택가라든가 실제로 영화를 찍은 성북동은 조용해요. 소음이 별로 없어요. 행인들도 별로 없고. 심지어 소음조차 계층 격차가 있는 것인데, 하물며 냄새라는 건 아주 원초적이고 강력한 부분이죠. 그리고 우린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보통 냄새에 대해 서로 잘 얘기하지 않죠. 소리나 청각적인 것은 얘기하더라도 “당신 지금 무슨 냄새가 나요.”라고는 좀 무례하기 때문에 얘기를 못 하잖아요. 이 영화는 사실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의 선을 넘는 영화잖아요. 어느 한 가족이 다른 한 가족의 사적인 세계까지 깊이 침투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침투라는 게 달콤하고 재미있고 짜릿한 것으로 보여져요. 일자리를 얻으면서 침투하는 게 짜릿한 것이지만, 후반부에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되잖아요. 그리고 듣고 싶지 않은 얘기를 듣게 되고, 들키고 싶지 않은 자기 냄새를 맡게끔 되잖아요. 테이블 밑에 숨어서. 냄새란 아주 가까이 있어야만 맡을 수 있는 것이잖아요. 정말 물리적으로 가까이, 근처에 있을 때만 맡을 수 있는 것이 냄새죠.
이 영화의 스토리 자체가 사실 평소 전혀 만날 수 없는 계층의 인물들이 서로 냄새를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이 근접하게 되는 얘기잖아요. 그로 인해서 폭력적인 사태가 나기도 하기 때문에 상당히 필연적인 부분인 것 같고, 그 냄새라는 키워드도 사실은, 아까도 사운드 얘기까지 했지만 계급이나 계층이라는 핵심적인 영화의 테마에 종속돼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예의의 선을 넘는 민감하고 무례하고 또는 불편하고 개인적인, 사적인 영역에서의 침범이죠. 동익의 대사에 그런 게 있죠. “뭐 김 기사 그 양반이 선을 넘을 듯 말 듯 안 넘고, 그건 내가 인정하는데, 대신 냄새가 선을 넘는다.” 그러잖아요. 차가 앞으로 달리면 사실 냄새가 뒤로 넘어오죠. 좁은 자동차 공간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그 정도로 근접해서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곳도 사실 별로 없어요. 그런 밀접한 공간으로 부자와 빈자를 몰아넣는 영화이기 때문에 냄새라는 키워드가 나온 것은 필연적이고, 그것이 결국 영화의 클라이맥스까지 가게 됐던 것 같아요.
냄새를 인문학적으로 생각해보면 오감이고, 감각이잖아요. 데카르트가 감각보다는 지성이나 이성,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규명했는데, 현대에 와서 근대를 비판하게 되면서 감각이 이성보다 인간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 더 가깝다고 보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어가고 있는데요. 〈기생충〉에서의 냄새도 결국 인간의 본질이 사실은 이성이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감각이 인간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입장에서 해석이 가능하다고 보거든요. 후각이 감각 중에 가장 원시적이고 본성적이라고도 하고요.
네! 제가 인문학적 지식이 일천한 탓에 데카르트와 관련된 사항은 잘 모르지만, 말씀하신 맥락이 어떤 건지는 알겠어요. 맞는 말씀이고요. 그렇게 지성이라든가 특히 문자나 활자로 추상화된 형태처럼 시각, 청각, 후각 이런 것보다 논리나 이성 같은 것들이 더 우위에 있다, 라고 믿으면서 감각적인 부분을 의식적으로 우리가 약간씩 내리누르려고 했고, 이상하게 감각 중에도 시각이나 청각에 비해 후각을 특히 뒷전으로 밀어내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후각, 냄새에 대해서 서로 얘기를 한다는 건 왠지 약간 무례한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가 꽃향기가 아름답다, 그런 건 얘기하지만 상대에게서 악취가 난다든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얘기하기가 불편한 것처럼 다루어온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은 오히려 우리가 말을 하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가장 즉각적이고 원초적으로 반응하잖아요. 냄새란 게 참 애매한 게, 그 사람의 계급적인 것은 물론이고 여러 측면에서 삶의 상황을 사실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거든요.
낮에 9시부터 해질 때까지 육체노동을 한 사람의 몸에서 땀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음식물 쓰레기를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 치우는 궂은일을 한 노동자한테는 또 그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잖아요. 생활의 여러 환경 상황들을 노동이나 삶이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더 냄새에 대해 얘기하기가 꺼려지는 것 같아요. 영화에서도 그런 것들이 잘 다뤄지지 않는 편이죠. 하지만 사실은 우리 감각이 가장 원초적이고 우선적으로 반응을 하고 있잖아요. 그것을 서로 표현을 안 할 뿐이죠.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것을 큰 스크린에 직접 대놓고 코앞에 들이밀면서 표현을 하니까 그것이 영화가 가진 어떤 적나라함 또는 영화적인 무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 것이죠.
냄새와 관련해서 더 질문을 드리면요. 영화를 보면 마지막 시퀀스에서 기택이 박 사장을 칼로 찌르잖아요. 그 장면에 대해서 기택과 근세의 계급적 연대라고 해석하는 평론가도 있더라고요. 하층계급이 연대해서 부르주아를 제거했다는 거죠. 저는 그보다는 기택이 박 사장을 칼로 찌른 것은 그가 근세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코를 찡그리는 순간이었는데, 그 순간 기택은 박 사장이 자기와 근세를 한통속으로 본 것에 대해서 격분을 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보거든요.
시나리오를 쓸 때는 직관적으로 쓰게 되는데 써놓고 저도 생각을 하게 되죠.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볼 수 있을까? 우리가 현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사건을 많이 맞닥뜨리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뉴스를 봤을 때 어떤 맥락에서 이런 일이 저질러지고, 그리고 실제로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도 도대체 내가 왜 그런 건지 스스로 이해를 못 하는 우발적인 범죄도 있잖아요. 묻지 마 범죄 같은 것들을 보면요. 일본에서도 아키하바라에서 어떤 남자가 갑자기 칼을 휘둘러 열 몇 명이 죽은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의 근본적인 모티베이션,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들이 분분했었죠. 대표적으로 1900년대 초에 프랑스 지식인 사회를 뒤흔든 사건이 있었어요. ‘파팽 자매 살인 사건’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대한 책과 영화와 연극도 나왔어요.
장 쥬네의 〈하녀들〉이 그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죠.
네! 두 자매가 멀쩡히 하녀 생활을 잘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 주인 가족을 완전 몰살시켰어요. 다리와 눈을 칼로 난자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도망도 안 가고 자신의 방에서 그대로 있다가 나중에 경찰들이 와서 잡아갔는데, 이건 명백한 정신병 증세 같은 것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후에 자매 중 언니가 감옥에 투옥돼서 점점 정신병적 분열 증세를 보였는데, 그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여러 예술가나 인문학자들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이것을 무슨 계급적인 분노 같은 이런 너무나 간단한 말로 재단할 수 있는 것인지, 거긴 개인의 문제라든가 또 그 자매가 친자매이면서 약간 연인 같은 관계였다는 이야기도 있거든요. 이렇게 상당히 복잡 미묘한 여러 가지 층이 있는 건데, 어쨌든 그 사건은 물리적으로 터진 것이죠. 그 터진 사건을 갖고 우린 여러 가지 해석을 하는 건데요.
제가 기택과 동익 사이에서 벌어지는 그 마지막 폭력의 클라이맥스에서도 좀 그런 식으로 접근한 부분이 있어요. 이 일은 분명히 제 입장에서는 육체적 물리적으로 터지고야 마는 일인데, 일을 저지르고 나서 한 3초도 안 돼서 기택 본인도 후회를 하면서 어이없어하고, ‘내가 왜 이랬지?’ 하는 표정을 짓죠. 시나리오에도 그렇게 되어 있고요. 그 사건은 관객의 입장에서나 그렇게 시나리오를 쓴 나조차도 영화가 끝난 후에 한번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그런 대목인 것이죠. 저 자신도 궁금해하면서 쓰는 경우가 있어요. 무책임해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예를 들어서 〈살인의 추억〉에서 박해일 씨가 범인이냐 아니냐에 대해 배우 본인도 막 저한테 물어보고 그랬거든요. “감독님! 저는 알고 싶어요.”라면서 얘기를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 자신도 의문스러워하면서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죠. 그 모멘트에 기택이란 인물이 그런 행동을 폭발할 수 있는 어떤 멍석을 깔았다고 생각해요. 그 멍석이 뭔지는 얘기할 수 있겠죠.
근데 거기에는 방금 김시무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층도 분명히 있는 것이죠.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어떤 계급적인 연대를 느꼈을지에 대해서는 뭐 본능적으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택의 주된 공포는, 공포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선을 그으려고 하잖아요. “나는 반지하야. 당신 같은 완전 지하하고는 달라.” 반대로 지하실 남자 근세는 “아니 땅 밑에 사는 사람이 한두 명이냐? 반지하까지 치면 더 많잖아요.” 하잖아요. 근데 오히려 기택은 거기서 선을 그으려고 해요, 그 와중에. 그게 이 영화의 비극적인 부분인 것 같아요. 약자들끼리 서로 연대를 했으면 좋을 텐데 남자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다가 결국은 비극적 결말에 도달하잖아요. 화해를 할 수 있는 찬스가 한 번 있었죠. 기정이랑 충숙이 그 미트볼을 들고 뭐 내려가네 마네 하다가 찬스를 놓치고 결국은 비극이 터지는데, 기택은 끊임없이 선을 그으려고 해요. “당신은 아무 계획도 없지. 뭐 이런 데서도 살아지나?” 하면서 오히려 비하를 하잖아요. 사실 약간 슬픈 모습이죠. 결국에 가서는 지하실 남자랑 뭐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했었다는 얘기를 같이 하는데 거기서 잠깐 순간적인 어떤 공감 내지는 동질감 같은 게, 교감 같은 게 있기는 하죠. 저 녀석도 대만 카스테라 했다가 쫄딱 망했구나. 사채 빚을 졌구나.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느끼게 하니까. 하지만 그게 과연 그렇게 거창한 계층적인 연대감까지 발전했는지는 사실 의문이에요. 그럴 여유도 없었고요.
오히려 송강호는 무서워했죠. “나는 아직까지 반지하야.” 아마 기택 본인은 마음속으로 자기 스스로 반지상이라고 부를 것 같아요. 반지하나 반지상이라는 단어는 같은 상황이지만 반지상이란 표현을 더 좋아할 것 같고요. 지하실 남자 근세는 “왜 이러냐? 우리 다 같은 처지 아니냐?” 이러거든요. 이렇게 선을 그으려고 했던 사람이 기택인데, 말씀하신 그 클라이맥스 순간에는 근세와 기택을 그은 선이 일시적으로 지워진 것 같아요. 비록 순간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근세가 손에 들었던 칼을 쥐고 이선균을 향해서 선을 넘는 것이죠. 사실 이선균을 향한 선을 단 한 번도 넘지 않았거든요, 영화에서. 아무리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도 이선균에 대한 리스펙트는 계속 유지했거든요. 근세도 마찬가지죠. “이분 덕분에 한 달에 우리 집에 오는 돈이 얼마야.” 하면서. 사실 심지어 박 사장을 죽인 후에도 죄송하다고 하면서 울잖아요, 벽에 붙은 사진을 보면서. 결국 한 3초, 4초 정도 선을 넘은 것이죠. 칼로 찌르고 그래놓고 바로 금방 또 후회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계급적 연대가 있었다거나, 없었다거나 하는 그런 식의 너무 굵은 큰 덩어리의 규정을 내리는 것보다는 그 장면에 대해서 이렇게 사람들이 여러 가지로 해석하는 상황 자체가 더 좋고요. 파팽 자매의 사건을 놓고 프랑스의 인문학자나 지식인들이 다양하게 해석하려고 했듯이, 〈기생충〉에서도 그와 비슷한 논의가 오고 갔으면 했어요.
‘고등동물’과 ‘플란다스의 개’ 사이에서
이제 감독님이 처음 데뷔하던 때의 영화 이야기부터 하나하나 짚어나가기로 하죠.
감독님이 군대 제대하시고 ‘노란문’이라는 영화 동아리를 결성했는데, 이에 얽힌 사연을 말씀해주시지요.
‘노란문’은 1992년도에 만들었거든요. 지속된 것은 한 2, 3년밖에 안 됐는데, 전성기 때는 인원이 상당히 많았어요. 분과를 좀 나눠가지고 시나리오, 연출, 비평, 이렇게 팀을 세 분과로 나눠서 공부했는데, 그중에 대학원으로 갔던 누님들이 계셨고, 나중에 그 노란문 동아리 멤버들이 저의 첫 단편영화를 함께 찍었거든요. 제가 노란문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지만 창단 멤버인 건 사실이고요. 처음에 한 다섯 명 정도가 시작을 했어요. 최근에 개봉된 〈저 산 너머〉라고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다룬 영화가 있는데, 그것을 연출하신 최종태 감독님이 실질적인 창립자였죠. 그분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대학원을 다니던 중이었는데, 저는 막 군복무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합류를 했어요. 직업적으로 영화를 하겠다고 마음을 굳힐 때였어요.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는 혼자 영화를 독학으로 공부를 하던 때였죠.
제가 감독이 되겠다고 완전히 마음을 먹은 게 군 입대 후 18개월 방위병으로 출퇴근 생활을 할 때였는데, 그 당시에 마포에 있는 ‘영화 공간 1895’라고 지금은 작고하신 이연경 씨가 24시간 영화 학교라는 것을 개설하셨죠. 그 공간은 어찌 보면 대한민국 최초의 사설 시네마테크 같은 곳이었는데, 이연경 씨가 당시 불법 복제 테이프를 1000여 점을 관리하고 계셨죠. 아마 선생님들도 그 풍경이 기억나실 겁니다. 처음 제가 빡빡머리를 하고 거기를 갔어요. 24시간 영화 학교에 등록을 하고 영화 수업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저는 사회학과는 그냥 들어간 것이었고, 마음은 영화에 있어서 영화를 전공하거나 영화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부러웠죠. 우리 대학교에는 영화과가 없었고, 영화 공간 1895의 24시간 영화 학교에 갔더니 주진숙 선생님과 전양준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계셨어요. 주진숙 선생님이 하는 수업에서는 데이비드 보드웰의 『필름아트』, 그것도 역시 불법 복제된 이상한 해적판을 가지고 몇 달간 공부를 했어요. 나중에 제가 홍콩과 밴쿠버에서 보드웰을 직접 만나서 친해지고 지금은 친구가 됐죠. 그때 얘기를 하니까 좋아하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식으로 영화 공부를 하다가 방위병 생활을 마치고 우리도 그런 공간을 하나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후배 소개로 최종태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분도 그런 생각이 있으시길래 함께 노란문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게 됐어요. 거기서 영화이론 서적들로 공부를 많이 했어요. 되도 않은 실력으로 외국 원서를 번역하고 세미나도 했는데, 막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책들을 많이 읽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데요. 요즘은 교보문고에 가면 한 섹션이 다 영화 서적들로 꽉 차 있지만, 그 당시에는 번역서들도 거의 없었는데, 잭 엘리스의 『세계영화사』, 제임스 모나코의 『영화, 어떻게 읽을 것인가?』 등이 전부였죠. 그래서 아예 우리가 번역해서 공부하자는 분위기였죠. 비디오테이프가 닳고 닳도록 고전 영화들을 보면서 신을 분석하기도 했는데, 제가 〈대부〉에 나오는 어떤 살인 장면을 직접 콘티를 그려가면서 분석을 했고, 그것을 세미나에서 발표도 하고 그랬죠. 워낙 중구난방이고 어설펐지만, 그래도 아주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그 동아리가 흐지부지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 그런 동아리를 만들어서 공부도 하고, 저로서는 〈백색인〉이라는 단편영화도 만들었죠. 그 멤버들과 단편영화를 만들었을 즈음에는 거의 해체가 되었던 같아요. 저는 영화아카데미에 합격을 해서 꿈에도 그리던 진짜 정규 영화 수업을 처음 듣게 된 상태였죠.
감독님이 영화아카데미 졸업하고 〈플란다스의 개〉로 데뷔를 하셨잖아요. 사실 영화 제목이 무척 아이로니컬한데, 그 제목은 이미 잘 알려진 제목이고 또 막상 기대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그런 이야기라서 제목과 내용의 충돌이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아요.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관련 전문가들이 높게 평가해 첫 작품으로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감독님이 제목을 그렇게 붙인 데에는 어떤 의도가 있으셨나요?
사실 제가 붙였던 제목은 아니에요. 제가 원했던 제목이 아닌데, 제가 시나리오 쓸 때의 제목은 ‘애니멀’이었어요. 말하자면 개와 이상하게 얽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영어 제목은 ‘Higher Animal’, 즉 고등동물이라고 붙였어요. 고등한 인간이 개만도 못한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이야기를 보여주려고 했죠. 이 영화에서 이성재는 대학교수가 되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그런 인간을 고등동물이라지만, 개에 비할 때 뭐 얼마나 더 고귀하고 훌륭한가 하는 시니컬한 관점에서 고등동물이라는 영어 제목을 붙였던 것이죠. 그런데 제가 데뷔하는 신인 감독이다 보니까 마케팅이나 이런 영역에 있어서 제가 고집을 부릴 만한 파워가 없었죠. 제작사에서 붙인 제목이 〈플란다스의 개〉였는데, 그때 싸이더스에 있었던 차승재 대표가 ‘애니멀’이라는 제목은 너무 지식인 느낌이 나고, 또 소설 제목 같다는 거예요. 그 영화에서 보면, 노래방 신이 하나 있어요. 거기서 이성재가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부르거든요. 그것에 착안을 하셨는지 차 대표가 〈플란다스의 개〉가 재밌지 않냐 그러시는 거예요.
관객들은 대부분 그 만화영화를 알고 있었죠.
그래서 아니 이게 이러면 사람들이 다 너무 예쁘고 동화적인 얘기처럼 알고 있는데, 우리는 막 아파트 지하실에서 보신탕 끓여 먹고, 강아지 연쇄 살해 사건 뭐 이런 것도 다루고 있는데, 너무 아이로니컬한데 괜찮으냐고 했죠. 대표께서는 그러니까 더 역설적이고 아이로니컬한 게 아니냐 하시더군요. 아이로니컬하고 역설적인 것이라면 뭐 나도 좋다, 그래서 저도 동의를 하게 된 것이고, 나중에 영어 제목은 〈Barking Dog Never Bite〉라고 붙이게 된 것이죠. 그것은 해외 배급사에서 붙인 제목이었어요. 『플란다스의 개』 하면 원래 벨기에의 동화잖아요. 그리고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는데, 외국 바이어들이 헷갈릴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한국 제목이나 영어 제목이 저의 의도대로는 안 됐고, 제작사와 해외 세일즈사의 의견대로 된 것이죠.
그 후로는 그런 경우가 없어서 〈살인의 추억〉 때부터 현재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제목은 다 저의 의도와 고집대로 했는데, 〈기생충〉 때는 제목 탓에 마케팅 팀은 좀 불안해하기도 했죠. 이게 뭐랄까, 무슨 충蟲 그러면 또 요즘 인터넷에서 비하 발언할 때 많이 쓰이잖아요. 그건 저도 인정을 하고 오히려 위험하고 좀 불안하면 다른 걸 한번 제시해달라고 했는데, 뭐 제작사나 마케팅 팀이나 다들 딱히 또렷이 뭔가를 제시하지 못하더니 본인들도 좀 위험하지만 〈기생충〉밖에 없는 것 같아요, 라고 결론을 내리더라고요. 여러분들이 OK 하면 나도 좋다 했더니 〈기생충〉으로 됐고, 영어 제목도 〈Parasite〉로 된 것이죠. 〈괴물〉이나 〈마더〉 등등은 다 저의 뜻대로 했던 제목이고요.
그래서 〈플란다스의 개〉를 찍을 때, 사실 워낙 개인적인 체취들이 많이 들어가게끔 무언가 사적인 영화처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많이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 이성재 씨나 배두나 씨가 뛰어다니는 복도식 아파트가 나오는데, 제가 실제 살았던 아파트였어요. 대학교수가 되려고 하는 이성재와 영화감독이 되려고 하는 저의 신세 같은 것들이 약간 비슷하게 대입된 것이죠. 제가 조감독 생활할 때 느꼈던 것인데, 아파트 단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출근하는데, 저는 그냥 백수처럼 가만히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서 보냈어요. 오전 10시쯤에 아파트 단지에 있으면 온갖 소음들이 들려오죠. 개 짖는 소리도 들리고 애 우는 소리도 들리고 피아노학원에서 들리는 소리라든가 그런 분위기를 제가 잘 알았어요. 어정쩡한 성인의 상태, 제대로 된 오피셜한 직업적 세계에 아직 진입을 못 하고 어정쩡하게 붕 떠 있는 상태, 영화 속의 이성재의 상태를 저는 누구보다 아주 잘 안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저도 그때 조감독 생활을 했는데, 말이 조감독이지 일이 없을 때가 많았거든요. 일거리도 없고 백수로 지낼 때가 많았는데, 그래서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결혼식 비디오도 찍으러 다니고 회갑연이나 돌잔치 비디오도 찍었는데, 제가 그때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갖고 계신 분들도 많을 거예요. 제가 찍고 편집도 다 하고 그랬어요. 먹고살아야 되니까. 저는 그때 이미 결혼해서 아이가 있는 상태였는데, 저나 아기 엄마는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어요. 저도 직업이 없었고, 요즘하고는 많이 달랐어요. 지금은 표준근로계약도 하고, 연출부 막내들도 200~300만 원씩 월급을 받고 완전 정상화가 됐으니까. 미국이나 일본처럼요. 과거엔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황당한 임금을 받고 일을 했죠. 그때는 참 어이가 없었는데, 극 중의 이성재 씨의 상황이나 감성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안다고 생각했어요. 제 형이 대학교수인데, 그 당시에는 기약 없는 조교 생활을 오래 하고 있었어요. 조교도 하고 시간강사도 했는데, 한 발짝 너머에서 형을 바라보면서 이성재 캐릭터를 구상했는데, 저의 개인적인 체취들이 많이 묻어 들어간 캐릭터였죠.
반면 배두나 씨 캐릭터는 실제로 여상을 나와서 경리를 하시는 분들을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도 하면서 구상했는데, 저 자신의 투영이라기보다는 내가 관찰한, 어떻게 보면 제 환상 같은 게 좀 들어가 있는 다분히 만화적인 캐릭터이기도 하잖아요. 〈기생충〉을 찍은 후에 다시 두 캐릭터를 이렇게 돌이켜 보니까 어떤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평소에 만나기 힘든 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주 엉뚱한 사건으로 만나게 되는 얘기잖아요. 여상을 졸업한 관리사무소의 경리와 대학원을 나와서 결국 교수가 되는 남자가 강아지 소동 때문에 서로 얽히게 되는데, 그 스토리가 끝나면 그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일이 정말 없을 것 같다는 것이죠. 〈기생충〉에서도 만나기 힘든 두 계층이 가정부, 운전기사, 과외 선생이라는 가내노동으로 엉키게 되는 얘기잖아요. 비슷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기생충〉의 시나리오를 쓸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그런 느낌이 다시 환기가 되더라고요.
지금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때는 첫 장편영화를 찍는 감독에게 투자를 해야 되는 상황이잖아요. 그때 감독님으로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비전을 가지고 미래에 이런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셨을 텐데, 무명 시절 조감독도 하고 또 아르바이트도 하고 첫 영화를 시작할 때까지도 계속 그런 상태였을 것 같아요. 요즘 청년 실업 문제가 굉장히 심각해지면서 비전도 잃어가는데, 특히 우리 한국영화 시장에서 코로나 19 때문에 더 위축되기도 하고, 또 대박과 쪽박이라는 극단 속에서 여러 가지 제작 상황 때문에 굉장히 어렵잖아요. 그때 그 시기에 어떤 힘이 봉준호 감독님을 추동했는지, 감독님도 대학 졸업하고 그냥 취직해야 하나 하는 갈등도 있었을 테고요. CF 회사나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가볼까 하는 생각을 하셨는지, 아니면 내가 정말 감독으로서 나의 족적을 찍고 싶다는 그 생각도 하셨을 텐데, 그것을 추진해나가는 동력은 어떤 게 있었을까요? 난 영화에 미쳐서 그랬다, 혹은 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잖아요. 나는 영화 외에는 정말 하고 싶은 게 없었어, 라던지 말이죠. 영화를 계속할 수 있었던 동력 같은 것이 궁금합니다.
질문에 이미 답이 포함된 것 같은데, 정말 영화 찍고 싶어서 그랬어요. 다른 별생각은 없었던 것 같고, 영화를 너무 만들고 싶었고, 그 생각을 어릴 때부터 했었고요. 예를 들면 배창호 감독님은, 유명한 일화지만, 대기업에서 근무하시다가 박차고 나와 감독이 되셨죠. 물론 그게 더 대단한 것일 수도 있는데, 저는 사실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다른 직업이나 직장 생활을 해본 적이 없고 고교 시절에 잠시 TV 드라마 PD나 감독이 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었던 시기는 잠깐 있었어요. 그때 제가 MBC 드라마 같은 걸 많이 보면서, 황인뢰 감독이나 김승수 PD의 팬이었거든요. 그 당시 MBC 드라마 퀄리티가 높았어요. 훌륭한 단막극도 많았고요. 그때 보면 장선우 감독님이 다른 이름으로 드라마 연출도 하셨죠. 오히려 오늘날에 TV 피처feature처럼 완성도 높았던 매혹적인 드라마들이 꽤 있어서 TV 드라마 연출자가 될까 하는 꿈을 꾼 적이 잠깐 있긴 했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사실 다른 어떤 회사를 다녀본 적도 없고 다른 직업을 고민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잠깐 만화가가 될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대학신문의 만화를 아르바이트 삼아 그린 적도 있었고, 그렇게 혼자 개인적으로 만화를 끄적거린 적은 있었죠. 한번은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만화가 선생님한테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제 그림을 보고 그분이 아주 냉정하게 “자네는 데생의 기본이 안 되어 있네. 할 생각하지 말게.” 하시더라고요. 마음에 크게 상처를 받았고 그날 이후로 안 하게 됐죠. 외부에 공개된 적은 없는데, 제가 영화 동아리 할 때 한 20분짜리 인형 애니메이션을 찍은 적이 있어요. 영화 동아리 사람들만 모아놓고 보여준 적이 있는데, 만화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죠. 결국은 TV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이나 다 비슷한 테두리 안에 있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부터 사실은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는 집착이 있었어요. 원래 성격이 좀 집착이 강해서 신경정신과 의사들에게 강박증 판정을 여러 차례 받았는데, 강박이 심해서 그런지 딴생각을 할 틈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그런 개인적인 집착 같은 게 많은 동력이 됐던 것 같고, 자신감이나 마...